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것은 시간의 역사이자,
인간의 역사이다!
인간의 애증과 욕망이 담긴 시간에 관한 거의 모든
것!
<느린 것이 아름답다>의 저자 칼 오너리는 '당신은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고 질문을 던진다. 기지개를 펴고, 이불을 정돈하고, 커튼을 열어젖히거나 여전히 이불 속에서 베개를 꼭 끌어안고 있을 것이라는 대답을 향해
그는 '아니지요. 당신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누구나 다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시계를 보는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아직 더 자도 될 만큼
충분히 이른 시간인지, 당장 이불 밖으로 뛰쳐나와야 할 만큼 늦은 시간인지 판단하기 위한 우리의 이러한 행위는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시계가 인간을 통제한다'는 그의 주장에 그 어느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
<거의 모든 시간의 역사>의 저자 사이먼 가필드는 언어 사용에 있어서 시간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로 『옥스퍼드 영어사전』을 언급한다. 사전 속에 등장하는 가장 활용 빈도가 높은 명사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서 month가 40위에
올랐고 life가 9위, day가 5위, year가 3위, 그리고 가장 많이 쓰이는 명사는 time으로 선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시간은 우리
일상 곳곳에서 존재감을 발휘한다. 통제할 것인가, 통제당할 것인가. 이러한 주제 앞에서 우리는 점점 더 자유로울 수 없음을 느끼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중요한 순간들에 시간이 존재함으로써 발생된 다양한 사건들을 살펴보는 일이란 상당히 재미있는 일이다. <거의 모든
시간의 역사>는 바로 그러한 기록들이 담긴 흥미로운 교양책이다. 다시 말해 시간과 관련된 인류의 특별한 순간들을 추적한 시간잡학사전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우리가 사용하는 어휘는 시간에 의존한다. 단순히 하나의
낱말이 아닌 철학적인 개념으로 인간의 활동이나 말은 다른 어느 것보다도 시간에 의존한다는 뜻이다. on time, last time, fine
time, fast time, recovery time, reading time, all-time 등 시간에 관련 어휘는 한도 끝도 없다.
이처럼 시간은 우리 일상 어디에나 존재한다. / 37p
세상을 사로잡은 시간에
관한 이야기
<거의 모든 시간의 역사>는 총 1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에서 6장에 이르는 1부에서는 태양과 별의
이동으로 시간의 흐름을 파악했던 우리 인간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시간의 질서를 정립했는지에 대한 과정을 살펴본다. 그 중 루스 이언이라는 영국의
아티스트가 만든 벽시계 하나가 등장하는 대목이 자못 흥미롭다. 당시 벽시계에는 시계판의 숫자가 10시까지만 적혀 있어 이 작품을 찾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루스 이언이 부활시킨 것은 1789년 프랑스대혁명 직후 만들어진 '공화력'이자, 당시 시간을 십진법으로 하루를
완전히 다르게 계산해 시간을 재설정한 프랑스인의 실험정신이 담긴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공화력은 달력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매우 정치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7일 가운데 하루가
휴일인 기존 달력과 달리 10일을 1주로 하여 3주가 한 달이 되는 방식의 공화력에서는 10일 중 하루가 휴일이었던 것이다. 한때 마야인들이
사용했던 마야 달력, 아즈텍 달력, 지금 우리가 표준으로 사용하고 있는 달력 또한 마찬가지로 크든 적든 어느 정도 질서와 통제력이 부여되어 있기
마련이고 나름대로 정치적 의도도 담겨 있음을 설명하며, 저자는 어느 날 갑자기 프랑스 사람들이 공화력을 사용해야만 했듯이 우리의 삶을 모두
비슷한 모양으로 만든 달력 시스템은 확실히 증명되었거나 우리가 전적으로 의존해야만 하는 것이 아님을 역설하기도 한다.
인내와 고독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필리버스터가 가진 공통점은 무엇일까? 민권
운동(당시에는 평등권 획득을 위해 운동을 해야 했다)이 한창 진행되던 1960년 2월, 미국의 일간지 <샬럿 옵저버>지가 이런 기사를
실었다. '필리버스터는 시간과 싸우는 설전이며 불가피성에 대항하는 사람들의 싸움이고, 침묵의 전조 증상인 쇠약해진 힘을 이겨내려는 목소리
싸움이다.' / 145p
2부에서는 산업혁명 이후 급격하게 발전한 시간혁명을 다룬다. 오늘날 스위스하면 떠오르는 것이 '시계'이듯 시계
하나에 수백 여개의 부품을 담아내는 장인들의 집념을 엿볼 수 있음은 물론, 육상의 전설이라 불리는 로저 배니스터를 통해 신기록을 향한 신경전과
강박,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시간의 제약을 넘어서려는 위대한 노력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퓰리처상을 수상하였으며 우리에게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세상에 알림으로써 전쟁에의 경각심을 일깨워준 '베트남, 네이팜탄, 소녀(전쟁의 공포)' 사진의 작가 닉 우트를 통해 기막힌 타이밍과 재빠른
판단력이 낳은 위대한 사진 한 장의 기술을 읽을 수 있다.
마지막 3부에서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시간에 대한 사색과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통제되지 않기 위한 인간의 미래를
모색하는 기회를 갖는다. 과거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는 연륜이 아니라 행적으로 산다. 호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하며 산다. 숫자가
아니라 감동으로 산다. 우리는 심장 박동으로 시간을 셈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은 마지막까지 모터사이클의
손잡이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인생의 진정한 가치와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보고 느끼는 것에 대해 탐구하는 여정이 담겨져 있는 책이다. 이 책을
쓴 작가와 그의 아들 크리스, 몇몇 친구는 미국 중부 평원지대를 거쳐 몬태나를 여행하며 여행은 시간 낭비가 아님을 깨달았다고 한다. "우리는
좋은 시간을 갖고 싶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시간'보다 '좋은'이 더 중요하다. 누구라도 당장 시간에 관한 관점을 바꾸어 '좋은' 시간에
관심을 갖는다면 세상은 변할 것이다."라고 쓰인 이 글은 앞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과 함께 우리가 시간 앞에서 어떠한 마음가짐과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지 깨닫게 한다. 이렇듯 <거의 모든 시간의 역사>는 저자 사이먼 가필드의 지적 탐구에 푹 빠져들다가도 어느새 철학적 물음으로
귀결되어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대하고 이와 연대해나가야 할 것인지 생각하게 한다.
슬로리빙의 목표는 게으른 생활방식이 아닌 조심성과 참을성을 길러 삶의 즐거움을 찾는
것이다. (…)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슬로리빙 운동은 단순한 즐거움의 추구를 지속가능성(생태계가 미래에도 유지될 수 있는 제반 환경) 정책과
건강 보장, 변함없는 국가의 부유함과 동일시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훌륭한 건축물과 좀더 완만한 생활 템포를 만들겠다는 욕망으로 시작된
운동이 인간의 영혼과 지구를 구하는 실행 가능성이 높은 방법처럼 보인다. / 381p
"나는 인생이 암울하고 고통스러우며 악몽 같고 의미 없는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행복해지는 단 한 가지 방법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니체가 그렇게 말했으며 프로이트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각자 나름의 망상을 가져야 살 수 있다고요."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큰 가치를 둔 것들이 조만간 전부 사라져 버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그런 생각을 가지고는 살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다 바쳐 돈을 벌고 사랑하며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얻으려 애쓴다. (…)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자신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 안에 이루려 한다. 그렇게 100년을 살다가 사라지면 다른 사람들이
나타나 똑같이 되풀이한다." / 430p
<거의 모든 시간의 역사>는 우리 시대의 시간 개념을 증언해줄 다양한 사람과 극적인 변화의 순간들이
등장하여 읽을거리가 풍성한 책이었다. 철학자, 예술가, 발명가, 운동선수, 영화감독, 작가, 연설가, 과학자, 시계제조자 등은 물론, 시간의
개념을 바꾸어놓은 철도의 등장, 음악 재생 시간에 대한 인지가 CD의 발명에 미친 영향, 기막힌 타이밍과 재빠른 판단력이 낳은 위대한 한 장의
사진 등 시간을 중심으로 한 인간의 복잡한 애증과 욕망의 역사가 드라마처럼 펼쳐져 재미있게 잘 읽혔다. 또한 시계에 매달린 헤럴드 로이드가
상징하듯 우리는 늘 시계 바늘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이 책을 통해 시간에 대해서 이해하고 또 숙고해봄으로써 내 삶의 시계 바늘의
속도는 어떻게 움직여야 할 것인지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비록 곳곳에서 발견되는 편집상의 오류들은 아쉬움으로 남지만 시간에 관한
유쾌한 지적 호기심을 채울 수 있는 즐거운 독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