거의 모든 시간의 역사 - 시곗바늘 위를 걷는 유쾌한 지적 탐험
사이먼 가필드 지음, 남기철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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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것은 시간의 역사이자, 인간의 역사이다!

인간의 애증과 욕망이 담긴 시간에 관한 거의 모든 것!

 

 

 

   <느린 것이 아름답다>의 저자 칼 오너리는 '당신은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고 질문을 던진다. 기지개를 펴고, 이불을 정돈하고, 커튼을 열어젖히거나 여전히 이불 속에서 베개를 꼭 끌어안고 있을 것이라는 대답을 향해 그는 '아니지요. 당신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누구나 다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시계를 보는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아직 더 자도 될 만큼 충분히 이른 시간인지, 당장 이불 밖으로 뛰쳐나와야 할 만큼 늦은 시간인지 판단하기 위한 우리의 이러한 행위는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시계가 인간을 통제한다'는 그의 주장에 그 어느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

 

 

 

   <거의 모든 시간의 역사>의 저자 사이먼 가필드는 언어 사용에 있어서 시간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로 『옥스퍼드 영어사전』을 언급한다. 사전 속에 등장하는 가장 활용 빈도가 높은 명사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서 month가 40위에 올랐고 life가 9위, day가 5위, year가 3위, 그리고 가장 많이 쓰이는 명사는 time으로 선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시간은 우리 일상 곳곳에서 존재감을 발휘한다. 통제할 것인가, 통제당할 것인가. 이러한 주제 앞에서 우리는 점점 더 자유로울 수 없음을 느끼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중요한 순간들에 시간이 존재함으로써 발생된 다양한 사건들을 살펴보는 일이란 상당히 재미있는 일이다. <거의 모든 시간의 역사>는 바로 그러한 기록들이 담긴 흥미로운 교양책이다. 다시 말해 시간과 관련된 인류의 특별한 순간들을 추적한 시간잡학사전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우리가 사용하는 어휘는 시간에 의존한다. 단순히 하나의 낱말이 아닌 철학적인 개념으로 인간의 활동이나 말은 다른 어느 것보다도 시간에 의존한다는 뜻이다. on time, last time, fine time, fast time, recovery time, reading time, all-time 등 시간에 관련 어휘는 한도 끝도 없다. 이처럼 시간은 우리 일상 어디에나 존재한다. / 37p 

 

 

 

 

 

 

세상을 사로잡은 시간에 관한 이야기

 

 

   <거의 모든 시간의 역사>는 총 1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에서 6장에 이르는 1부에서는 태양과 별의 이동으로 시간의 흐름을 파악했던 우리 인간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시간의 질서를 정립했는지에 대한 과정을 살펴본다. 그 중 루스 이언이라는 영국의 아티스트가 만든 벽시계 하나가 등장하는 대목이 자못 흥미롭다. 당시 벽시계에는 시계판의 숫자가 10시까지만 적혀 있어 이 작품을 찾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루스 이언이 부활시킨 것은 1789년 프랑스대혁명 직후 만들어진 '공화력'이자, 당시 시간을 십진법으로 하루를 완전히 다르게 계산해 시간을 재설정한 프랑스인의 실험정신이 담긴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공화력은 달력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매우 정치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7일 가운데 하루가 휴일인 기존 달력과 달리 10일을 1주로 하여 3주가 한 달이 되는 방식의 공화력에서는 10일 중 하루가 휴일이었던 것이다. 한때 마야인들이 사용했던 마야 달력, 아즈텍 달력, 지금 우리가 표준으로 사용하고 있는 달력 또한 마찬가지로 크든 적든 어느 정도 질서와 통제력이 부여되어 있기 마련이고 나름대로 정치적 의도도 담겨 있음을 설명하며, 저자는 어느 날 갑자기 프랑스 사람들이 공화력을 사용해야만 했듯이 우리의 삶을 모두 비슷한 모양으로 만든 달력 시스템은 확실히 증명되었거나 우리가 전적으로 의존해야만 하는 것이 아님을 역설하기도 한다.

 

 

 

인내와 고독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필리버스터가 가진 공통점은 무엇일까? 민권 운동(당시에는 평등권 획득을 위해 운동을 해야 했다)이 한창 진행되던 1960년 2월, 미국의 일간지 <샬럿 옵저버>지가 이런 기사를 실었다. '필리버스터는 시간과 싸우는 설전이며 불가피성에 대항하는 사람들의 싸움이고, 침묵의 전조 증상인 쇠약해진 힘을 이겨내려는 목소리 싸움이다.' / 145p

 

 

 

 

 

 

   2부에서는 산업혁명 이후 급격하게 발전한 시간혁명을 다룬다. 오늘날 스위스하면 떠오르는 것이 '시계'이듯 시계 하나에 수백 여개의 부품을 담아내는 장인들의 집념을 엿볼 수 있음은 물론, 육상의 전설이라 불리는 로저 배니스터를 통해 신기록을 향한 신경전과 강박,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시간의 제약을 넘어서려는 위대한 노력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퓰리처상을 수상하였으며 우리에게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세상에 알림으로써 전쟁에의 경각심을 일깨워준 '베트남, 네이팜탄, 소녀(전쟁의 공포)' 사진의 작가 닉 우트를 통해 기막힌 타이밍과 재빠른 판단력이 낳은 위대한 사진 한 장의 기술을 읽을 수 있다.

 

 

 

 

 

 

   마지막 3부에서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시간에 대한 사색과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통제되지 않기 위한 인간의 미래를 모색하는 기회를 갖는다. 과거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는 연륜이 아니라 행적으로 산다. 호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하며 산다. 숫자가 아니라 감동으로 산다. 우리는 심장 박동으로 시간을 셈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은 마지막까지 모터사이클의 손잡이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인생의 진정한 가치와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보고 느끼는 것에 대해 탐구하는 여정이 담겨져 있는 책이다. 이 책을 쓴 작가와 그의 아들 크리스, 몇몇 친구는 미국 중부 평원지대를 거쳐 몬태나를 여행하며 여행은 시간 낭비가 아님을 깨달았다고 한다. "우리는 좋은 시간을 갖고 싶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시간'보다 '좋은'이 더 중요하다. 누구라도 당장 시간에 관한 관점을 바꾸어 '좋은' 시간에 관심을 갖는다면 세상은 변할 것이다."라고 쓰인 이 글은 앞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과 함께 우리가 시간 앞에서 어떠한 마음가짐과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지 깨닫게 한다. 이렇듯 <거의 모든 시간의 역사>는 저자 사이먼 가필드의 지적 탐구에 푹 빠져들다가도 어느새 철학적 물음으로 귀결되어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대하고 이와 연대해나가야 할 것인지 생각하게 한다.

 

 

 

슬로리빙의 목표는 게으른 생활방식이 아닌 조심성과 참을성을 길러 삶의 즐거움을 찾는 것이다. (…)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슬로리빙 운동은 단순한 즐거움의 추구를 지속가능성(생태계가 미래에도 유지될 수 있는 제반 환경) 정책과 건강 보장, 변함없는 국가의 부유함과 동일시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훌륭한 건축물과 좀더 완만한 생활 템포를 만들겠다는 욕망으로 시작된 운동이 인간의 영혼과 지구를 구하는 실행 가능성이 높은 방법처럼 보인다. / 381p

 

 

"나는 인생이 암울하고 고통스러우며 악몽 같고 의미 없는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행복해지는 단 한 가지 방법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니체가 그렇게 말했으며 프로이트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각자 나름의 망상을 가져야 살 수 있다고요."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큰 가치를 둔 것들이 조만간 전부 사라져 버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그런 생각을 가지고는 살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다 바쳐 돈을 벌고 사랑하며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얻으려 애쓴다. (…)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자신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 안에 이루려 한다. 그렇게 100년을 살다가 사라지면 다른 사람들이 나타나 똑같이 되풀이한다." / 430p 

 

 

 

 

 

 

   <거의 모든 시간의 역사>는 우리 시대의 시간 개념을 증언해줄 다양한 사람과 극적인 변화의 순간들이 등장하여 읽을거리가 풍성한 책이었다. 철학자, 예술가, 발명가, 운동선수, 영화감독, 작가, 연설가, 과학자, 시계제조자 등은 물론, 시간의 개념을 바꾸어놓은 철도의 등장, 음악 재생 시간에 대한 인지가 CD의 발명에 미친 영향, 기막힌 타이밍과 재빠른 판단력이 낳은 위대한 한 장의 사진 등 시간을 중심으로 한 인간의 복잡한 애증과 욕망의 역사가 드라마처럼 펼쳐져 재미있게 잘 읽혔다. 또한 시계에 매달린 헤럴드 로이드가 상징하듯 우리는 늘 시계 바늘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이 책을 통해 시간에 대해서 이해하고 또 숙고해봄으로써 내 삶의 시계 바늘의 속도는 어떻게 움직여야 할 것인지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비록 곳곳에서 발견되는 편집상의 오류들은 아쉬움으로 남지만 시간에 관한 유쾌한 지적 호기심을 채울 수 있는 즐거운 독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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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카디아
로런 그로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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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인 언어로 쌓아올린 한 편의 위대한 서사!

탄생과 죽음의 순환, 인간의 광기와 이기 너머에 존재하는 변함없는 사랑을 담은 소설!

 

 

 

   한때 미국의 물질문명에 항거하는 반체제 자연찬미파, 이른바 '히피'라 불리던 세대들이 있었다. 기성세대의 통념과 가치관을 부정하고 자유와 일탈을 꿈꿨던 이들의 모습은 한때 젊은이들이 지향하는 하나의 문화로 상징되었지만, 한편에서는 집단적이고 광신주의에 가까운 모순을 낳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그 유명한 찰스 맨슨 사건이다. 그는 히피를 가장하여 추종자들을 끌어 모으고 그들과의 부정한 행위 및 약탈, 살인에 이르는 위험한 행동으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킨 인물이었다. 이런 히피 문화의 명암은 몇몇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자주 등장하곤 하는데,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자유정신과 삶의 이상향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그 주제로 삼는다.

 

 

 

   소설 <아르카디아> 역시 이러한 히피 문화를 반영하여 1970년대 미국 뉴욕주에 건설된 가상의 공동체 아르카디아에 관한 이야기다. 한낮의 태양을 품은 드넓은 대지와 장대한 숲을 누비며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아이들, 밤에는 모닥불을 피우고 앉아 노래를 부르고, 소박하지만 정겨운 음식을 나눠먹으며 살아가는 이곳은 또 다른 이름의 유토피아다. 자기가 되고자 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 평등과 사랑, 노동, 열린 마음을 토대로 쌓아올린 이 자유민 무리 속에서 드디어 최초의 아르카디아인 비트가 태어난다. 그는 비록 작고 가난하지만 자유와 정서적 풍요로움이 가득한 가족과 공동체 속에서 자연의 충만함과 따뜻한 에너지를 얻으며 자라난다.

 

 

 

 

 

 

   태양처럼 따뜻한 빛을 뿜어내는 어머니 해나, 실질적인 아르카디아의 지도자이자 한결같은 듬직함으로 가족을 품는 아버지 에이브, 모든 아르카디아인의 어머니 같은 자애로운 애스트리드, 거인 같은 풍채를 지닌 이 땅의 수호자 타이터스, 아르카디아의 구루이자 스승이지만 모두가 스스로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핸디 등 비트의 눈에는 이들 모두가 한 편의 동화이자 신화 같다. 그는 아르카디아에서 인간과 자연의 유기성, 탄생과 죽음의 순환을 온몸으로 체험한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자기가 되고자 하는 모습을 선택하게 돼. 그게 약속이기도 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지은 별명을 갖고 있어. 사람들은 자신이 되고 싶은 것이 되려고 여기 오는 거야. 타잔, 원더 빌, 야한 샐리. / 46p

 

 

시간이 아주 유연하다는 걸, 고무줄 같은 것이라는 걸. 시간은 길게 늘어날 수도 있고 단단히 뭉쳐질 수도 있고, 매듭이 지어지고 접힐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러는 내내 시간은 끝없이 순환하는 고리다. 밤이 있을 거고, 그러고 나면 낮이 있을 거고, 그러고 나면 다시 밤이 있을 것이다. 한 해가 끝나면 다른 해가 시작될 것이고, 또 끝날 것이다. 노인은 죽고, 아기는 태어난다. / 116p

 

 

 

 

 

 

   하지만 이미 사회 내부에서부터 생성된 아르카디아가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란 어렵듯, 다섯 살이 된 비트는 자신들이 지향하는 삶을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는 공동체 내부의 민낯을 보게 된다. 알고 있으나 모른 척 할 수밖에 없는 문명의 편리함과 삶을 지지하기 위해 반드시 외부로부터 구할 수밖에 없는 다양한 자본들 앞에서 그들은 늘 허우적댄다. 자유가 너무 많으면 공동체는 썩기 마련이라 했던가. 비트는 뭔가 불안한 것이 점차 자신들을 잠식하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어머니인 해나는 이곳에서의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핸디를 경멸하기에 이른다. 더러는 불쾌한 환각 체험 따위로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고 상처를 치유하려 한다. 심지어 아이들까지도. 각종 중독자들, 가출 청소년들, 범죄를 저지르고 이곳에 몸을 숨기려는 자들, 미디어에 등장하는 아르카디아의 환상에 빠진 사람들 등 출처를 알 수 없는 이들이 모여 점차 초기 아르카디아 사람들의 순수한 믿음을 흐린다.

 

 

 

핸디는 평등과 헤게모니의 전복을 떠들어대지만 아르카디아도 다른 데와 다르지 않아. 너희는 저 위 너희의 언덕에 있고, 우리는 여기 이 진창에 있어. 난 여기 일 년 반이나 있었어. 이런 게 계급이 아니라면, 이런 게 그 지랄 맞은 존중이라면, 난 차라리 뒈지고 말겠다. / 163p

 

 

스웨터나 뜨개질 조각에 비누칠을 해서 계속 비비다보면 실이 줄줄이 뒤섞이면서 도저히 풀 수 없는 하나의 덩어리가 되잖아. 그런데 지금 우리는 각자 자기 멋대로 뜨개질을 하는 수백만 명의 미친 사람들 같아. 이 남자는 벨트를 만들고, 이 여자는 자기가 냄비 장갑이나 뭐 그런 걸 만들고 있다고 생각해. 그래서 우리는 역사상 가장 크고 흉하고 거지 같은 담요를 갖게 되었는데, 그걸로는 우리를 다 덮을 수도 따뜻하게 할 수도 없는 거야. / 198p

 

 

 

   결국 '무릉도원 날'이라는 이름으로 그간 잠재되어 있었던 광기가 폭주하게 되고, 땅 속에서 시체가 나오면서 이내 경찰이 들이닥친다. 이후 아르카디아는 황폐해져 가고, 사람들은 흩어진다. 한 번도 아르카디아를 떠난 적이 없던 비트는 이곳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점차 무너져가는 자신들의 세계를 지키지 못하고 끝내 떠나고야 만다. 시간이 흘러 사진학과 교수가 된 비트는 여전히 자신의 내부는 아르카디아에 존재하는 것을 느낀다. 비록 아르카디아가 지향하고자 한 세계는 무너졌지만, 죽음에 임박한 해나를 찾아오는 그때 그 시절의 아르카디아인들을 보며 비트는 아르카디아라는 땅은 '사람'이 없으면 그저 땅일 뿐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곳에 모여 다시 이야기가 시작되고 자신의 딸 그레테를 보며 또 변함없이 삶이 지속되는 광경을, 새로운 희망을 얻는다.

 

 

 

그림 속 사람들은 모두 조용한 초록빛 자연의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비트는 차분하게 스스로를 단속하고 호흡을 하면서 이 행복이 더 안전한 거리로 물러날 때까지 기다린다. 마침내 행복은 태양으로, 아이들로, 평온함으로, 아르카디아로 만들어진 담요가 되고, 비트는 다시 더 커다란 전체 안에서 하나의 날실이 된다. / 201p

 

 

우리가 자신에 대해 믿어왔던 이야기를 잃으면 우리는 이야기 이상의 것을 잃는다는 것을, 우리 자신을 잃는다는 것을 이해한다. / 318p

 

 

 

   <아르카디아>는 시적인 언어로 쌓아올린 한 편의 위대한 서사다. 마치 어딘가에 존재할 듯한 기시감을 느끼게 하는 걸작 중에 걸작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날카로운 새벽빛을 지나 광휘의 빛을 뿜어내는 자연의 욕망이 세포 하나하나에 스미는 듯한 마법 같은 문장을 만났다. 하지만 우연히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마주하게 되는 낮달처럼 외롭고, 삶의 쇠락을 마주하는 쓸쓸함이 있다.

 

 

 

   그럼에도 서로와의 연결, 모두가 모두에게 의지했던 그 친밀함에 기댈 수 있게 하는 '사람' 냄새가 가득 진동하는 소설이다. 문명에 타락하지 않고 자유와 풍요 속에서 살고 싶었던 아르카디아인을 통해 탄생과 죽음의 순환을 목도하고, 인간의 광기와 이기 너머에 존재하는 변함없는 사랑과 믿음을 느끼게 해 준 잊지 못할 소설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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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야스, 에도를 세우다
가도이 요시노부 지음, 임경화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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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고의 계획도시를 만들기 위한 야심찬 계획이 시작되다!

회색빛 저습지에서 오늘날의 도쿄를 탄생시킨 장인들의 위대함을 담은 역사 소설!

 

 

 

   일본을 대표하는 역사 속 인물하면 단연 떠오르는 두 사람이 있다.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라 하면 평범한 신분으로 성장해 무장이자 정치가가 되어 마침내 일본 최고 권력자에 이르는 상징적인 인물로 손꼽히지만, 조선 침략의 원흉을 제공한 의미로 우리 민족에게는 뼈아픈 역사를 남긴 침략자로 통한다. 이렇듯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상처를 안겨다준 것과 동시에 가장 위대한 전투를 남기게 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달리, 도쿠가와 이에야스 경우 그 유명세와 일본에 남긴 업적에 비례했을 때 우리에겐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기껏해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휘하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그의 가문을 무너뜨리고 전국시대를 수습함으로써 무려 260년간 평화의 시대를 이끌었다는 정도에만 그칠 따름이다.

 

 

 

   그러다 최근 <금색기계>라는 일본의 한 소설책을 읽으면서 소설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에도 시대'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잠깐이나마 검색한 적이 있다. 여기에서 나는 전후 혼란기를 수습하고 통일을 주도하여 일본의 황금기를 열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한 인물과 조우하게 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다. 여러 일본 소설이나 인문학 관련 저서 등을 접하다보면 유독 이 '에도 시대'가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아무래도 이 시기에 대한 궁금증은 자연스럽게 그에게까지 가 닿을 수밖에 없는 듯하다. 때문에 <이에야스, 에도를 세우다>라는 도서가 출간되자 이건 읽어보지 않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인내의 제왕, 견뎌서 이겨내라

 

 

   <이에야스, 에도를 세우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불모지나 다름없던 에도를 새 시대로 열어가는 과정을 그린 역사소설이다. 지형, 화폐, 식수, 에도성 축조와 천수각 건설에 이르기까지. 도시 건설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이면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이룩하기 위한 그 장대한 여정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빛나는 통찰력과 인내, 이를 완성시키기 위한 장인들의 피나는 노력들이 담긴 한 편의 드라마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랫동안 눈엣가시 같았던 이에야스에게 간토 8주와 기존의 영지를 교체할 것을 명령한다. 표면적으로는 오다와라 정벌의 공로에 보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에야스를 대대로 섬기던 무사와 백성들을 빼앗아 그 힘을 약화시키려는 속셈에 지나지 않았다. 이를 모르지 않았던 이에야스의 가신들은 맹렬하게 반대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아들이고 만다. 더군다나 도시의 크기와 접근성을 고려했을 때 적격이라고 판단되는 오다와라를 제외하고 에도로 가겠노라 선언한다.

 

 

 

   에도는 오늘날의 도쿄를 이르는 곳으로, 당시 옛 수도인 교토와 오사카에 비하면 에도는 그저 회색빛 저습지에 불과한 황폐한 땅이었다고 한다. 그의 가신들은 이에야스가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간토에는 무궁한 발전의 여지가 있음을 직감했다. 잘 다듬어 논을 개답하고 도시를 조성하면 가미가타보다 나은 생산지역과 소비지역이 될 것이며, 그 중심지로 에도를 선택한 것도 여러 가지 지형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곳이라 여긴 까닭이다. 일본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과 쌀과 흙과 돈을 투입한 거대한 모험 앞에서 그는 오직 새 시대를 열 이 땅의 미래를 보았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기다림의 천재였다. 가학적이라고 할 만큼 '견뎌서 이겨내는' 것을 즐기는 인물이었다.

'간토 8주로 가시오.'

육 년 전 히데요시의 명령을 순순히 받아들인 것도 가장 밑바닥에는 이에야스의 이런 기질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도를 비롯해 간토 8주야말로 기다리면 성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견뎌내면 일본에서 으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에야스가 가장 선호하는 형태의 땅이었다. / 139p

 

 

 

   이에야스는 비만 오면 홍수가 나기 일쑤인 에도 땅의 정지 작업을 이나 다다쓰구에게 지시함으로써 도네강을 동쪽으로 옮기는 등 에도의 수로 정비 사업에 착수하기 시작한다. 겁쟁이처럼 늘 몸을 숙이고 자신을 과신하지 않는 인물이었지만 자신의 능력을 믿고 지지해주는 이에야스의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 이나 다다쓰구는 장남 구마조, 차남인 다다하루, 또 그의 아들 장남 한자에몬에 이르기까지 무려 3대에 걸쳐 도시 정비 사업에 모든 것을 바친다. 이들의 장구한 노고와 숭고한 열정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재해 예방 혹은 인공제방의 힘을 과신하지 않는 하천공사"를 근간으로 하는 공법에 따라 마침내 에도 시대를 여는 초석이 된다.

 

 

 

 

 

 

   이는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한 에도의 식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오쿠보 도고로와 로쿠지로 등의 노력에서도 빛을 발한다. 입체교차라는 공법, 암거 즉 지하에 매설하는 획기적인 방법에 이르기까지 비전문가에 의한 각종 시행착오에서 비롯하여 전문가 집단에 의한 고도의 개발 사업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읽고 있노라면 단순히 식수 문제가 아니라 문명을 개척하고자 하는 이들의 노력과 애환이 감동으로 다가온다.

 

 

 

   도시 정비와 식수 문제 해결 외에 "화폐를 여는 자가 천하를 지배한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던 이에야스는 화폐 주조의 기술을 보유하기 위한 노력에도 힘을 기울인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앞에서도 건방질 수 있을 만큼 뛰어난 금공 기술과 화폐 주조를 담당하는 고토 가문의 고토 초조는 화폐 주조법을 익히고자 하는 이에야스에게 자신을 보좌하는 직공 한 명을 떠넘기다시피 하고 교토로 돌아간다. 그러나 일개 직공에 불과한 줄 알았던 쇼자부로는 사실 야망이 있는 인물로 뛰어난 기술력을 갖추어 점차 이에야스를 만족시키기에 이른다.

 

 

 

   드디어 결심을 굳힌 이에야스는 그로 하여금 오반 주조를 금지시키고 도쿠가와 식의 새로운 화폐인 고반 주조를 명한다. 이는 히데요시를 반하는 일이며, 화폐 전쟁을 예고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계획이 단번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보다 더 치밀하고 정교하며 기다림과 인내라는 과정이 요구되었다. 히데요시를 몰아내고 마침내 도쿠가와가 정권을 차지하기 이르러서야 마침내 일본 화폐사는 완전히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기에 이른다. 그야말로 기다림의 결실 끝에 이루어진 성공이라 할 수 있겠다.

 

 

 

   위대한 장인과 묵묵하게 이들을 따르는 작업자들의 노고가 없었다면 오늘의 에도성이 없었을 제4화 '석벽을 쌓다'편에서는 그 어느 이야기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빛을 발휘한 이들의 애환이 엿보인다. 채석장에서 석수장이인 고헤이는 돌의 결, 즉 절리를 읽는 능력이 뛰어나 '투시안 고헤이'라 불리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다이칸가시라인 오쿠보 나가야스의 부름을 통해 천하제일의 성의 석벽을 쌓는 일에 참여하게 된다. 그의 역할은 천하제일의 돌을 발견하는 것으로, 자신을 따르던 요이치의 목숨을 잃은 대가로 그 어느 곳에서도 발견하지 못한 뛰어난 돌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것을 에도성에까지 옮길 수단이 없던 그는 마침내 에도로 입성하게 되고 그곳에서 돌의 무게와 기울기를 투시하는 듯 돌쌓기에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산타를 만나 마침내 자신의 돌이 에도성에 이르는 광경을 목격하기에 이른다. 비록 여러 차례 보수공사를 한 흔적으로 인해 당시 이즈산 정상에서 발견한 이 돌이 지금과 같은 것인지 보장을 할 수는 없으나 석벽 하나하나가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어린 위대한 유산임을 새삼 깨닫게 되는 대목이다.

 

 

 

   이야기는 천수각을 짓고자 하는 이에야스의 뜻과 마침내 천수각에 올라 그의 후계자 히데타다와 함께 새로운 미래를 향해 뻗어가는 에도의 모습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귀결된다. 황무지와 다름없던 곳에 수로와 식수, 화폐가 정비되고 도시가 완성되어 점점 사람들이 늘어나 활기찬 도시가 완성되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이란 어떤 기분일까. 이에야스가 천수각을 통해 이 사업에 희생되고 위대한 정신을 드높인 장인들의 노력에 애도를 보낸 마지막 장면이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보이는 곳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장인 정신을 빛낸 이들을 기리고자하는 저자의 의도가 뭉클하게 다가온다.

 

 

 

"흰색은 죽음의 색……"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그것을 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지금의 내가 있는 건 무수히 죽은 사람들 덕분이니까."

이에야스를 기른 부친 마쓰히라 히로타다. 미카와노쿠니 오카자키에서 처음으로 집안의 세력을 크게 확장한 조부 기요야스, 나루세 마사요시나 도리이 모토타다 같은 가신을 대신해 처절한 죽음을 맞이한 다른 가신들, 이에야스를 세상에 나오게 한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무엇보다 지금까지 건축, 도장, 채굴, 매립, 개간, 조선, 운반…… 위험한 일터에서 목숨을 바쳐 열심히 일하며 성을 짓고 도시를 조성하는 데에 공헌한 무명의 사람들.

"그렇게 첩첩이 쌓인 시체 위에 내가 있어 너도 있는 것이다. 히데타다, 이 천수각은 그들의 혼령을 모시는 새하얀 묘석이니라. 정성을 다하여라." / 368p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그곳에서 빛날 미래의 희망을 꿈꾸는 많은 이들의 염원을 읽는 일이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감동을 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 않을까. 이 책을 통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삶의 발전을 이끌고 오늘을 기회의 시대로 열어준 과거의 선조들에게 특히 감사함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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펫숍 보이즈
다케요시 유스케 지음, 최윤영 옮김 / 놀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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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도 잠잠할 날이 없지만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사람 냄새가 나는 펫숍 이야기!

인간과 반려동물의 공생을 때로는 유쾌하고 때로는 진지하게 담아낸 소설!

 

 

 

   며칠 전에 충격적인 기사 하나를 보고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반려동물을 관리하고 판매하는 펫숍에서 무려 79마리의 개가 몰살한 사건이 발각된 것이다. 발견 당시에 살아있던 개들마저 추가로 죽어 그 수가 100마리에 이른다하니 경악할 만한 일이다. 깜찍하고 귀여운 강아지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펫숍 그 이면에 이런 잔인한 현실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공연히 선의와 반려동물을 향한 따뜻한 애정으로 펫숍을 운영하고 있는 관리자들에게까지 부정적인 시선이 모아질까 우려되는 마음도 없지 않다. 한편으로는 반려동물을 사고파는 행위 자체가 그리 썩 달가운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까지 미치는 것을 보면 결국 펫숍을 향한 부정적인 인식이 사그라 들지 않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것 같다.

 

 

 

   이러한 시점에서 펫숍을 배경으로 한 소설책 한 권이 출간되어 이목을 끈다. 일본의 아바라키 대형 홈센터 내에 자리한 유명 펫숍의 직원과 이곳을 드나드는 손님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사건을 다룬 소설, <펫숍 보이즈>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반려동물 사이에 벌어지는 각종 의문의 사건들을 코지 미스터리 형식을 통해 유쾌하게 풀어나감과 동시에 펫숍을 향한 세간의 인식을 직시하여 이를 따뜻하게 풀어낸 책이다. 이 책을 덮을 때쯤에는 보송보송한 강아지의 털을 쓰다듬을 때 주고받을 수 있는 서로의 다정함과 온기 같은 것이 마음속에 머무르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곳은 펫숍, 한시도 조용할 틈 없는 우리의 직장으로 초대합니다

 

 

   대형 홈센터 내에 자리한 유어셀프 가미조 지점은 포유류와 열대어, 곤충에서 파충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동물을 취급하고 있는 펫숍이다. 매장의 모든 일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가시와기 주임과 사무직 정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여직원 마키타, 카운터에서 손님과 친근감 있는 대화를 곧잘 나누는 아카이, 긴 금발 머리에 수의사를 목표로 하다 중퇴한 엄청난 동물 애호가이자 동물박사인 아르바이트생 고타, 평범한 대학생으로 고타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가쿠토가 이곳을 운영하고 있다. 여기에 홈센터에서 근무하는 엄마가 일이 끝나기 전까지 학교 수업이 끝나면 매일같이 이곳을 찾아와 반려동물과 교감하기를 좋아하는 꼬마 유리, 직원들에게 늘 잔소리를 하는 깐깐한 영감이지만 말장난하기를 좋아하고 특유의 연륜으로 매장 사정을 누구보다도 훤히 꿰뚫고 있는 호프만 씨, 반려동물들의 건강을 체크하는 따뜻한 심성의 수의사 세가와 아야메 선생님, 항상 고양이 통조림을 사가는 브라운 씨 등 저마다 사연을 지닌 채 이곳 펫숍을 드나드는 주요 단골손님들이 등장한다.

 

 

 



 

 

 

   소설은 어느 날 갑자기 꼬마 유리와 이름이 똑같은 잉꼬유리가 "유리, 주거"하고 섬뜩한 말을 내뱉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가쿠토는 이 일로 인해 크게 상심을 한 꼬마 유리를 겨우 달래기는 했지만, 고타와 가쿠토는 누가 잉꼬유리에게 그토록 험악한 말을 가르쳐 유리에게 상처를 주려 한 것인지 그 진상을 조사하기로 한다. 때마침 유리의 엄마가 가쿠토에게 최근에 자신이 스토킹을 당하고 있으며 메일을 통해 자신이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받기까지 했다는 말을 듣고는 같은 시기에 일어난 이 두 가지 사건이 전혀 무관해보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과연 범인은 누구일까? 더욱이 동물에게 이토록 잔인한 말을 가르쳐서 자신의 이득을 취하려는 이를 용서할 수 없다. 이렇듯 소설은 사건을 해결하고 상처받은 유리에게 다시 웃음을 주고픈 펫숍 직원들의 노력을 그려나감으로써 독자들에게 사건을 추리하는 재미는 물론, 동물과 인간의 교감 속에서 저절로 힐링이 되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한 명의 사람과 한 마리의 새는 마치 마음이 서로 통한 것처럼 보였다.

펫숍에서 일하며 정말로 큰 보람을 느낄 때는 바로 이런 순간을 마주할 때다. 인간과 다른 동물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인연이 탄생하는 순간. / 66p

 

 

 



 

 

 

   한편 바빠진 펫숍에 두 달간 회계 담당 직원으로 파견 나온 시카다 마코가 등장하는데, 그녀는 펫숍 직원들에게 냉랭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일관한다. 알고 보니 그녀는 펫숍을 아주 싫어한다고. 가시와기와 고타, 가쿠토는 펫숍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마저 거부감을 느끼는 그녀에게 자신들이 어떠한 마음으로 반려동물들을 대하며 어떠한 사명감을 가지고 펫숍을 운영하고 고객을 응대하는지 알려주려 애쓴다. 이후에 벌어지는 갖가지 사건 속에서도 펫숍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에게 펫숍이란 무엇이며, 세상의 비난과 편견 속에서 펫숍을 계속 이어나가야 하는 의의를 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의 노력은 계속 이어진다. 무엇보다 인간과 동물은 공생할 수밖에 없는 관계임을 전하고자 하는 저자의 메시지가 잔잔하지만 깊은 울림을 전한다.

 

 

 

"시카다 씨, 우리는 세가와 선생님처럼 동물의 목숨을 구할 수는 없어. 하지만 똑같이 프로 정신을 지니고 일해. 개체를 입양 보낼 때마다 부디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누구보다 강하게 염원한다고. 그런 과정에서 손님에게 시달려도 좋으니까 기를 때 주의할 점에 대해 집요하게 전달해. 말하고 보니 우리와 펫숍의 동물들을 공생 관계네." / 115p

 

 

"펫숍은 어쩔 수 없이 인간을 위한 곳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믿고 싶습니다. 서로 마음이 통하고 있다고 굳게 믿으며 반려동물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어떤 고통도 마다 않겠다는 인간이라는 동물을요. 펫숍은 친구 같은 반려동물과 함께 지내며 행복을 느끼는, 그런 인간이라는 동물을 돕기 위한 장소입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동물들이 정말로 행복하다고 느끼기를, 끊임없이 기원하는 곳입니다." / 394p 

 

 

 



 

 

 

   이처럼 <펫숍 보이즈>는 코지 미스터리 형식을 통해 사건의 실마리를 쫓아감으로써 읽는 재미를, 인간과 동물의 공생 관계를 이해하고 편견을 풀어가며 따뜻한 감동을 전한다. 뿐만 아니라 아르바이트만을 전전하며 생활하는 '프리터', 이렇다 할 진로를 정하지 못하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조차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취준생들, 갖가지 오해로 인해 등을 돌려버린 연인과 가족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의 고민을 진솔하게 담아내고,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해가는 과정을 그림으로써 청춘의 뜨거운 성장을 응원한다.

 

 

 

단지 세상을 살다보면 지나가는 비처럼 갑작스럽게 악의가 덮치는 때가 있는 것 같다. 그럴 땐 그 누구도 비옷이나 우산을 갖고 있지 않아서, 악의가 사라지고 나서도 흠뻑 젖은 몸은 녹초가 되어 까딱 잘못하면 감기에 걸리기도 하고 그게 꽤 오래가기도 한다.

아니, 어쩌면 고타에게는 시로타로가 우산이었을지도 몰랐다. 돌아오면 함께 놀자고 희망을 주고 웃는 얼굴을 가르쳐주었으니까. / 303p

 

 

"혼자서 끙끙 앓지 말게나. 실패를 감추는 것은 큰 잘못이지만 아직 만회할 수 있을 걸세. 도망치는 건 어떤 동물이라도 할 수 있지만 실패를 만회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은……"

호프만 씨는 구멍이라도 뚫을 것 같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인간뿐이잖나." / 370p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재고해볼 수 있는 다양한 작품들이 있지만, 마침 우리 가까이에 있는 펫숍 문화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소설이어서 남다르게 읽힌 듯하다. 거창하게 생각할 것도 없이 우리의 이웃 같은 이 청년들의 따뜻한 성장 스토리만으로도 지친 일상에 작은 위로 하나 얻은 기분이다. 이제 곧 따스한 봄날이 찾아오려나, 이 소설로 인해 한층 봄이 가까이 다가온 듯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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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의 조건 - 절망을 이기는 철학 - 제자백가
이주희 지음, EBS MEDIA / Mid(엠아이디)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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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우울하고 절망적인 삶을 나는 왜 살아내야 하는가!

혼돈과 좌절의 시대를 이겨내기 위한 생존의 철학은 과연 무엇인가!

 

 

 

 

   춘추전국시대. 맹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짐승을 몰아 사람을 잡아먹게 만드는 것과 다름없는" 시대였고 고염무의 표현을 따르자면 "망국의 시대가 아니라 망천하의 시대였다"고 할 만큼 천하가 절망감에 시달리던 때였다고 한다. 기존의 가치 체계와 사회 시스템이 붕괴되고 노골적인 폭력에 대한 숭상, 완력에 대한 집착으로 힘과 권력이 모든 것을 결정하였으니 그야 말로 난세의 시대라 할 만하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낯설지 않다. '헬조선', '우울증', '자살'과 같은 절망을 가리키는 수사들이 도처에 넘쳐나고 시선을 넓히면 중동에서는 끊이지 않는 내전으로 인해 연일 사망자와 난민들이 늘어나고 있으니, 세월이 흐르고 흘러 21세기에 이르렀건만 춘추전국시대 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인간이란 참으로 놀라운 존재여서 도저히 해결책을 찾을 길이 없을 만큼 춘추전국시대가 절망으로 가득했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 이들이 있었다.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인지 가장 근원적인 질문에 접근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공자와 묵자, 장자와 한비자 같은 인류 역사상 가장 다채롭고 풍부한 사상과 철학가들이 꽃피어난 것이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백가쟁명이라는 글자 그대로 엄청난 숫자의 사상가들이 등장해 그야 말로 유래 없는 '생각'의 폭발이 일어났고, 인간이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사상의 원초적인 형태들이 바로 이 시기에 등장했던 것이다. 대체 이들을 이끈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해 저자는 삶이 고통스럽고 답답하여 도저히 해결책을 찾을 길이 없을 때, 누구나 삶의 근원적인 곳에까지 질문이 이르게 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이토록 우울하고 절망적인 삶을 나는 왜 살아내야만 하는가? 또 살아야만 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철학적 질문들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기였기에 '절망을 이기는 철학'의 탄생 또한 가능할 수 있었던 것으로 판단한다. 그런 의미에서 <생존의 조건>은 짐승의 시대와 다름없던 시대를 용기 있게 돌파해나간 제자백가의 생존철학을 탐미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절망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의 해답을 제시한다. 무엇보다 사상 최악의 절망적인 난세를 헤쳐나간 이들의 용기와 자긍심이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간을 믿을 수 없을 때_ 유가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태산을 지날 때, 한 여인이 무덤 앞에서 울고 있자 그 연유를 알아보게 했다. 여인의 사연은 이러했다. 시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아들과 함께 산 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가족이 차례로 호랑이에게 변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던 공자의 제자 자로는 문득 호랑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진작 도망을 가는 게 옳지 않았느냐고 반문을 하였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여기엔 가혹하고 악독한 정부가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여 이에 공자가 탄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서움을 시사 하는 내용이다.

 

 

 

   공자는 난세가 살기 어려운 것은 인간이 인간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믿음과 신뢰가 무너진 사회 시스템 속에서는 분쟁과 갈등, 모순이 폭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가치와 신념이 모두 무너진 시대에서 과연 무엇으로 하여금 이를 회복할 수 있을까? 이에 공자는 세상을 등지고서는 시대가 당면한 고통을 해결할 수 없다고 보았고 비록 실망스럽고 한심해 보일지라도 바로 지금 이곳, 인간들 속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자연스러운 감정인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에서 인간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첫 번째 가능성을 발견한다. 이는 곧 모성애와 효를 근간으로 한다.

 

 

 

사랑받아야만 사랑하는 법도 배울 수 있다. 가족 안에서 사랑을 배운다면 이웃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더 나아가 인류 공동체에 대해서도 사랑을 베풀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는 비유하자면 호수에 떨어진 물방울이 동심원을 그리면서 퍼져 나가는 것과 같다. 인간에 대한 사랑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가족 안에서의 사랑하는 마음만은 반드시 지켜주고 싶은 것이 공자의 본뜻이었다. / 54p

 

 

 

   또한 강조한 것이 있으니, 바로 공자가 평생을 지켜야 할 삶의 원칙으로 삼은 ‘서(恕)’이다. 현대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서는 '공감'이다. 타인의 감정을 느끼고, 어떤 상황에 대해서 감정을 가지는 것이다. 이는 맹자가 말하는 '측은지심'이라는 인간의 본능과 맥을 같이 한다. 공자는 강대국이든 약소국이든 생존의 진정한 조건은 백성의 신뢰라고 보았다. 신뢰가 무너지면 어떤 나라도 버틸 수 없다. 신뢰란 상대방이 나를 염려하고 있다는 믿음이며, 이는 오직 공감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고 여겼다. 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서도 상대방의 관점에서 상황을 이해하는 공감 능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기에 공자와 맹자의 사상이 그리 멀리 있지 않음을 새삼 느끼게 되는 대목이다.

 

 

 

'어떻게 하면 인간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공자와 맹자가 일러준 조언들도 생각해보면 '자기 자신을 믿어도 되는가?'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하다. 가족에 대한 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체험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고, 타인에게 차마 잔인해지지 못하는 나의 마음을 생생하게 경험함으로써 인간이 가진 가능성을 믿도록 한 것이다. / 102p

 

 

 

 

 

 

정의 없는 세상에 분노할 때_ 묵가

 

 

  공자나 맹자, 장자 등에 비하면 묵자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책에서 묵자를 설명하는 대목에 따르면, 그는 '동아시아 역사상 가장 독특한 사상가'라고 한다. 때문에 여러 생존 철학 중 묵자의 사상을 설명하는 제 2장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인상에 남는다. 그도 그럴 것이 묵가가 대부분이 하층 계급인 민중 속에서 일어난 유파인 만큼 묵자는 민중의 편에 선, 스스로가 민중인 자의 철학을 실현한 까닭이다. 그들은 농민이나 사회 최하층에 위치한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여 민중의 삶을 우선적으로 살펴야 함을 강력하게 호소했다. 시국이 어지럽고 백성들이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침략 전쟁, 불의한 전쟁 때문이라는 사실에 동시대의 그 어떤 사상가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전쟁을 반대하고 절실히 평화를 추구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겸애'를 강조하며, 사랑은 단지 감정이나 생각에 그쳐서는 안 되고 반드시 행동을 통해 상대방에게 이익을 주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말 배고픈 사람에게 빨리 뛰어가서 도와주는 것이 참된 사랑이지, 말로만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측은하게 여긴다고 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다. 특히 모든 사랑은 평등하며 세상의 이익을 자신의 본분으로 삼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밝혔다. 묵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적든 많든 공익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의지를 가져야 하고 또한 모두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 효과가 미비해 이 세상의 어려운 판국을 더 낫게 만들 정도는 안 될지라도 할 수 있는 한 온 힘을 다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말이다.

 

 

 

묵자가 말하는 '겸상애' 혹은 줄여서 '겸애'란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사랑을 뜻한다. 굉장히 광범위하고 넓은 사랑이다. 그래서 영어로는 'Universal Love'라고 번역한다. 문자 그대로 세상의 모든 이를 사랑하는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든 미래의 사람이든 과거의 사람이든 상관없이, 가족이든 남이든 차별 없이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일괄적이며 차별 없는 사랑이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사랑이다. / 148p

 

 

'나는 내 할 일만 잘하면 돼! 내가 어떻게 이 사회를 돌볼 수 있겠어? 이 세상은 원래 이렇게 어지러운걸,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 소용없다고.' 이게 바로 무마자가 말한 것처럼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변하지 않을 테니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태도다. 그런데 묵자는 다르다. 비록 내가 뭔가를 했을 때 그 효과가 물을 들고 왔으나 불을 끄는 데에는 못 미치는 것처럼, 이 세상의 어려운 판국을 더 낫게 만들 정도는 안 될지라도 할 수 있는 한 온 힘을 다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 173p

 

 

 

불안을 견딜 수 없을 때_ 도가

 

 

   장자는 난세의 시대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버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사상가이다. 물질을 위해서 삶을 희생시키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며 돈과 명예, 올바른 신념에 대한 집착 그 어떠한 외부적 가치도 나의 삶 그 자체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장자는 공자와 맹자와 같은 어떤 숭고한 이상 같은 것을 비판한다. 오직 '자신의 기준에 따라 살아라'고 말한다. 남이 부여한 기준은 그것이 고상한 도덕이나 윤리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라도 그저 각각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획일적인 기준일 뿐이라고 말이다. 무리지어서도 남에게 기대지 않고, 홀로 서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우리는 진짜 지식을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한 그의 사상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꼭 필요한 생존 철학이라 여겨지는 대목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쉴 틈 없이 뛰어다니는 근본적인 이유는 쓸모없어질까 봐 겁을 먹기 때문이다. 사실 그럴 필요가 없다. 장자는 세속적인 가치에 집착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만약 속세의 고난과 핍박, 타인의 질투 공격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그냥 그 상황을 빠져나오면 된다. 그 속에서 무서워하고 또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면 사실 불행을 심화할 가능성이 더 크다. 차라리 완전히 빠져나오는 것이 더 낫다. 빛이 없는 곳에서는 그림자가 생기지 않고 걷지 않으면 발자국이 생기지 않는 법이다. / 218p

 

 

장자는 모든 것이 이쪽과 저쪽, 옳음과 그름, 그리고 진실과 거짓으로 나뉜다고 보지 않았다. 오히려 가능성의 스펙트럼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찬반 양쪽으로 나뉠 때도 있지만 대개 완전한 옳고 그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장자가 이야기하는 제물은 모든 여러 가지 다른 가능성을 고르게 한다는 뜻이다. 그 어떤 것도 궁극적인 진실을 대변하지 않는다. 스펙트럼의 어딘가에 진실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233p

 

 

 

 

 

 

간교한 기득권에 맞설 때_ 법가

 

 

   법가의 사상은 묵가의 사상만큼이나 재미있다. 법가의 대표 사상가인 한비자의 특징은 현실주의다. 그는 인간의 욕망을 긍정한다. 욕망은 개선해서 바꿔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욕망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고 믿는다. 한비자의 현실주의는 현실을 회피하거나 현실에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 가장 적극적으로 맞서서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을 것을 주장한다. 우리들은 현실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과거에 어떻게 했는지부터 찾아본다. 과거의, 그것도 남들이 만들어놓은 기준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한비자는 이를 경계하는 것이다.

 

 

 

   장자는 도구적인 인간으로 소모되지 않기 위해 물욕과 명예욕을 버리라고 가르친 반면, 한비자는 난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적절히 통제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 물질적 욕망과 명예욕을 활용하라고 주장한 점이 흥미롭다. 욕망의 대상을 주거나 빼앗는 것, 바로 상과 벌을 통해서다. 이때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큼 명백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가 강조하는 '법'이다. 누구나 알 수 있도록 명백하며, 가혹할 정도의 엄격함을 지닌 법을 통해 사람들이 이를 무겁게 여김으로써 누구나 형벌을 받지 않게끔 노력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하지만 법 혹은 시스템만으로는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반드시 기득권 세력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한비자는 기득권 세력을 없애거나 물갈이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된다고 보지 않았다. 그는 군주에게 답이 있다고 보았다. 썩은 사과도 상한 부위를 잘만 도려내면 먹을 수 있듯 신하를 잘 다루기 위한 적절한 방법을 찾아낸다면 신하들이 기득권 세력으로 변해 개혁을 좌초시키는 일을 막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여기에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왕의 기술, 만장일치를 경계해야 할 것, 반드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의견을 묻고 그 의견에 대해 책임을 지우는 방법 등을 설명하고 있는데, 오늘날 사회 시스템을 움직이게 하는 모든 공직자들이 이를 교훈으로 삼아야 할 대목인 듯하다.

 

 

한비자는 법이란 결국 태양과 같은 존재여야 한다고 여긴 셈이다. 태양이 하늘에서 빛나는 것처럼 명명백백해야 하고, 태양처럼 뜨거워서 감히 어길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엄격해야 하며, 태양이 모든 사물을 비추듯이 어떤 경우에도 예외를 두지 않는 공평함을 지켜야 하고, 태양이 매일 아침 어김없이 떠오르듯이 변함없이 법을 지키면 반드시 보상을 받는다는 신뢰를 주는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다. / 297p 

 

 

 

 

 

 

   내게 있어 철학은 어렵다. 토론 시간의 연속이었던 철학과 수업에서 나는 학기 내내 한 마디도 하지 못했던 부끄러운 기억이 있다. 철학에 대해 알고 싶다는 호기심은 충만했지만 아마도 그때의 나는 철학을 그저 '학문'으로만 접근했던 것 같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와 삶의 본질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이 거창한 사전적 정의는 현실 감각과 멀게만 느껴질 뿐이었고, 복잡한 철학사조와 철학가들의 사상을 암기하듯 외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찼던 까닭이다.

 

 

 

   <생존의 조건>의 저자 역시 책의 서문에 밝히기를, 철학에 관심이 있느냐고 물어보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손사래를 칠 것이라고 말한다. 팍팍한 삶을 그저 온전히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벅찬 이들에게 철학이란 그저 허울뿐인 이상이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관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살면서 "내가 왜 사나?" 혹은 "내가 이러려고 태어났나?" 하는 질문조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지 되묻는다. 그 정도의 질문이 무슨 대단한 철학적 질문이 될 수 있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만, 삶이 고통스럽고 답답하고 도저히 해결책을 찾을 길이 없을 때에야 말로 우리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에 도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헬조선'이라는 수식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시대에서 살고 있는 만큼 이러한 질문과 해답을 찾는 과정이야말로 당면한 시대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라 여겨진다. 생각보다 잘 읽히고, 철학에 대해 어렵게 느꼈던 이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만큼 끝으로 이러한 책이 많이 출간되고 또 읽혀졌으면 하는 바람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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