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짧은 한국사 - 읽는 것만으로 역사의 흐름이 머릿속에 들어온다
김재원 지음 / 빅피시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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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재미있는 한국사 책이라니!

복잡한 한국사를 짧지만 강렬하게 익히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하는 책!

 

 

 

  “내가 남부여의 공주 부여주다.”

  드라마를 본 적은 없어도 모르는 이가 없었을 만큼 한때 꽤 유명했던 대사다심지어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은 몇 번이나 자신의 출신을 강조한다당시에는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았으나이제와 돌이켜보면 대체 남부여가 어디기에 여주인공은 자신의 출신에 그토록 당당했던 것일까 궁금해진다세상에서 가장 짧은 한국사에 따르면 남부여는 백제의 국호였다고 한다백제가 도읍을 웅진에서 사비로 옮겼을 때 쓴 국호로성왕 16년부터 멸망 때까지 사용했다고 한다그런데 우리는 왜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을까분명 교과서로 부여를 배우긴 했는데 백제가 왜 남부여라는 국호를 사용했는지 이유는커녕 부여에 대한 이미지조차 뚜렷하게 와 닿지 않으니 말이다기껏해야 마가우가저가구가와 같은 가축의 이름을 붙인 귀족 세력이 있었다는 것과 영고라 불리는 제천 행사를 치렀다는 것 정도랄까.

 

 

 

  놀랍게도 부여는 고조선이 망하기 전에 생겨서 삼국 시대가 한창 이어지던 때까지 존속 기간이 무려 700년에 이르는 나라였다고 한다고조선이 멸망한 이후로는 동북아시아의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했으며고구려가 이 지역을 장악하기 이전까지 부여가 만주 일대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일대에서 부여의 강력한 영향력은 고구려와 백제가 굳이 자신들의 뿌리를 부여에서 찾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고이들에게 있어 부여에서 왔음은 권력의 상징으로 활용될 정도였다그런데 왜 우리는 이토록 부여에 대해서는 까마득한 것일까이에 대해 저자 김재원은 고조선에서 시작해 삼국의 탄생과 통일이라는 교과서 서술에 맞는 대서사시를 위해 가장 큰 희생을 치른 나라가 바로 부여라고 지적한다. ‘삼국 시대라는 지극히 삼국 중심의 표현에 의해 부여의 역사는 축소된 셈이다.

 

 

 

  이쯤 되고 보니 부여뿐만 아니라 같은 시기에 언급되는 옥저동예삼한 역시 그 실체가 궁금해진다작아서 덜 중요해 보이고 그래서 주변부의 이야기라 여겼던 존재들이 그럼에도 교과서에 굳이 소개되는 이유는 무엇인지왜 이들은 더 큰 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했던 것인지까지도 말이다이러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짧은 한국사는 고대에서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교과서 안에만 갇혀 있던 좁은 시각에서 벗어나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던 고정관념을 깨뜨림으로써 더 넓은 시야를 통해 한국사를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다.

 

 

 

  무엇보다 우리가 알고 있던 파편적인 사건들을 한반도의 역사를 넘어 동아시아 그리고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고 해석한다는 점에서 상당한 가치가 있다이를 테면 영토가 엄청나게 넓지도어마어마한 군사력을 가지지도 않은 백제가 중국 왕조로부터 꾸준히 인정받아온 강국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임진왜란이 단순히 우리나라와 왜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이었던 것인지구한말 조선은 정말 바깥세상의 변화에 무감했던 것인지 혹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세계사의 주요 흐름을 통해 알아봄으로써 보다 뚜렷하게 한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당시 중국 왕조에서 받은 작호는 동아시아에 위치한 나라 사이의 을 말해주는 결정적인 지표였다양나라를 포함한 중국 왕조에서 백제의 작호를 고구려보다 높은 서열로 주는 일은 거의 없었다무령왕 시기 백제의 외교 정책이 빛나는 장면이다.

백제는 외교의 힘을 잘 아는 나라였다동시에 문화적으로 중국에 많은 영향을 받았던 나라다외교는 정치·경제적 교류인 동시에 문화적 교류다당시 백제는 동북아시아 문화 교류 네트워크의 허브로서 중국의 선진 문화를 발 빠르게 배우고가야와 신라를 거쳐 왜에 전달하는 통로였다. / 55p

 

 

당나라가 그간 무시해오던 신라와 관계를 적극적으로 맺은 단 하나의 이유는 고구려 침공 시 협력할 수 있는 파트너였기 때문이다안정을 넘어 공격까지 해준다는 신라가 그저 고마웠다그렇게 648년 신라와 당나라를 군사 동맹을 맺고 백제 공격을 준비하기에 이른다그렇게 한반도 정세는 이전과 전혀 다른 판도로 흘러가고 있었다가장 늦게 중국과 맞닿았던 한반도 변방의 작은 나라가 중원을 통일하고 사방을 제패하려는 최강국 당나라와 끈끈한 사이가 된 것이다. / 83p

 

 

 




 

 

 

 

  개인적으로 망국의 클리셰로 상징되는 의자왕이 한때 효심과 우애의 아이콘이었다는 것신라의 40여 성을 빼앗고 대야성까지 함락시키며 신라가 당에 도움을 청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을 제공했다는 것삼천 궁녀 이야기는 허구일뿐 당나라로 끌려가 치욕을 겪으며 그곳에서 사망했다는 것은 새롭게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다공민왕 역시 미친 사람이었다고 평가하기에는 고려가 쇠망하는 길목에서 마지막 힘을 다해 정상적으로 돌리려 노력했던 왕이었으며그가 시도했던 개혁을 자양분 삼아 조선이 건국되기도 했다는 점에서 또 다른 그의 모습을 보게 한다사화 역시 폭군들만이 사용한 정치술이 아니라 국왕 혹은 국왕과 의견을 같이하는 관료 집단이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벌이는 극단적인 정치 행위였다는 점에서연산군을 폭군으로 기억하더라도 그가 행한 정치 행위에 있어서는 당대의 정치 구조에 대한 파악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광종 때 피의 숙청을 이겨내고 과거 제도를 통해 자녀들을 중앙 정계로 진출시킨 호족들은 성종 연간을 거치며 국왕 아래서 새로운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나갔다그렇게 만들어진 정치 세력을 우리는 흔히 문벌(귀족)’이라고 부른다.

이들이야말로 국왕과 함께 고려의 정치를 좌지우지했고심지어 군권까지 장악한 세력이었다요나라에게서 강동 6주를 얻은 서희귀주대첩을 주도한 강감찬동북 9성을 쌓아 여진과의 갈등을 불러일으킨 윤관도 모두 문벌이었다바로 이 문벌과 고려의 국왕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야말로 고려의 정치 시스템을 이해하는 시작과 끝이다. / 158p

 

 

조선 중기변화하는 정치 시스템은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 때 완성된다여느 왕조 국가가 그랬듯 조선 왕조도 건국 초기 여러 번의 정치적 변란이 속출했고이에 정치 세력의 변화가 뒤따랐다변란 끝에 세조 시기 완성된 공신 집단인 훈구파는 푸려 성종 시기까지 조선의 정계를 장악한 특권 집단으로 성장했고이때 훈구파의 라이벌 집단인 사람이 등장한다훈구파의 힘이 아무리 강한들 결국 이들은 관료 집단이었고선을 넘는다고 판단되면 국왕은 견제 세력을 키웠다그것이 조선 특유의 정치 구조였다. / 237p

 

 

 



 

 

 

 

  끝으로 한국 사회의 교육열은 조선이 식민지화되고근대 교육을 수료했다는 증거인 학력이 개인의 능력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 일제 강점기부터 출발했다는 책의 설명은 과거는 단순히 과거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어 유의미하다삼풍백화점의 붕괴 또한 대한민국의 급작스럽고 압축적인 성장의 민낯과 곧 불어 닥치게 될 IMF 사태의 예고편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우리가 왜 역사를 단편적으로 바라봐서는 안 되는지를 실감케 한다.

 

 

 

  이처럼 세상에서 가장 짧은 한국사는 복잡한 한국사를 간략하게 설명하되 역사적 사건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고 맞물려 있는지 유기적으로 설명하고 있어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소설책을 읽듯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한국사는 물론 이와 관련된 동아시아와 세계사 전체 역사까지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하다한국사 교양책을 찾으시는 분들이나 학생들이 방학 때 읽어볼 만한 한국사 책을 찾으시는 분들에게 이 책을 꼭 읽어보시라 추천드린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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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러비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6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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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시적 언어와 독창적인 상상력으로

슬픔과 분노를 수용하는 깊이 있고 성숙한 태도를 진정성 있게 전달한 수작 중에 수작!

 

 

 

  소설 빌러비드는 한 비극적인 실제 사건으로부터 출발한 이야기다. 1856켄터키 주의 노예였던 마거릿 가너가 임신한 몸으로 네 명의 자식을 데리고 오하이오 강을 건너 신시내티로 도망치던 중추격에 나선 노예 사냥꾼과 보완관들에게 붙잡히고 만다가너는 자식을 노예로 살게 하느니 차라리 자기 손으로 죽이겠다고 결심하고두 살배기 딸을 칼로 베어버린다이때 다른 자식들도 죽이려고 했으나 실패한 뒤그녀는 살인죄로 기소된다당시 이 사건은 미국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는데가너를 사람으로 인정하여 딸을 죽인 살인죄로 기소할 것인가아니면 도망노예법에 따라 단순히 잃어버린 재산으로 취급하여 무죄방면할 것인가 논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역설적이게도 사람으로서살인죄로 기소되기를 원했던 가너의 바람과 달리 끝내 온전히 재판을 받지 못하고 노예로 생을 마쳤다고 한다.

 

 

 

  이따금 우리는 나쁜 꿈을 잊듯 그저 잊어버리는 게 편리하다고 믿는 일들이 있다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끔찍한 과거와 고통스러운 사건 앞에서 가장 쉬운 일이 있다면마치 없었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눈을 감아버리는 것철저히 에둘러 가거나 손으로 더듬어 만져보기를 거부하는 것망각이라는 형태로 저 기억의 심연 어딘가에 가둬둔 채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열쇠를 내던져 버리는 것이다하지만 억울한 상처와 죽음의 한이 서까래까지 그득그득 쌓이지 않은 집이 한 채도 없고여덟의 자식을 낳았으나 모두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 없으며어린 딸아이의 묘비에 이름 하나라도 새겨 넣어보겠다고 자신의 몸을 팔아야 한다면도망치거나 교수형을 당하지 않으면 다른 집에서 빌려가거나 임대되거나 팔려가거나 다시 사오거나 비축되거나 저당잡히거나 상으로 주어지거나 도난당하거나 잡혀서햇살을 받으며 물통 위에 앉아 있는 수탉 미스터의 이름조차도 가질 수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면기어코 자신의 딸을 죽여서라도 너만큼은 노예로 살게 하지 않겠다고 결심해야만 하는 이 앞에서 감히 미래라는 말을 빌려 쉽게 잊으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강기슭을 따라 움푹한 곳에서 자라는 푸른고사리의 포자들이 수면에 둥둥 떠서 강 한가운데로 흘러갔다그 푸르스름한 은빛 행렬은 햇살이 낮고 희미해졌을 때 강기슭에 누워서 그 속이나 바로 가까이에 있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았다종종 벌레로 잘못 보기 쉬웠지만 사실 그것들은 한 세대가 미래를 확신하며 잠자고 있는 씨앗이었다잠깐 동안은 모두에게 미래가 있다고 믿기 쉽다포자 속에 담긴 모든 것들이 실현될 거라고정해진 수명을 다할 거라고하지만 이런 확신의 순간은 오래가지 않는다. / 143p

 

 

 

 

비극의 참상 너머에 존재하는 모든 영혼들을 향한 위로 그리고 희망

 

 

  오하이오주 블루스톤 로드 124번지한때 이 집은 베이비 석스 성녀의 위대하고 커다란 심장으로 영화롭게 빛나던 곳이었다흑인 동포들에게 백인들로부터 빼앗긴 몸과 영혼을 되돌리고 자신을 사랑하라던 그녀의 위대한 말씀은 언제부턴가 힘을 잃어갔다베이비 석스의 며느리인 세서는 자신이 스위트홈 농장으로부터 달아나 갓난아이를 가슴에 안고 포장마차에서 뛰어내린 그 순간부터 비극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상대적으로 흑인들에게 관대했던 농장주인 가너 씨가 죽지 않았더라면 두 명의 사내아이와 젖먹이 딸곧 태어날 아이까지 뱃속에 품고 있던 세서가 달아날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세서는 학교 선생이라는 자가 스위트홈을 관리하기 위해 오면서 비롯된 가혹한 착취와 매질자신의 몸을 더럽히기까지 한 끔찍한 기억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탈출한다가는 도중 뱃속에 있던 딸 덴버가 태어나는 고통과 기적까지 끌어안으며오직 먼저 달아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과 젖먹이 아이에게 먹일 젖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그 말은 두루 일리가 있었다세서와 마찬가지로 베이비 석스의 인생에서도 남자와 여자는 체스판의 말처럼 이리저리 옮겨졌다베이비 석스가 사랑했던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그저 알고 지낸 사람까지도 죄다 도망치거나 교수형을 당하지 않으면 다른 집에서 빌려가거나 임대되거나 팔려가거나 다시 사오거나 비축되거나 저당잡히거나 상으로 주어지거나 도난당하거나 잡혀갔다결국 베이비는 자식이 여덟 명이었고 아이 아버지가 여섯 명이었다그녀가 인생이 더럽다고 한 것은 체스 말에 그녀의 자식들이 포함된다고 해서 체스 놀이를 멈추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 46p

 

 

어째서 이 머리는 거절이란 걸 모를까참혹한 일이든후회스러운 일이든더럽게 끔찍한 장면이든 가리는 게 없으니욕심꾸러기 아이처럼 뭐든 덥석덥석 받아먹는단 말이야단 한 번이라도고맙지만 사양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까방금 먹어서 이젠 한입도 더 못 먹겠다고 말이야이빨에 이끼 낀 그 빌어먹을 두 녀석만으로도 난 지금 터질 지경이야한 놈은 날 바닥에 눕힌 채 붙잡고 또 한 놈은 내 젖을 빨고녀석들의 책 읽는 선생은 그걸 지켜보며 공책에 적었지난 아직도 그 기억으로 꽉 차 있다고.” / 120p

 

 

 



 

 

 

 

  하지만 베이스 석스의 품으로 안전하게 도착한 것도 잠시학교 선생은 도망친 노예를 잡기 위해 세서가 있는 곳으로 쫓아온다아이들마저 노예의 삶을 살게 할 수 없었던 세서는 두 살 된 딸을 제 손으로 죽인다이로 인해 세서는 농장으로 끌려가는 대신 살인 혐의를 쓰고 감옥에 가지만 교수형을 당할 뻔한 그녀를 124번지의 집주인인 볼드윈이 도와줘 집으로 돌아온다하지만 이날 이후 124번지를 환하게 빛내던 영화는 사라지고사람들은 발길을 거두고베이비 석스의 불꽃마저 사라진다심지어 세서가 죽인 아이의 원혼이 이따금 집안을 뒤흔들고 소란스럽게 만들곤 했는데이를 견디지 못한 두 아들은 집을 떠나버린다훗날 스위트홈 시절에 함께 지냈던 폴 디에게 세서는 외친다. “내 등에는 나무가 자라고내 집에는 귀신이 나오고그 사이엔 품에 안은 딸아이 하나밖에 없지만더 이상 도망은 안 쳐절대로이 세상 그 무엇도 두 번 다시 날 도망치게 하지 못해난 여행을 한 번 했고 푯값을 치렀어하지만 알아폴 디 가너그 값이 어마어마하게 비쌌어!”

 

 

 

세서는 자신의 두 손과 암녹색 소매를 내려다보며 이 집안이 얼마나 밋밋한 무채색인지그러면서도 베이비 석스처럼 알록달록한 색깔을 그리워하지 않았다는 게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생각했다일부러 그랬어그녀는 생각했다일부러 피한 거야어린 딸아이의 묘비에 점점이 박힌 분홍색 돌가루가 기억 속에 남은 마지막 색깔이었으니까그 일 이후로 그녀는 암탉처럼 색맹이 되어버렸다. / 71p

 

 

그럼 이런 기분도 좀 느껴보지그래잠을 잘 침대와 함께 잠들 누군가가 있어서그걸 얻기 위해 날마나 뭘 해야 할지 죽도록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기분이 어떤 건지 말이야그게 어떤 기분인지 느껴보라고그게 힘들거든언제 뭐가 덮칠지 모르는 길을 떠도는 흑인 여자의 심정이 어떨지 좀 느껴보든지그런 걸 느껴보란 말이야.” / 116p

 

 

생의 마지막날 오후침대에서 빠져나와 방문 앞까지 느릿느릿 걸어가더니노예로 육십 년 자유인으로 십 년을 살며 배운 교훈을 세서와 덴버에게 남겼다이 세상에 불운은 없다백인들이 있을 뿐이다라고. “그놈들은 그만둘 때를 모른다.” / 174p

 

 

 

  꽤 오랜 세월동안 세서는 철저히 과거의 접근을 막아내고하나 남은 딸 덴버를 과거로부터 지켜내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믿어왔다그런데 그녀 앞에 과거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두 사람이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한 명은 과거 농장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을 함께 안고 있는 인물이지만 세서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며 미래를 함께 하자고 말하는 폴 디이고또 다른 한 명은 빌러비드다죽은 아이의 묘비에 새긴 비문장례식 중에 디얼리 빌러비드(참으로 사랑하는)’라고 했던 목사의 말을 따서 단 한 마디 새길 수 있었던 바로 그 말빌러비드만약 죽은 딸이 살아 있다면 자신의 앞에 나타난 빌러비드 나이쯤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세서는 그녀가 자신의 딸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빌러비드는 엄마인 세서의 무한한 사랑을 갈망하고살아있을 때 받지 못한 애정을 갈구하며 세서의 삶과 124번지의 운명을 또다시 과거로 잠식한다.

 

 

 

이제 두 번째로 124번지를 방문하려 하면서 스탬프는 그때 나눈 대화를 후회했다날카로웠던 자신의 어조자기가 태산처럼 여겼던 여인이 뼛속까지 지쳐 있는 모습을 보지 않으려 했던 자신의 태도를이제야너무 뒤늦게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펌프처럼 사랑을 퍼올리던 심장말씀을 전하던 입은 중요하지 않았다어찌됐든 백인들은 그녀 집 마당까지 쳐들어왔고베이비 석스는 세서의 난폭한 선택을 비난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이쪽이든 저쪽이든 결정했더라면 그녀는 구원받았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양쪽 사이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자그녀는 자리에 누워버렸다마침내 백인들이 그녀를 쓰러뜨린 것이다. / 295p

 

 


 

 

 

 

  소설을 읽다보면 과연 빌러비드가 죽은 딸의 망령일까실존하는 인물일까 마지막까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로 읽을 수밖에 없는데 사실 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오히려 이 작품에서 빌러비드라는 초월적인 존재가 주는 상징성에 우리는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이는 마지막 장면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빌러비드에 관한 소문을 듣고 유령을 쫓아내기 위해 124번지로 몰려든 마을 여자들과 때마침 함께 나타난 집주인 볼드윈세서는 백인인 볼드윈을 보는 순간 과거 자기 가족들을 사로잡아 가려고 쫓아왔던 학교 선생인 줄로 착각하고 손에 든 얼음송곳으로 볼드윈을 공격한다다행히 마을 여자들이 이를 막아서면서 사태는 진정되지만 이후 빌러비드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더 이상 이들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빌러비드는 왜 사라졌을까어쩌면 빌러비드는 자신이 아닌 백인에게로 향하는 엄마의 공격을 마주한 순간 품고 있었던 원망이 해소되었기에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던 게 아닐까여기에는 흑인 사회 전체가 상처와 고통상실의 아픈 과거로부터 벗어나 미래를 마주하길 바라는 작가의 바람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그런 의미에서 빌러비드가 떠난 후지속될 삶이 아닌 죽음을 택하기를 바랐던 세서를 어루만지며 했던 폴 디의 말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당신과 나우리에겐 어느 누구보다 많은 어제가 있어이젠 무엇이 됐든 내일이 필요해.” “당신이 당신의 보배야세서바로 당신이.”

 

 

 

그들에게 흑인들이 사실은 얼마나 점잖고 영리하고 다정하고 인간적인지를 입증하려 기를 쓰면 쓸수록흑인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백인들에게 납득시키느라 자신을 소진하면 할수록흑인들의 마음속에는 점점 더 깊고 빽빽한 정글이 자라났으니까하지만 그 정글은 흑인들이 어디 살 만한 다른 곳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백인들이 흑인들의 마음속에 심어놓은 것이었다그리고 정글은 자라났다퍼져나갔다삶 속에삶을 통해삶 이후에도정글은 자라났고 그걸 만든 백인들을 침범하기에 이르렀다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건드렸다변화시키고 바꿔놓았다. / 326p

 

 

 

  이처럼 빌러비드는 세서라는 한 여인이 자신의 딸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노예제도라는 끔찍한 덫과과거의 고통으로부터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다만 이 작품은 여느 흑인문학처럼 노예제의 잔인성을 드러내고 고통을 호소하는 데 주안점을 두기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발견할 수 있는 지도를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던 사람들의 내면적 삶을 깊이 있게 조망하였기에 더욱 인상적이다특히 놀라운 시적 언어와 독창적인 상상력으로 하여금 슬픔과 분노를 수용하는 깊이 있고 성숙한 태도를 진정성 있게 전달했다는 점에서 수작이라 할 만하다세상 밖으로 스스로 걸어 나간 덴버처럼오랜 인간의 역사에서 쌓여진 어두운 과거로부터 모두가 화해하고 새로운 기억의 역사로 나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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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하루 빅터 연산 3A - 초등 3 수준 초등 빅터 연산
최용준.천재교육 편집부 지음 / 천재교육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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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하고 힘든 연산은 out!

쉽고 재미있는 빅터 연산으로 연산홀릭!

 

 

 

  아이가 원리셈 초등3 2권을 끝내고쎈 수학 2-1 과정으로 서술형 문제를 다지고 있었다보다 알찬 구성의 새로운 연산책을 찾던 중 천재교육에서 출판된 빅터 연산을 시작해보았다초등수학은 3학년부터 난이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미리 다양한 연산책으로 기초를 탄탄히 다져놓으면 힘들이지 않고 익힐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빅터 연산은 이렇게 구성되어 있어요!

 

 

 

만화로 흥미 UP_

학습할 내용을 만화로 먼저 보면 흥미와 관심을 높일 수 있어요.

 

 

개념&원리 탄탄_

연산의 원리를 쉽고 재미있게 확실히 이해할 수 있고원리 이해를 돕는 문제로 연산의 기본을 다질 수 있어요.

 

 

집중 연산_

집중 연산을 통해 연산을 더 빠르고 더 정확하게 해결할 수 있어요.

 

 

다양한 유형으로 흥미 UP_

수수께끼연상퀴즈 등 다양한 형태의 문제로 게임보다 더 쉽고 재미있게 연산을 학습하면서 실력을 쌓을 수 있어요.

 

 

스마트 학습 모바일 러닝_

QR 코드를 찍으면 재미있는 연산 게임을 할 수 있어요.

 

 

 




 

 

 

 

  덧셈과 뺄셈곱셈과 나눗셈 외에 시간과 길이분수와 소수 개념까지 익혀야 하는 3학년 과정부터는 단순 연산만 나열되어 있는 학습지나 문제지보다 다양한 유형으로 아이가 수학의 흥미를 잃지 않는 게 중요한 듯하다특히 학원을 따로 보내지 않는 나 같은 부모에게는 더더욱 알찬 구성의 연산책이 필요한데 빅터 연산이 이에 적합한 것 같다.

 

 

 



 

 

 

 

우리 아이에게 권할 괜찮은 연산책을 찾으시는 부모님들께 이 책을 추천합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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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울 줄 알았는데 재밌어! 야구 만화 도감 반전 도감 1
익뚜 지음, 김양희 감수 / 후즈갓마이테일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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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야구에 입문한 어린이와 야알못인 이들에게 추천하는 재미있는 야구 만화!

깔깔 웃으며 읽다보면 어느 새 야구의 멋과 재미를 알게 되는 책!

 

 

 

  삼성 라이온즈의 팬이 된 지 어느 덧 30년차나는 이승엽 선수가 담장 밖을 넘기는 홈런에 희열을 느끼는당시 여학생으로서는 보기 드문 야구팬이었다삼성 라이온즈 야구 중계방송이 있을 때면 나는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TV 앞에 앉아 꼭 시청하곤 했다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아마도 내가 처음 야구를 접하게 된 건 순전히 아빠가 보는 중계방송을 옆에서 따라보면서였을 것이다여러 스포츠 중에서 상당히 긴 시간 동안 경기가 이루어지는 종목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종 아빠가 설명해주는 야구 이야기가 참 재미있었다담장을 때리는 장타성 타구에 주자들이 혼신을 다해 뛰고야구는 9회말 2아웃부터라는 말이 있듯 드라마 같은 역전 홈런 한 방에 열광하며 함께 쾌감을 나누는 시간이 즐거웠다.

 

 

 

  시간이 흘러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나는 여전히 평일 6시 20분이 되면 야구 중계방송에 채널을 맞춘다첫째 아이가 오늘은 누구랑 해?” 하고 묻는 게 일상일 만큼내가 아빠의 영향을 받았듯 나의 아이들도 함께 중계를 보며 강제 삼성 라이온즈팬이 된 셈이다이제 겨우 4살과 8살인 아이들이라서 아직 야구가 생소할 테지만내가 홈런!” 하고 소리를 지르면 함께 만세를 부르며 기뻐한다비록 안타를 쳤는데도 홈런이라고 하고아직 이닝이 남았는데 광고로 넘어가면 경기가 다 끝난 줄로 알지만 말이다그래서 투수가 누구인지타자는 어떤 역할을 하는지점수는 어떻게 나는 것인지 하나씩 설명해주고는 있지만 그때마다 이해할 듯 말 듯 어려워하는 표정이다.

 

 

 

  때문에 야구를 아이의 시선에 맞춰 쉽게 설명해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심하던 중반가운 신간이 눈에 띄었다어려울 줄 알았는데 재밌어야구 만화 도감이란 책이었다야구가 처음인 어른 또는 어린이들이 재미있게 야구 상식을 익힐 수 있는 만화책이라니장황하게 글로 설명된 책이 아니라 만화로 되어 있어 접근하기 좋은 책이라 당장 읽어보고 싶었다.

 

 

 

야구가 처음인 어린이와 어른들을 위한 쉽고 재미있는 만화 도감

 

 

  집에서 아빠와 야구 중계를 보던 베비는 야구에 대해 이것저것 묻지만아빠는 야구를 보느라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는다이에 실망한 베비는 친구 주니에게 하소연해보지만야구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우기기만 할 뿐 주니조차 제대로 아는 게 없어 보인다바로 그 때한 할아버지가 이들 앞에 나타난다야구 규칙에 빠삭한 미스터리 할아버지와 그의 쌍둥이 손녀 마이와 미르는 이때부터 베비와 주니에게 야구를 가르쳐주기 시작하는데…….

 

 

 





 

 

 

 

  이처럼 어려울 줄 알았는데 재밌어야구 만화 도감 축구처럼 야구공을 골대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야알못이었던 베비와 주니가 점차 야구에 대해 알아가고스스로 야구를 해보면서 야구의 참맛을 느끼게 된다는 스토리를 담고 있다기본적인 야구 용어를 비롯해 야구장과 야구공심판과 타석 그리고 감독의 역할까지야구를 알기 위해 필요한 정보들을 친근한 캐릭터와 유머러스한 대화를 통해 재미있게 전달한다. 250여 페이지의 만화 외에 부록으로 야구공과 야구 글러브야구 방망이홈 플레이트가 귀여운 캐릭터로 등장하는 4컷 만화 역시 알찬 정보와 재미를 더한다특히 스포츠 웹툰 작가로 익히 알려진 익뚜 님의 그림이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포지션마다 다른 야구 글러브 크기의 차이주자가 있을 때와 없을 때 다른 투수의 투구 자세투수가 던질 수 있는 다양한 구종 등 이 책을 읽으며 야구를 보는 시야가 한층 더 넓어진 듯해서 유익했다무엇보다 키득키득 웃으며 읽다보면 어느새 야구의 진정한 멋과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야구입문자들에게 제격이다야구를 알고 싶은 어린이와 야구 선수를 꿈꾸는 어린이에게 든든한 가이드로 이 책을 추천드린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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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이 모조리 사라진다면
리처드 파워스 지음, 이수현 옮김, 해도연 감수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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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하나하나에 경이를 담은 놀라운 소설!

지금 당장 주목해야 할 책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 책을 추천하겠다!

 

 

 

  이따금 나는 아이에게 들려줄 이야기의 무게를 가늠하느라 머뭇거리곤 한다재미삼아 한 거짓말이 나비효과가 되어 돌아오는 이야기남의 것을 탐하다 자신이 가진 것마저 잃어버린 이야기가 잠자리에서 베개 삼아 들을 수 있는 동화라는 것쯤은 아이도 알고 있다다만언젠가는 엄마에게도 죽음이 찾아올 수 있다는 이야기지구 저 반대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무자비한 폭격에 관한 이야기우리에 가두고 키워진 동물들이 사람들의 먹거리가 되기도 한다는 잔혹한 진실 앞에서 내가 어떤 말을 해주어야 아이가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짐작하기 어렵다.

 

 

 

  단어 하나하나조차 민감하게 반응하고 흔들리기 쉬운 아이의 눈빛 앞에서이 아름답고 견고해 보이는 세상이 실은 얼마나 바스라지기 쉽고 잔인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일이란 늘 무겁고 버겁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넓디넓은 광활한 우주 속에서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경이로운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그 모든 과오 속에도 희망은 있다는 것을 일러주는 게 나의 몫임을 안다아들 로빈에게 전 우주적 감각과 가능성의 세계를 탐험할 수 있게 한 시오처럼, ‘우리는 미래 세대에게 어떤 세상을 열어보여 주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늘 품고 살아야 한다고 다짐하면서.

 

 

 

완벽한 사람은 없어요.

하지만 우리 모두가 너무나 아름다운 방식으로 부족하죠. / 18p

 

 

 

  싱글대디이자 행성대기예측프로그램을 연구 중인 우주생물학자 시오는 갓 아홉 살이 된 아들 로빈과 오늘도 지구 너머에 존재하는 행성을 탐험한다스모키산맥의 숲속에 임시 베이스캠프를 마련한 뒤 망원경을 설치하고우리은하 4000억 개의 별이 빛나는 밤하늘 아래에서 나란히 누워 행성들이 보내는 신호에 귀를 기울인다시오는 행성이 얼마나 많은지어째서 문명이 가득해야 할 은하계가 이토록 침묵하는가를 두고 걱정하는 자신의 특별한 아이를 바라보며 고뇌한다둘 만의 이 특별한 야영이 끝나고 나면누구보다도 상실에 민감하고 욱하는 성격에 제어하기 어려운 아이의 행동을 아스퍼거 또는 강박장애, ADHD 같은 진단명으로 통제하려드는 도시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아니나 다를까야영을 다녀온 직후 로빈은 학교에서 친구의 얼굴을 보온병으로 때려 다치게 한다도로 위에 뛰어든 주머니쥐를 피하다 죽은 엄마의 사고를 두고 제멋대로 말하는 친구에게 분개한 것이다.

 

 

 

의학이 내 아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모습을 지켜보며나는 별난 이론을 하나 발전시켰다인생은 우리가 멈춰 서서 교정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는 이론내 아들은 내가 헤아릴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도 없는 주머니 우주였다우리 모두는 하나의 실험이며심지어 우리는 그 실험이 무엇을 시험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아내였다면 그 의사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았으리라아내는 이렇게 말하기를 좋아했다. ‘완벽한 사람은 없어요하지만 우리 모두가 너무나 아름다운 방식으로 부족하죠.’ / 18p

 

 

로빈은 나를 피해서 현미경 접안렌즈를 들여다보았다공책에 필기하는 손이 바빠졌다바깥에서 누가 본다면 녀석의 연구가 진짜라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2학년 때 로빈의 담임은 비공개 학생 평가에서 느리지만 그렇다고 늘 정확하지는 않다.’ 라고 썼다느리다는 점은 맞았고정확성에 대한 평가는 틀렸다시간만 주어지면 로빈은 담임이 상상도 못할 정도의 정확성을 갖출 수 있었다. / 29p

 

 

 



 

 

 

 

  로빈의 약물치료를 거부해오던 시오는 마침내 아내의 친구였던 신경과학자 마틴 커리어를 찾아가 조언을 구하고그로부터 디코디드 뉴로피드백이라는 치료를 로빈에게 받게 한다. AI를 이용해 타인의 감정 지문을 그대로 경험하도록 훈련하는 것으로엄마인 얼리사의 생전 두뇌 활동 패턴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방법을 배움으로써 로빈은 눈에 띄게 안정적으로 변해간다그러는 과정에서 로빈은 동물권활동가였던 얼리사의 영향을 받아 멸종된 생명체들을 그리는 데 몰두한다파머스 마켓에 자신이 그린 그림을 팔아 생긴 수익금으로 동물단체에 기부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뿐만 아니라 의사당 앞에서 동물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호소하기 위해 1인 시위를 하기도 한다하지만 아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지지해주려던 시오와 지구 생명체의 위기를 세상에 전하고 싶었던 로빈의 노력은 번번이 사회와 부딪친다진전을 보였던 치료 역시 연구비 지원이 중단되면서 멈추게 된다무엇보다 자신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 세상과 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 사람들의 냉정한 시선을 과연 이 연약하고 섬세한 아이가 이겨낼 수 있을까.

 

 

 

엄마가 하던 말 기억해? “넌 얼마나 부자니꼬마야?”’

기억하지.”

로빈은 두 손을 들어 올려 달빛이 비치는 산을 증거로 가리켰다바람에 구부러진 나무들가까운 강에서 나는 요란한 물소리특이한 대기 속에서 원자의 계단을 굴러 떨어지는 전자들어둠 속에서 로빈의 얼굴은 정확한 말을 찾아 고심하고 있었다. ‘이만큼 부자야이렇게 부자야.’ / 51p

 

 

존재하는 많은 것들은 셋 중 하나의 특질을 나타낸다. 0, 1, 또는 무한이다. ‘단 하나는 이야기의 모든 단계에모든 곳에 있었다우리는 예전에 한 세계에서한 가지 액체 매질 속에서한 가지 에너지 저장 형태와 한 가지 유전 암호를 써서 생겨난 한 종류의 생명만을 알았다하지만 나의 세계들이 지구 같은 필요는 없었다나의 세계에서 태어난 생명은 지표수나 골디락스 존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탄소를 핵심 요소로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어린아이가 그렇듯 나는 편견에서 아무것도 추정하지 않으려 했다마치 하나뿐인 우리의 예가 오히려 가능성에 끝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다고 생각했다. / 100p

 

 

나한테 벌점도 줬어학교에서 물건을 파는 건 규칙에 어긋난다며그 정도는 안내서를 보고 알았어야 한대그래서 케일라에게 우리가 선생님 나이가 되면 지구상의 대형 동물 절반이 없어질 걸 아느냐고 물었어그랬더니 지금은 생물학이 아니라 사회과학시간이고 말대꾸하지 말라면서 또 벌점을 줬어.’

나는 차를 몰았다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인간은 지긋지긋했다우리는 집 앞에 차를 댔다아들이 내 팔에 손을 얹었다.

우린 뭔가 잘못된 데가 있어아빠.’ / 175p

 

 

 



 

 

 

 

  과거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언제까지나 계속해서 되풀이되는 행성에서 살고 싶었던 로빈. ‘이따금 내 아이가 사는 행성은 어디일까 궁금해질 때가 있다던 시오의 글처럼로빈은 그 자체로 소우주였다끊임없이 다른 행성에서 들려올지 모를 생명의 신호를 기다리며 이 땅의 생명들을 있는 그대로 품고 싶었던 아이를아이의 우주를 파괴한 건 누구였을까무모하고 폭력적이며 신과 같은 자각많고도 많은 자각급격하게 폭발하다 기계의 도움을 받고 수십억으로 불어난 자각오래 지속하기에는 너무나 불안정한 이 힘을 과신하고 있는 우리 모두는 아니었을까때문에 힘없이 엄마의 기도문을 외우던 로빈의 음성이 내내 가슴 한 구석을 묵직하게 짓누른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우리에게서 해방되기를.’

 

 

 

하지만 어차피 지구상의 모든 것이 그 아이를 바꾸고 있었다점심시간에 친구가 던진 공격적인 말 한 마디가상의 농장에서 하는 클릭질 한 번로빈이 그리는 모든 생물종모든 온라인 비디오 클립밤에 로빈이 읽는 모든 이야기와 내가 들려 주는 모든 이야기가 로빈을 바꿨다이런 자아들의 행렬 속에 영원히 그대로’ 남을 단 한 명의 순례자 로빈은 없었다시공간을 행진하는 만화경 같은 자아들의 행렬 자체가 로빈의 현재 진행형이었다. / 162p

 

 

그럼 차세대는 어떻게 할 거래?’

전 세계 천문학자들과 열 살짜리들의 잠을 망쳐 놓을 게 확실한 질문이었다허블의 5만 배는 멀리 보려고 120억 달러를 들인 장비가열여덟 개의 육각 거울을 만분의 1밀리미터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배열해서 우주의 저편을 보려고 했던 장비가 버려져서 조각조각 뜯겨 나가다니…… 역사상 가장 비싼 난파선이리라.

아빠모든 게 뒷걸음질 쳐.’

() ‘저 바깥에 있는 모든 문명들 말이야다들 왜 우리의 소식을 전혀 못 듣는지 궁금해할 거야.’ / 371p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에 닥친 위기로부터 무관심한 사람들장애진단을 받거나 적응이 느린 아이들을 우리 사회가 어떻게 대하는가에 대한 문제우주 탐사 및 과학 기술의 발전을 저해하는 시선들 등 전 인류가 공감하고 고민해야 할 주제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수렴한 작가의 필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문장 하나하나가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는 이 소설에 뭐라 더 좋은 말을 쓸 수 있을까지금 당장 주목해야 할 책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 책을 추천하겠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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