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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러비드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6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평점 :
놀라운 시적 언어와 독창적인 상상력으로
‘슬픔과 분노를 수용하는 깊이 있고 성숙한 태도’를 진정성 있게 전달한 수작 중에 수작!
소설 『빌러비드』는 한 비극적인 실제 사건으로부터 출발한 이야기다. 1856년, 켄터키 주의 노예였던 마거릿 가너가 임신한 몸으로 네 명의 자식을 데리고 오하이오 강을 건너 신시내티로 도망치던 중, 추격에 나선 노예 사냥꾼과 보완관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가너는 자식을 노예로 살게 하느니 차라리 자기 손으로 죽이겠다고 결심하고, 두 살배기 딸을 칼로 베어버린다. 이때 다른 자식들도 죽이려고 했으나 실패한 뒤, 그녀는 살인죄로 기소된다. 당시 이 사건은 미국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는데, 가너를 ‘사람’으로 인정하여 딸을 죽인 살인죄로 기소할 것인가, 아니면 도망노예법에 따라 단순히 잃어버린 재산으로 취급하여 무죄방면할 것인가 논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사람으로서, 살인죄로 기소되기를 원했던 가너의 바람과 달리 끝내 온전히 재판을 받지 못하고 노예로 생을 마쳤다고 한다.
이따금 우리는 나쁜 꿈을 잊듯 그저 잊어버리는 게 편리하다고 믿는 일들이 있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끔찍한 과거와 고통스러운 사건 앞에서 가장 쉬운 일이 있다면, 마치 없었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눈을 감아버리는 것, 철저히 에둘러 가거나 손으로 더듬어 만져보기를 거부하는 것. 망각이라는 형태로 저 기억의 심연 어딘가에 가둬둔 채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열쇠를 내던져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억울한 상처와 죽음의 한이 서까래까지 그득그득 쌓이지 않은 집이 한 채도 없고, 여덟의 자식을 낳았으나 모두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 없으며, 어린 딸아이의 묘비에 이름 하나라도 새겨 넣어보겠다고 자신의 몸을 팔아야 한다면? 도망치거나 교수형을 당하지 않으면 다른 집에서 빌려가거나 임대되거나 팔려가거나 다시 사오거나 비축되거나 저당잡히거나 상으로 주어지거나 도난당하거나 잡혀서, 햇살을 받으며 물통 위에 앉아 있는 수탉 미스터의 이름조차도 가질 수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면? 기어코 자신의 딸을 죽여서라도 너만큼은 노예로 살게 하지 않겠다고 결심해야만 하는 이 앞에서 감히 미래라는 말을 빌려 쉽게 잊으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강기슭을 따라 움푹한 곳에서 자라는 푸른고사리의 포자들이 수면에 둥둥 떠서 강 한가운데로 흘러갔다. 그 푸르스름한 은빛 행렬은 햇살이 낮고 희미해졌을 때 강기슭에 누워서 그 속이나 바로 가까이에 있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았다. 종종 벌레로 잘못 보기 쉬웠지만 사실 그것들은 한 세대가 미래를 확신하며 잠자고 있는 씨앗이었다. 잠깐 동안은 모두에게 미래가 있다고 믿기 쉽다. 포자 속에 담긴 모든 것들이 실현될 거라고, 정해진 수명을 다할 거라고. 하지만 이런 확신의 순간은 오래가지 않는다. / 143p
비극의 참상 너머에 존재하는 모든 영혼들을 향한 위로 그리고 희망
오하이오주 블루스톤 로드 124번지. 한때 이 집은 베이비 석스 성녀의 위대하고 커다란 심장으로 영화롭게 빛나던 곳이었다. 흑인 동포들에게 백인들로부터 빼앗긴 몸과 영혼을 되돌리고 자신을 사랑하라던 그녀의 위대한 말씀은 언제부턴가 힘을 잃어갔다. 베이비 석스의 며느리인 세서는 자신이 스위트홈 농장으로부터 달아나 갓난아이를 가슴에 안고 포장마차에서 뛰어내린 그 순간부터 비극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상대적으로 흑인들에게 관대했던 농장주인 가너 씨가 죽지 않았더라면 두 명의 사내아이와 젖먹이 딸, 곧 태어날 아이까지 뱃속에 품고 있던 세서가 달아날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 세서는 학교 선생이라는 자가 스위트홈을 관리하기 위해 오면서 비롯된 가혹한 착취와 매질, 자신의 몸을 더럽히기까지 한 끔찍한 기억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탈출한다. 가는 도중 뱃속에 있던 딸 덴버가 태어나는 고통과 기적까지 끌어안으며, 오직 먼저 달아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과 젖먹이 아이에게 먹일 젖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그 말은 두루 일리가 있었다. 세서와 마찬가지로 베이비 석스의 인생에서도 남자와 여자는 체스판의 말처럼 이리저리 옮겨졌다. 베이비 석스가 사랑했던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그저 알고 지낸 사람까지도 죄다 도망치거나 교수형을 당하지 않으면 다른 집에서 빌려가거나 임대되거나 팔려가거나 다시 사오거나 비축되거나 저당잡히거나 상으로 주어지거나 도난당하거나 잡혀갔다. 결국 베이비는 자식이 여덟 명이었고 아이 아버지가 여섯 명이었다. 그녀가 인생이 더럽다고 한 것은 체스 말에 그녀의 자식들이 포함된다고 해서 체스 놀이를 멈추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 46p
“어째서 이 머리는 거절이란 걸 모를까? 참혹한 일이든, 후회스러운 일이든, 더럽게 끔찍한 장면이든 가리는 게 없으니. 욕심꾸러기 아이처럼 뭐든 덥석덥석 받아먹는단 말이야. 단 한 번이라도, 고맙지만 사양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까? 방금 먹어서 이젠 한입도 더 못 먹겠다고 말이야. 이빨에 이끼 낀 그 빌어먹을 두 녀석만으로도 난 지금 터질 지경이야. 한 놈은 날 바닥에 눕힌 채 붙잡고 또 한 놈은 내 젖을 빨고, 녀석들의 책 읽는 선생은 그걸 지켜보며 공책에 적었지. 난 아직도 그 기억으로 꽉 차 있다고.” / 120p
하지만 베이스 석스의 품으로 안전하게 도착한 것도 잠시, 학교 선생은 도망친 노예를 잡기 위해 세서가 있는 곳으로 쫓아온다. 아이들마저 노예의 삶을 살게 할 수 없었던 세서는 두 살 된 딸을 제 손으로 죽인다. 이로 인해 세서는 농장으로 끌려가는 대신 살인 혐의를 쓰고 감옥에 가지만 교수형을 당할 뻔한 그녀를 124번지의 집주인인 볼드윈이 도와줘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날 이후 124번지를 환하게 빛내던 영화는 사라지고, 사람들은 발길을 거두고, 베이비 석스의 불꽃마저 사라진다. 심지어 세서가 죽인 아이의 원혼이 이따금 집안을 뒤흔들고 소란스럽게 만들곤 했는데, 이를 견디지 못한 두 아들은 집을 떠나버린다. 훗날 스위트홈 시절에 함께 지냈던 폴 디에게 세서는 외친다. “내 등에는 나무가 자라고, 내 집에는 귀신이 나오고, 그 사이엔 품에 안은 딸아이 하나밖에 없지만, 더 이상 도망은 안 쳐. 절대로. 이 세상 그 무엇도 두 번 다시 날 도망치게 하지 못해. 난 여행을 한 번 했고 푯값을 치렀어. 하지만 알아, 폴 디 가너? 그 값이 어마어마하게 비쌌어!”
세서는 자신의 두 손과 암녹색 소매를 내려다보며 이 집안이 얼마나 밋밋한 무채색인지, 그러면서도 베이비 석스처럼 알록달록한 색깔을 그리워하지 않았다는 게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생각했다. 일부러 그랬어, 그녀는 생각했다. 일부러 피한 거야. 어린 딸아이의 묘비에 점점이 박힌 분홍색 돌가루가 기억 속에 남은 마지막 색깔이었으니까. 그 일 이후로 그녀는 암탉처럼 색맹이 되어버렸다. / 71p
“그럼 이런 기분도 좀 느껴보지그래? 잠을 잘 침대와 함께 잠들 누군가가 있어서, 그걸 얻기 위해 날마나 뭘 해야 할지 죽도록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기분이 어떤 건지 말이야. 그게 어떤 기분인지 느껴보라고. 그게 힘들거든, 언제 뭐가 덮칠지 모르는 길을 떠도는 흑인 여자의 심정이 어떨지 좀 느껴보든지. 그런 걸 느껴보란 말이야.” / 116p
생의 마지막날 오후, 침대에서 빠져나와 방문 앞까지 느릿느릿 걸어가더니, 노예로 육십 년 자유인으로 십 년을 살며 배운 교훈을 세서와 덴버에게 남겼다. 이 세상에 불운은 없다. 백인들이 있을 뿐이다, 라고. “그놈들은 그만둘 때를 모른다.” / 174p
꽤 오랜 세월동안 세서는 철저히 과거의 접근을 막아내고, 하나 남은 딸 덴버를 과거로부터 지켜내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믿어왔다. 그런데 그녀 앞에 과거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두 사람이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한 명은 과거 농장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을 함께 안고 있는 인물이지만 세서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며 미래를 함께 하자고 말하는 폴 디이고, 또 다른 한 명은 빌러비드다. 죽은 아이의 묘비에 새긴 비문, 장례식 중에 ‘디얼리 빌러비드(참으로 사랑하는)’라고 했던 목사의 말을 따서 단 한 마디 새길 수 있었던 바로 그 말, 빌러비드. 만약 죽은 딸이 살아 있다면 자신의 앞에 나타난 빌러비드 나이쯤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세서는 그녀가 자신의 딸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빌러비드는 엄마인 세서의 무한한 사랑을 갈망하고, 살아있을 때 받지 못한 애정을 갈구하며 세서의 삶과 124번지의 운명을 또다시 과거로 잠식한다.
이제 두 번째로 124번지를 방문하려 하면서 스탬프는 그때 나눈 대화를 후회했다. 날카로웠던 자신의 어조, 자기가 태산처럼 여겼던 여인이 뼛속까지 지쳐 있는 모습을 보지 않으려 했던 자신의 태도를. 이제야, 너무 뒤늦게,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펌프처럼 사랑을 퍼올리던 심장, 말씀을 전하던 입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찌됐든 백인들은 그녀 집 마당까지 쳐들어왔고, 베이비 석스는 세서의 난폭한 선택을 비난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결정했더라면 그녀는 구원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양쪽 사이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자, 그녀는 자리에 누워버렸다. 마침내 백인들이 그녀를 쓰러뜨린 것이다. / 295p
소설을 읽다보면 과연 빌러비드가 죽은 딸의 망령일까, 실존하는 인물일까 마지막까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로 읽을 수밖에 없는데 사실 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오히려 이 작품에서 빌러비드라는 초월적인 존재가 주는 상징성에 우리는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마지막 장면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빌러비드에 관한 소문을 듣고 유령을 쫓아내기 위해 124번지로 몰려든 마을 여자들과 때마침 함께 나타난 집주인 볼드윈, 세서는 백인인 볼드윈을 보는 순간 과거 자기 가족들을 사로잡아 가려고 쫓아왔던 학교 선생인 줄로 착각하고 손에 든 얼음송곳으로 볼드윈을 공격한다. 다행히 마을 여자들이 이를 막아서면서 사태는 진정되지만 이후 빌러비드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더 이상 이들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빌러비드는 왜 사라졌을까. 어쩌면 빌러비드는 자신이 아닌 백인에게로 향하는 엄마의 공격을 마주한 순간 품고 있었던 원망이 해소되었기에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던 게 아닐까. 여기에는 흑인 사회 전체가 상처와 고통, 상실의 아픈 과거로부터 벗어나 미래를 마주하길 바라는 작가의 바람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빌러비드가 떠난 후, 지속될 삶이 아닌 죽음을 택하기를 바랐던 세서를 어루만지며 했던 폴 디의 말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당신과 나, 우리에겐 어느 누구보다 많은 어제가 있어. 이젠 무엇이 됐든 내일이 필요해.” “당신이 당신의 보배야, 세서. 바로 당신이.”
그들에게 흑인들이 사실은 얼마나 점잖고 영리하고 다정하고 인간적인지를 입증하려 기를 쓰면 쓸수록, 흑인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백인들에게 납득시키느라 자신을 소진하면 할수록, 흑인들의 마음속에는 점점 더 깊고 빽빽한 정글이 자라났으니까. 하지만 그 정글은 흑인들이 어디 살 만한 다른 곳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 백인들이 흑인들의 마음속에 심어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정글은 자라났다. 퍼져나갔다. 삶 속에, 삶을 통해, 삶 이후에도, 정글은 자라났고 그걸 만든 백인들을 침범하기에 이르렀다.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건드렸다. 변화시키고 바꿔놓았다. / 326p
이처럼 『빌러비드』는 세서라는 한 여인이 자신의 딸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노예제도라는 끔찍한 덫과, 과거의 고통으로부터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다만 이 작품은 여느 흑인문학처럼 노예제의 잔인성을 드러내고 고통을 호소하는 데 주안점을 두기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발견할 수 있는 지도를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던 사람들의 내면적 삶을 깊이 있게 조망하였기에 더욱 인상적이다. 특히 놀라운 시적 언어와 독창적인 상상력으로 하여금 ‘슬픔과 분노를 수용하는 깊이 있고 성숙한 태도’를 진정성 있게 전달했다는 점에서 수작이라 할 만하다. 세상 밖으로 스스로 걸어 나간 덴버처럼, 오랜 인간의 역사에서 쌓여진 어두운 과거로부터 모두가 화해하고 새로운 기억의 역사로 나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