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 윌북 클래식 첫사랑 컬렉션
제인 오스틴 지음, 송은주 옮김 / 윌북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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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의 남성과 여성세태를 향한 깊어진 시선!

세상을 읽어내고 편견 없이 대상을 직시할 수 있는 힘을 길러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사랑듣기만 하여도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여린 꽃 같은 이름세상의 수많은 단어들 중 이토록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게 또 있을까첫사랑에 대한 기억의 색채감은 저마다 다르지만내가 알고 있는 가장 맑고 밝은 색으로 채색하고 싶은 마음과 인생에서 가장 짜릿하고 설렜던 기억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은 모두 같을 것이다그래서일까설득순수의 시대위대한 개츠비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다른 네 작품이 첫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한 데 엮여 근사한 컬렉션으로 완성된 구성을 보는 순간마음이 두근거렸다. ‘첫사랑 컬렉션’ 속에 담겨 있는 첫사랑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인생에 단 한 번가장 첫 번째로 기억되는 사랑이 한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란 과연 어느 정도일까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우리는 각자로부터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준남작 신분의 월터 엘리엇 경에게는 세 명의 딸이 있다아버지의 잘생긴 외모는 물론 높은 허영심까지 쏙 빼닮은 첫째 엘리자베스차분하고 다정한 성품을 지녔지만 가족에게 무시당하기 일쑤인 둘째 앤돈 많은 시골 가문으로 시집을 간 메리까지여기서 주인공은 바로 둘째 앤이다그녀는 8년 전장래가 촉망되었으나 재산도 지위도 없는 해군 장교 엔트워스와 사랑에 빠졌다하지만 이 약혼은 지각없고부적절하며잘될 가망은 물론 그럴 가치조차 없는 일이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설득당해 파혼하고 말았다시간이 흘러 어느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고 가세가 기울어져 가고 있는 집안을 돌보며 쓸쓸히 생활하던 그녀는 웬트워스가 전장에서 공을 세우고 큰 재산을 모아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앤은 여전히 그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시선이 머무를 만큼 신경이 쓰였지만웬트워스는 과거에 받은 상처로부터 여전히 회복되지 못한 듯 앤이 아니면 누구라도 좋다는 가시 돋친 말까지 하며 그녀와 거리를 둔다.

 

 

 

그는 앤 앨리엇을 아직 용서하지 못했다앤은 그에게 잘못을 저질렀다그를 버렸고 실망시켰다그 과정에서 앤은 나약한 면을 보여주었고그의 단호하고 자존심 센 기질로는 이를 견뎌낼 수 없었다앤은 다른 사람들의 뜻에 따라 그를 포기했다설득에 쉽게 넘어간 탓이었다나약함과 비겁함의 결과였다. / 91p

 

 

이 모든 것들로 자신에 대한 그의 마음이 명백해졌고앤은 이에 크게 감동했다이 사소한 사건이 이전에 지나간 모든 일을 완결지어주는 듯했다앤은 그를 이해했다그는 앤을 용서할 수 없었다그러나 무심할 수도 없었다과거 일로 그를 원망하고 부당한 분노를 품으면서도그에게 전혀 관심 없는 척 굴면서도또 다른 이에게 마음을 붙여가고 있으면서도여전히 그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누르지 못했다예전의 감정이 아직 다 사라지지는 않은 것이다. / 136p

 

 

 

  한편시집을 갔지만 여전히 누군가가 자신을 돌봐주기를 바라는 철없는 동생 메리를 위해 동생네에서 한동안 머물게 된 앤은 오랫동안 자신을 무시해왔던 아버지와 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되자 새로운 정신적 변화에 눈을 뜨게 된다시끌벅적하지만 곁을 다정하게 내어주는 사람들가진 것을 모두 잃었지만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지 않고 작은 일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친구와의 만남불의의 사고 앞에서 차분하게 일을 순리대로 진행하고 혼란스러워하는 주변 사람들을 다독였던 일련의 경험들이 그녀를 성장하게 한다이러한 변화는 그녀에게 벽을 세워두고 있었던 웬트워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앤에게 호감을 품은 사촌 엘리엇 씨의 등장으로 이들의 관계 역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그녀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구분을 하셨어야지요이제 저를 의심하지 마세요사정이 완전히 달라졌어요저도 나이를 먹었고요예전에 설득에 넘어간 것이 저의 실수였다 해도그분의 설득은 위험이 아니라 안전을 위한 것이었음을 기억해주세요제가 설득에 넘어갔을 때는 그것이 응당 따라야 할 의무라고 생각했지만지금은 어떤 의무도 저에게 도움이 될 수 없어요오히려 저에게 무심한 남자와 결혼한다면 온갖 위험이 초래될 것이고결국 모든 의무에도 어긋나는 일이 될 거예요.” / 367p

 

 

 




 

 

 

 

  이처럼 설득은 타인에 의해 사랑을 포기한 여성이 자신의 진솔한 감정에 눈을 뜨고 성숙해져가는 과정을 담은 소설이다전작 오만과 편견이 그러했듯이 작품 역시 로맨스 소설’ 과 가정 소설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1800년대 영국 사회를 배경으로 세태 소설의 특징을 뚜렷하게 드러낸다로맨스 소설의 측면에서 보자면준남작의 딸이라는 허울 좋은 배경을 갖고 있지만 최근 가세가 기울어진 집안을 돌보며 27살이 되어버린 주인공 앤과 과거에는 보잘 것 없었지만 부와 명예를 갖춘 훌륭한 신랑감이 되어 돌아온 첫사랑 웬트워스가 재회하면서 빚어지는 미묘한 감정이 눈에 띤다이를 테면 의식하고 싶지 않아도 서로의 시선과 목소리에 저절로 반응하고야 마는 본능 같은 것이 거리를 걷다보면 행여 마주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같은 것무심하게 내뱉은 듯한 저 한 마디에서 나와 관련된 어떤 감정의 실마리를 길어 올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 같은 것에서 우리는 사랑이 발화하는 순간에 마주할 수 있는 애틋한 장면들을 엿볼 수 있다여기에 엘리엇 가의 상속자인 사촌 엘리엇 씨까지 가세하였으니삼각관계라는 꽤나 흥미진진한 스토리도 기대해볼 수 있다.

 

 

 

  반면 세태 소설의 측면에서 바라보자면, 1800년대 영국 사회를 배경으로 남성과 여성을 둘러싼 오래된 관념을 비롯해 사랑과 결혼을 둘러싼 당대의 현실이 매우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는 점이 큰 특징이다남녀 주인공의 로맨스보다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상당히 정밀하다아름다운 외모와 지위 그리고 출신이 한 개인의 절대적 평가 기준이자 그 어떤 부조리함도 납득시킬 수 있는 현실변덕스러운 성격에 자신과 가족 전체의 신분 상승을 결혼을 통해서 실현하려는 여성들딸들은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는 권리가 없는 비정상적인 사회 구조 등을 때로는 위트 있게때로는 진중한 목소리로 드러내고 있다덕분에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한 가지 합리적인 의심을 지울 수 없다만약 웬트워스가 출세해서 돌아오지 않았더라면과연 월터 엘리엇 경이 과거의 반대를 무릅쓰고 딸의 남편 자격으로 재고해보기나 했을까하고.

 

 

 

자신이 스물아홉이 되었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약간의 후회와 우려를 느끼기도 했다전과 다름없는 미모를 유지하고 있다는 데 대단히 만족하면서도위험한 나이에 다가가고 있음을 느꼈다앞으로 일이 년 내에 남작 가문에서 적절한 구애를 받을 거라는 확신만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 13p

 

 

월터 경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엘리자베스에게 실상을 솔직히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엘리자베스에게도 더 뾰족한 수는 없었다그는 자신에게 닥친 일이 부당하고 불행하다고 느꼈으며그것은 아버지 또한 마찬가지였다둘 다 자신의 품위와 타협하거나견딜 수 없을 만큼 안락을 포기하면서까지 비용을 줄이겠다는 방법은 생각할 수 없었다. / 17p

 

 

평생 여자의 변덕스러움에 대한 내용이 없는 책은 펼쳐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노래와 속담도 전부 다 여자의 변덕에 대한 이야기뿐입니다하지만 아마 당신은 그런 것은 다 남자들이 이야기뿐입니다하지만 아마 당신은 그런 것은 다 남자들이 쓴 내용이라고 하시겠지요.”

아마 그럴 거예요맞아요원하신다면 책에 나온 사례는 언급하지 않을게요남자들은 자기들 이야기를 할 때 우리보다 훨씬 유리했지요여자들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고펜도 그들 손에 있었으니까요책으로는 아무 것도 입증하려 하지 않겠어요.” / 350p

 

 

 



 

 

 

 

  『오만과 편견과 상당히 유사한 결을 지니고 있지만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의 남성과 여성세태를 사유하는 작가의 시선이 보다 깊어진 느낌이 든다차분하게 흘러가는 글의 구조가 자칫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겠으나생의 마지막에 이른 제인 오스틴이 담담하게 이 소설을 써내려갔을 것을 상상해보면 표지 속 이미지가 그리 낯설지 않은 게 된다특히 앤이 파혼을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레이디 러셀이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대목에서는, ‘세상을 읽어내고 편견 없이 대상을 직시할 수 있는 힘을 길러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계속 질문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그런 의미에서 보면 『설득』은 전체적으로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속에서 ‘선택과 결정 그리고 책임’의 무게를 생각해보게 한다는 점에 있어 결코 가볍지 않은 소설인 듯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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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인생 열린책들 세계문학 275
카렐 차페크 지음, 송순섭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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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의 이중성을 건드린 책!

좋은 작품은 이처럼 그저 책 속의 이야기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삶까지 함께 밀어 올릴 수 있어야 하는 것!

 

 

 

  고요하게평범한 삶을 살았다.”

  만약 나의 묘비명에 단 한 줄의 글을 새겨야 한다면 나는 이렇게 새기고 싶다. ‘라는 사람을 떠올리면 무난하고 무던하게고요하고 평범하게 살다 간 사람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해서다그럼에도 내심 당신은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노라는묘비명과는 아주 다른 말로 기억되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일 테다많지는 않지만 적지도 않은 인생을 살다보니 무난하고 평범하게 사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고특별한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지만내 삶을 반추했을 때 좀 더 반짝이는 무언가가 만져졌으면 하는 바람은 누구에게나 있지 않을까때문에 카렐 차페크의 평범한 인생이란 제목을 본 그 순간에도,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인생을 마주하리라는 상상을 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누구에게나 자신의 삶 속에서 뭔가 특이하고,

중요하고아주 극적인 면을 보고 싶어 하는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자신이 경험한 사건에 주목해 주기를 바라고,

그로써 더 많은 관심과 경탄의 대상이 되기를 기대하는가 보다. / 19p

 

 

 

서로 다른 자아그러나 하나뿐인 우리의 인생

 

 

  오랫동안 철도 공무원으로 일했던 한 남자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주변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으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세례 증명서와 거주 증명서결혼 증명서와 임명장학교 성적표를 비롯해 타계한 아내의 편지에 이르기까지단순하고 정돈된 삶을 살아온 그답게 서류는 더 이상 정돈할 게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되었다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는 갑자기 허전한 생각이 들었고어떤 중요한 것을 잊은 듯한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자신의 삶을 짧고 간결하게 기록하기로 한다.

 

 

 

나의 삶에서는 비일상적이고 극적인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내게 기억나는 것이라곤 조용하고 당연해 보이는거의 기계적인 세월의 흐름이며내게 다가올 마지막 순간까지도 다른 시간들과 마찬가지로 별로 극적이지 못할 것이다돌이켜 볼 때내 뒤에 놓인 직선적이고 분명한 길을 걸어온 것이 기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그 길은 잘 닦인 대로처럼 아름다웠고그 길 위에서는 방황할 일이 없었다. / 19p

 

 

 

  참으로 평범하다면 평범한 삶이었다소목장이의 아들인 는 아무도 오르지 못하는 목재 더미 위에 올라가 종종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곤 했던 꼬마 아이였다아버지는 강인하고 단순하지만 통장에 든 노동의 결과를 셈하며 검소하게 사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분이었고어머니는 예민하고 감성적이며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넘쳐흐르던 분이었다마을 아이들 가운데 소목장이 아들은 별로 두드러지지 못했기 때문에 곧잘 무시를 당하는 편이었지만학교에서는 조용하고 부지런한 모범생으로 선생님께 인정받는 아이였다. 1등을 빼앗기지 않는 데서 인생의 의미를 찾은 그는 공부벌레가 되었고프라하의 김나지움으로 진학해 마을을 떠난다.

 

 

 

  하지만 젊음이란 자고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원하고 가질 수 없으면 화를 내는 존재였던가. 8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는 시를 쓰고 장황하기 그지없는 토론을 벌이거나 이성 경험을 남자의 가장 자랑스러운 트로피로 여기며 혼란과 방황으로 점철된 시간을 보낸다훗날 아버지로부터 끔찍한 모욕을 들은 그는 철도청 하급 공무원에 지원하고그곳에서 오래된 황실 시종 집안 출신의 아내를 만나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하며 이른 나이에 역장이 된다그 사이 전쟁을 치러야했지만 뒤로는 체코인 동포를 돕는 영웅적인 행동을 하면서도 역장 일을 훌륭하게 해내며철도청 공무원으로서 말년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정상적이고 평범한 삶을 살았노라 담담하게 술회한다.

 

 

 

그러나 학교는 아이의 삶에서 또 다른 새롭고 커다란 경험을 의미했다그곳에서 아이는 처음으로 인생의 위계질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그 전에도 아이가 누구에게든 복종해야 했던 것은 다를 바 없었다어머니는 명령을 했지만 자기편이었다어머니는 요리를 해주었고입을 맞추며 머리도 쓰다듬어 주었다아버지는 때때로 화를 냈지만여느 때에는 아버지의 무릎에 올라앉거나 그의 두툼한 손가락을 붙잡을 수 있었다다른 어른들이 가끔 호통을 치거나 욕을 하더라도 대수롭지 않았고달아나면 그만이었다하지만 선생님은 달랐다그는 오로지 주의를 주고 명령하기 위해 존재했다달아나 어디론가 숨을 곳이 없었고그저 면박이나 창피를 당할까 두려울 뿐이었다. (이제 모든 세계는 두 개의 계층으로 구분되었다보다 높은 세계에는 선생님과 신부님그리고 그들과 교제하는 약제사의사행정관과 판사가 속했다그리고 아버지들과 그들의 아이들이 속하는 평범한 세계가 있었다. / 34p

 

 

인생은 아이의 상태에서 서서히그리고 눈에 띄지 않게 남자가 되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갑자기 아이에게서 놀랍게도 완성되고 성숙한 인간의 면모가 나타난다그러한 면모는 서로 들어맞지도 조직적이지도 않으며아이의 내면에서 연관성이나 논리성없이 상충되어 거의 광기처럼 나타난다다행히도 우리 어른들은 이 상태를 사려 깊게 관조하는 데 익숙하며인생을 대단히 심각하게 여기기 시작하는 소년들에게 그 시기는 지나가는 것이라며 위안을 준다. / 57p

 

 

땅거미가 내려앉아 공부를 계속하기엔 너무 어두워졌고열린 창으로 병영의 소등 신호가 들릴 때면나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창가에 서서 너무나 아름다우면서도 절망적인 그리움에 숨 막혀 했다대체 무슨 까닭일까그것은 이름이 없고 매우 광활하고 깊은 느낌이어서사방에서 내성적인 나를 괴롭히던 모든 사소한 모욕감굴욕감패배감실망감의 예리한 바늘들이 그 안에 용해되었다그래이것은 고통과 사랑으로 넘치던 어머니의 모습이었다억척스럽게 몰두하는 모습은 아버지였고한없이 서정적이고 부드러운 모습은 어머니였다내 소년기의 좁은 가슴에 이 두 가지의 모습은 어떻게 합쳐지고 조화를 이루었을까? / 61p

 

 

남자에게는 자신의 일을 몰두할 수 있는 곳이 가정처럼 느껴지는 법이다. / 116p

 

 

 

  이렇듯 질서정연하게 정돈된 듯한 그의 평범한 인생이 다소 심심하게 읽힐 즈음갑작스러운 심장 발작과 함께 그에게 온전한 진실을 촉구하는 내면의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이때부터 아주 사소한 일화처럼 다뤘던 그의 기억들이가벼운 일탈처럼 치부하고 지나쳤던 사건들이내면에 깊숙이 감추어 놓고 힘껏 줄행랑 쳤던 진짜 이야기들이 하나씩 새로운 목소리를 내며 선명히 드러난다그러면서 평범하고 행복한 사람으로서의 나출세를 위해 몸부림치는 억척이우울증 환자로 대표되는 세 개의 자아가 서로 뒤섞이다 때로는 이 삶이때로는 다시 저 삶이 두각을 드러내며 생애의 대부분을 지배했음을 자각하게 된다뿐만 아니라 낭만적인 자아영웅적인 자아시인 등 평범하고 단일해 보였던 하나의 삶에 숨겨져 있던 또 다른 자아들이 이따금 출몰하기도 했으니 이 모든 자아들의 총합이 바로 그 자신이었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처럼 그 시에는 많은 것들이신기하고 소위 인광을 발하면서 작열하는 것들이 들어 있었음에 틀림없다시가 훌륭한가 형편없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그 시 속에 들어 있는 사물들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한때 코코넛 야자나무와 이상하고 인광을 발하면서 작열하던 무언가가 들어 있던 삶이 있었다여기 그 삶이 있으니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라고넌 네 인생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 야자나무를 어디론가서랍 속 같은 곳에다 감춰 방해가 되지 않게눈에 띄지 않게 하려 했었지? / 170p

 

 

내 경우를 들어 보자나는 전혀 유별난 사람이 아니다나의 삶은 끊임없이 뒤엉킨 몇 개의 운명들로 이루어졌다한 번은 이 운명이한 번은 저 운명이 지배적이었다그 후로는 그리 지속적이지 못하고전체 삶을 비추어 볼 때 그저 바다에 드문드문 나타나는 섬이나 에피소드처럼 보이는 몇몇 운명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때의 내가 이 운명들 가운데 어떤 것이었거나이 인물들 가운데 누구였든 간에 나는 항상 나였고이 나는 늘 동일한 사람이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는 존재였다. / 214p

 

 

내 경우에는평범한 인간과 억척이와 우울증 환자가 서로 연합하여 나의 자아를 나누어 가졌다그들은 서로 조절해 가며 내 생애의 대부분을 지배했다그들은 서로 조절해 가며 내 생애의 대부분을 지배했다때로는 억척이가 실망을 하고때로는 평범한 인간이 자신의 선한 심성 때문에나 당황한 나머지 양보를 하고또 때로는 우울증 환자가 의지가 박약하여 낙심하는 때가 있었다그럴 때 나의 왕기는 잠시 다른 자의 손으로 넘어갔다평범한 인간이 가장 강하고 지속적이었고지독한 일벌레였으므로가장 빈번하고 오랜 기간 나의 자아였다. / 217p

 

 

 




 

 

 

 

  이제 그는 라는 객체 속에 또 다른 객체의 존재들까지 인식하기에 이른다아버지와 어머니아버지의 아버지 또는 어머니의 어머니 나아가 세대를 거쳐 끊임없이 이어져 오는 우리의 선조들까지어떤 모습으로든 그들이 내 안에 존재하고 있고내 자아들 중 누군가가 그들의 모습을 닮았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그러다 마침내 그는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내가 관계 맺을 가능성을 갖고 있던 사람들내가 겪어보지 못한 또 다른 삶의 가능성에 이르기까지그 무수한 가능성의 집합이 곧 일지도 모른다는 거대한 인식의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내 안의 목소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똑같은 사람들이다네가 누구든 너는 나의 무수히 많은 자아이다네가 악인이든 선인이든그건 내 속에도 있는 거야.’ 결국 인생이란온전히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이기에 이토록 평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뒤지는 일을 하라는 게 아니야그건 아무 곳으로도 이끌지 못해다른 모든 사람들도그들이 누구이건 간에너와 같은 집합이라는 걸 모르겠나너는 그들과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보기만 해그들의 삶 또한 네 속에 있는 무수히 많은 가능한 삶들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너도 다른 사람처럼 신사나 거지허리춤까지 옷을 벗어젖힌 날품팔이꾼이 될 수 있었다너도 냄비 장수빵집 주인또는 얼굴 전체에 잼을 묻히는 아홉 아이의 아버지가 될 수 있는 것이다그 모든 것이 너이다네 속에 그런 다양성이 있으니까. / 238p

 

 

그것이 진정하고 평범한 인생이며가장 평범한 인생이다내 것이 아닌 우리의 삶우리 모두의 광대한 생명 말이다우리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면 우리 모두는 평범한 사람들이다평범하면서도 그것은 축복이다. / 240p

 

 

 



 

 

 

 

  이처럼 평범한 인생은 죽음을 앞두고 이미 알고 있거나 잊고 있었던혹은 편집되었던 여러 자아와 조우함으로써 진정으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되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인생은 여러 상이하고 가능한 삶들의 집합이라는 인식을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은 온전히 자기 혼자만의 것이 아니며내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고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을 이해할수록 자신의 삶도 완성될 거라는 깨달음을 전한다인생이란 어느 역에나 멈춰 서는 아주 평범한 완행열차 같은 것그 역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이 곧 나이며 마지막 종착역까지 그들과 함께 가는 것임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무엇보다 한 남자의 개별적인 기억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지만 장면 하나하나마다 나의 기억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이 특별한 독서 경험이야말로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다아버지와 어머니로 이루어진 세계 속에 머물러 있던 유년 시절을 지나 위계질서와 서열로 구분되는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젊음이라는 객기와 광기의 시대에서 명예와 성취욕안정으로 이어지는 삶의 여러 단계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내 삶의 한 장면 한 장면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이었다이를 테면 내 인생 최초였으나 결코 아름답지 않았던 로맨스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수치스러운 경험들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내 안의 진솔한 목소리를 마주하게 된다그것은 곧 평범의 이중성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내 삶 속에서 뭔가 특이하고중요하고아주 극적인 면을 보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으면서도 기억을 왜곡하고 때로는 인생을 편집하기도 함으로써 또한 여느 보통의그럭저럭 괜찮은 삶이기를 포장하곤 하는 나를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건 정말 엄청난 경험이었지……

난 네가 그런 경험을 어떻게 너의 삶에서 지울 수 있는지 모르겠다. / 183p

 

 

 

  ‘토마스 만이 극찬하고 밀란 쿤데라에게 영향을 준 20세기 최고의 이야기꾼이라는 수식어가 전혀 놀랍지 않을 만큼 걸작 중에 걸작이다감히 내 인생책이라 말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인상 깊게 읽은 작품이다중반부까지는 다소 심심하게 읽히는 듯하지만 이 책의 진가는 중후반부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난다그러니 부디끝까지 다 읽어보시라 추천드린다덧붙여 이 책의 특별함은 인생 50회 차 정도쯤에는 이르러야 더 깊이 와 닿지 않을까 싶다그때가 되어서 다시 찾는다면 이 책은 또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줄까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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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죽음을 깨워 길을 물었다 - 인간성의 기원을 찾아가는 역사 수업
닐 올리버 지음, 이진옥 옮김 / 윌북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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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아름다운 역사서가 또 있을까!

내가 딛고 있는 이 땅은 수많은 누군가의 역사가 쌓아올린 땅이다!

 

 

 

 

  1985년 열여덟의 나이로 처음 고고학 발굴에 나선 이 책의 저자 닐 올리버는 당시 발굴 책임자로부터 한 장의 평면도를 건네받았다흩어진 석기 파편들이 그려진 그 그림은 우주 한가운데 있는 소행성 군단을 찍은 사진처럼 보였다토머스는 평면도의 중심에 있는 두 쌍의 빈 공간을 가리켰다맥주잔 받침 크기 정도 되는 한 쌍의 원형 아래로 그보다 작은 두 개의 원형이 보였다토머스는 이렇게 말했다. “바로 여기가 부싯돌로 석기를 만든 사람이 무릎을 꿇고 앉았던 자리라네위쪽에 있는 큰 두 개의 원은 두 무릎이 닿은 공간이고그 뒤의 작은 원 두 개는 발끝이 놓였던 자리지.” 토머스의 말은 당시의 닐은 물론이 책을 읽고 있던 내 마음까지 전율하게 만들었다수천 년 전바로 그곳에서 누군가 무릎을 꿇고 앉아서 묵묵히 자신의 노동을 해냈던 이의 모습이 이 흔적 하나로 생생하게 살아나는 느낌이었다동시에 나는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뒤나를 전혀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내가 잠시 머물렀던 자리를 발견하고그 흔적이 나의 존재를 증언할 수 있다면 그건 무척이나 놀랍고도 감동적인 일이 아니겠는가하고.

 

 

 

  무덤건축물예술품 등 어떤 것들은 공들여 제작되어 특정한 자리에 배치되고어떤 것들은 버려지거나 우연히 사라진다평면도 속의 자리처럼 무심코 남겨진 무언가도 있다누구에게 보이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으나 수천 년이 지난 후 누군가에게 발견되어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게 될 수 있고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는 사소한 행동이나 몸짓도 미래의 어떤 시간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의미가 될 수 있는 법이다닐은 고고학의 매력이란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고 말한다유물유적과 같은 과거의 흔적을 발견하는 일이란그저 과거 시대의 전유물을 찾는 일이 아니라 인간성의 깊은 근원지를 발견하는 일과 같다고 말이다잠자고 있던 죽음에 목소리를 불어넣어 오늘과 미래의 길을 묻고자 하는 이 놀라운 여정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끝없는 경이로움을 선사한다고고학자이지만 탁월한 스토리텔러이자 음유시인인 저자의 시선을 통해 살고사랑하고생과 이별했던 무수한 옛사람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한 편의 위대한 신화를 읽은 듯한 느낌이 든다아마도 이 책을 읽은 이들이라면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이토록 아름다운 역사서가 또 있었을까.

 

 

 

오래된 기억 속에서 길어 올린 놀랍도록 아름다운 인류의 지혜

 

 

  닐 올리버는 유물과 유적은 인간의 본질적인 감정의 기원에 관해서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고대의 선조들이 남긴 돌과 뼈에는 그들이 느꼈던 이런저런 감정들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아주 먼 고대문자 이전의 세계이야기가 기록되고 보관되기 전에 살던 이들이 무엇을 생각했는지 현재의 우리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그들도 우리와 같은 정소를 지니고 있었고 똑같은 희로애락을 느꼈다는 것을 우리는 그들이 남긴 흔적을 통해 알 수 있다비록 그들이 그들의 세계에서 느꼈던 것들을 우리는 우리의 세계에서 느끼고 있지만수만 년 동안 변하지 않은 무언가가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감각할 수 있다.

 

 

 

  1978년 탄자니아의 라에톨리에서 발견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의 발자국 화석은 360만 년 전 우리의 먼 조상이 직립보행을 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발자국의 주인공은 성인 둘과 아이 하나였다아마도 단출한 가족이었으리라 추측된다이를 발견한 메리 리키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이렇게 썼다고 한다. “누구라도 분간할 수 있듯이여자는 한순간 멈춰 서서 왼쪽으로 몸을 돌렸고 잠시 위험이나 이상이 있는지 살폈다그러고나서 다시 북쪽으로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이 움직임너무나 강렬하고도 인간적인 이 움직임은 시간을 초월한다. 360만 년 전당신 또는 나의 먼 조상이 의심의 순간을 경험한 것이다.” 그 오랜 옛날어느 가족의 아주 사적인 걸음 하나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인류의 위대한 감정을 발견할 수 있다가장 든든한 나의 울타리가족자식의 안전을 늘 염려하는 엄마의 모성 그리고 본능을.

 

 

 

그의 살갗이 닿았던 곳에 나의 살갗이 닿았다그들이 그곳을 걸었던 시간과 내가 그곳에 도착한 시간 사이에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온갖 일들이 일어났다그러나 그 순간 그곳에 우리는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 34p

 

 

차탈 후유크의 집들은 폐소공포증을 유발할 정도로 빽빽이 모여 있다적게는 3000명에서 많게는 80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거의 질식할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 살았다죽은 자도 예외가 아니었다그들은 시신을 번데기처럼 끈으로 돌돌 감싸서 태아처럼 구부린 자세로 집 아래에 묻었다한 집 아래에서 무려 64구의 사람 뼈가 발견되기도 했다똥오줌을 포함한 쓰레기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거대한 두엄더미에 차곡차곡 모았다인간들이 집단으로 만들어낸 탁한 기운이 마을을 꽁꽁 에워쌌다그들은 그 어떤 것도 떠나보내지 못하는 저장강박증 환자들이었다. / 52p

 

 

나는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 잘 알고 있다나는 유한하고 불완전할지라도 이곳 지구를살과 뼈를 선택할 것이다나는 이 오래된 바위에 마음을 기댄다우리 조상들이 그들을 둘러싼 세상과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의지했던 바로 그 바위 말이다바위는 늘 그곳에 있었고어떤 형태로든 영원히 남을 것이다우리에게 영혼이라고 부를만한 어떤 본질이 있는걸까바위에는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에너지와 물질로 이루어진 무늬가 새겨져 있다땅을 밀고 솟아나 깎이고 닳아서 바다로 씻겨 내려갔다가 되돌아오는 것돌과의 연결돌에 대한 믿음그것이 내게 필요한 유일한 불멸이다. / 64p

 

 

 




 

 

 

 

  이따금 나는 상상한다아프리카로부터 파생된현생 인류라 일컫는 호모 사피엔스가 전 지구상에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난 게 아니라면 그 이전에 살고 있었던 종들과 마주쳤을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하고. 1994년부터 1998년 사이에 독일 니더작센에 있는 쇠닝겐 유적에서 나무로 만든 창들이 발견되었다가늘고 맵시 있는 이 창은 10미터 이상을 날아가 사냥감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는데이 도구의 제작자는 네안데르탈인이었다이러한 도구를 만들고 사용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섬세하게 소통할 수 있었고 크고 위험한 먹잇감을 잡기 위해 계획을 세우며 그에 대비해 자신을 무장할 수 있었다는 것을 뜻하며그들이 우리의 생각보다 더 현대적이며 지혜로웠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이에 저자는 네안데르탈인이 둔하고 멍청하여 호모 사피엔스에게 쉽사리 쫓겨났을 거라는 과거의 상상은 잊어버려야 한다고 말한다그들은 수천 년 동안 유럽이라는 사냥터를 잘 관리하며 유지해온 이들이었고심지어 두 종은 짝짓기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비록 두 종의 만남 이후 수천 년 뒤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했다하지만 유럽인 중 많게는 4퍼센트가 여전히 네안데르탈인의 DNA를 지니고 있다고 하니이토록 오랫동안 메아리를 울리며 살아남는 유전자의 힘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거의 200만 년 전이라니가늠조차 어려운 시간이다한곳에서 발견되었으나 서로 다른 생김새를 지닌 이 다섯 개체의 화석은 과학계 일대에 충격과 논란을 불러왔다전에는 아프리카에서 호미닌의 두개골이 발견되면 기존에 알려져 잇던 화석과 비교하여 아주 작은 차이만 있어도 새로운 종으로 명명하고는 했다따라서 고인류 종은 계속 늘어났다호모 에르가스터호모 가우텐겐시스호모 하빌리스호모 루돌펜시스… 그런데 드마니시에서 각양각색의 생김새를 지녔으며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인류 화석 다섯 개체 분이 발견된 것이다이는 생김새가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다른 종이 아니며이들 모두가 하나의 종즉 호모 에렉투스(곧선사람)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했다. / 118p

 

 

인간은 수천 년 동안 이야기를 만들고 기억하고 전해왔다우리 종에게 언제 의식이 생겼는지 알 수 없으므로 가장 오래된 이야기가 무엇인지도 알 길이 없다그러나 이야기와 뜻이 있기 전에 움직임(행동)이 있었다우리의 첫 조상들은 의식이라는 것이 생기기 전에 그저 걸었고 창조했고 살고 죽었다이 모든 것을 이해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아주 오랜 역사 속에서 차이를 만들어낸 것은 다만 움직임심지어 무의식적인 움직임이었다최근에서야 우리는 행동과 몸짓오고 가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만들어냈다우리에게 단어와 이야기는 필수적이지만때로 행동은 때로 우리가 말하는 어떤 이야기들보다 더 중요하다. / 297p

 

 

 




 

 

 

 

  여기다른 두 장소에서 발견된 유골은 우리에게 너무도 상반된 사연을 전한다하나는 덴마크 코펜하겐 북쪽의 베드베크 공동묘지에서 발견된 중석기시대의 무덤이다. 18세 정도로 추정되는 여성과 성별을 알 수 없는 영아가 나란히 누워 있다아마도 둘은 출산 중에 죽음의 강으로 휩쓸려 간 듯하다신비스럽게도 아기의 몸은 백조의 깃털 위에 놓여 있다수천 년 전 조상들은 영혼이 백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고 상상했다 한다남겨진 사람들은 백조의 날개가 아기의 영혼을 저 높은 곳으로하늘나라로 데려가기를 바랐을 것이다비록 두 아름다운 삶은 죽음이라는 가혹한 운명을 맞았지만이토록 다정한 방식으로 다뤄질 수 있었던 것은 떠나보낸 사람들의 애통한 마음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마음이 뭉클해진다.

 

 

 

  한편페루 북부 해안의 우앙차키토라는 마을에서 심장이 도려내진 채 파묻힌 어린아이들의 유골 140구와 새끼 라마들의 뼈는 우리에게 큰 충격을 준다이들이 죽음을 맞이한 시기는 10~15세기경페루 북부 지역에서 치무 왕국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로 추정된다아이러니하게도 뼈 전문가들은 아이들이 죽기 전까지 건강했고충분한 영양분을 섭취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또 무덤 근처에서는 일렬로 선 발자국들이 발견되었다어린이들이 차례로 줄을 서서 살해 장소로 걸어 들어갔음을 보여주는 흔적이다아이들의 두개골과 뼈에는 붉은 안료가 묻어 있었는데죽음 직전 혹은 직후에 얼굴과 몸에 문질러 바른 것으로 보인다다시 말하자면 대규모 희생 제의의 일면을 보여주는 유적으로잔혹한 인명 경시와 죽음에 대한 집착에 뿌리를 둔 비정한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저자는 말한다사랑이 깊은 땅속에서도 살아남았듯 악의 증거도 그러하다고이데올로기란 무엇인지대체 어떤 이념이 이 끔찍한 악취도 견디게 할 수 있게 하는 것인지 우리도 스스로에게 물어볼 일이다.

 

 

 

기나긴 겨울밤

늑대들이 먹이를 찾아 얕은 계곡으로 내려올 때면

창백한 달빛이나 희미하게 명멸하는 북극광 아래

무리의 선두에 서서 달리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동족들보다 훨씬 높이 도약하고

가슴 깊숙이에서 터져 나오는 우렁찬 원시의 노래,

늑대족의 노래를 울부짖는 그의 모습을.

잭 런던야성의 부름

 

 

 

  36개의 유물과 유적이 남긴 인류의 사연을 따뜻하고 깊이 있는 시선으로 통찰한 닐 올리버의 잠자는 죽음을 깨워 길을 물었다는 우리에게 고고학의 신비와 인간성의 위대한 지혜를 생생하게 보여준다기억과 흔적은 이토록 오래 살아남아 우리로 하여금 생의 가치를 일깨우지만과거의 모든 존재와 사물들이 언제까지나 그대로 있을 거라는 생각은 경계해야 한다는 메시지도 잊지 않는다내가 딛고 있는 이 땅은 수많은 누군가의 역사가 쌓아올린 땅이다함부로 연약해지지 말고함부로 나를 대하지도 말자내가 지나온 시간들이 어디에 어떻게 새겨질지 모를 일이다역사는 바로 이 가르침을 잊지 않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배워야 할 가장 위대한 보물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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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살게 하는 것들 - 회복과 충전, 다시 잘 살고 싶을 때 읽는 김창옥의 제안서
김창옥 지음 / 수오서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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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없이 걱정과 불안이 반복된다면사는 게 점점 재미가 없다면,

행복을 좇고 있지만 정작 행복한 적이 없다면 이 책을 추천합니다!

 

 

 

  지난 해, SBS TV프로그램 <집사부일체>에서 김창옥 편을 방영한 적 있다일명 소통령이라 불릴 만큼 소통 전문가로 잘 알려진 그이기에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매우 궁금했다마침 제주살이를 하고 있던 그는 뜻밖에도 소박한 차림으로 진행자들을 맞이했다평소 방송을 통해서 본 그는 깔끔한 정장 차림젠틀한 외모로 화려한 입담을 자랑하는 그였기에 수수해보이는 그의 모습은 다소 의외일 정도였다.

 

 

 

  그는 제주에 와서 사는 이유에 대해 강의를 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어느 날소통에 관한 강의를 하고 있는데 한 학생이 저 사람이 행복하지는 않아 보여.”라고 한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심지어 그 누구보다도 소통에 능해 보이는 그였지만정작 청각 장애를 갖고 있던 아버지와 걷는 게 외국인과 걷는 것보다 어색할 만큼 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고 말했다소통 전문가답지 않은 뜻밖의 고백이었다대기업과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행복해지는 법’,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던 그였지만 정작 본인은 언제 행복했는지 잊고 지냈을 뿐만 아니라 가까운 가족과는 불통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소통 전문가라고 알려진 그조차도 행복을 찾고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일에 어려움을 느끼는데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어쩌면 당연한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나를 다시 살게 해야겠다.’

찾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어떻게 살고 싶지?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나는 언제 행복하지?’ / 19p

 

 

 

  언젠가 저자는 제주에서 화산토로 직접 옹기를 구워볼 기회가 생겼다고 한다흙을 푸고흙 속의 이물질을 제거하고그 흙으로 옹기를 굽는데이때 습기를 머금고 있는 옹기를 바로 가마에 넣으면 강한 온도를 견디지 못하고 깨져버리거나 녹아버린단다이를 보며 저자는 우리 인간의 삶과 옹기가 참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그도 그럴 것이 가마 속 뜨거운 불꽃처럼 우리는 고통고난시련과 같은 어려운 시기를 맞으면서 단단해진다하지만 우리 마음에 상처열등감비뚤어진 마음우울건강하지 못한 자존심 등 온갖 습한 마음들이 자리 잡고 있으면 강한 불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깨지고 찢기고 터지고 만다습한 마음을 볕 좋은 양지에서 잘 말리지 않으면 이전에는 견딜 수 있었던 온도에도 쉽게 깨질 수 있다.

 

 

 

  이에 저자는 내가 어느 선까지 버틸 수 있는지어느 선까지 괜찮은지 내 한계선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안전한 상태와 위험한 상태를 감지할 수 있는 체크포인트를 두고 중간중간 나의 한계선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혹여 당장 나아지고 치유되지 않는다 하더라도조금 더 힘겨운 상황이 지속되더라도 스스로를 기다려주는 시간을 가지면서 말이다그렇게 나를 둘러싼 열기가 차차 사그라들기를 기다리다 보면 어느새 더 튼튼하고 견고해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살면서 한 번도 깨어지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한 번도 찢어지지 않은 마음이 과연 있을까요? / 35p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제주살이를 하기 시작하면서 내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는 장소사람순간을 찾아 나섰다고 한다한번쯤 해보고 싶다고 늘 마음속으로만 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해보면서 나를 살게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내가 가치 있다고 느끼는 것을 지켜나가는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운동 시간을 지키면 운동이 나를 지켜주고건강검진을 받는 시기를 지키면 그 건강검진이 나의 생명을 지켜줄 것이며내가 지킨 친구들이 어느 시기가 오면 나를 지켜주듯내가 지켜온 삶의 가치관과 삶이 자세가 나를 평생토록 지켜줄 것이라고 말이다.

 

 

 

당신의 커피는 무엇인가요?

당신의 숨을 편안하게 하고,

당신을 쉬게 하는 무언가가 존재하나요?

그런 장소그런 사람그런 일이 존재하나요?

삶은 정답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입니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어떤 의지를 갖고 어떤 감정을 지닌 채

살아갈 것인지 우리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당신만의 커피를 찾게 되기를 바랍니다. / 46p

 

 

숫자에 연연하지 않는 방법을 찾기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마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우리는 점점 더 많은 숫자 속에서 살아가게 될 테니까요그럼에도 어떤 숫자 속에 있건 너무 마음 졸이며 숫자에만 얽매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숫자에 우리 삶을 저당잡히 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하려는 일이 내 뜻대로 잘 안 되면그건 그것대로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시간이라고다른 즐거운 일을 찾아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 99p

 

 

 




 

 

 

 

  지난해부터 올해 초까지독서지도사 자격증을 준비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오랜만에 새로운 일을 향한 도전으로 설레었다그런데 연이은 환절기 감기로 둘째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다 말다를 반복하고곧 있으면 첫째 아이의 기나긴 여름방학이 시작되니 막상 자격증을 땄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더 중요한 건 자격증을 땄다고 해서 내가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을 만한 자격이 아직은 충분치 않다는 게 문제였다그렇게 망설이고만 있는 나를 보며 함께 독서모임을 하는 지인은 이렇게 말했다완벽해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일단 시작부터 하라고초보자부터책을 읽고 싶지만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르거나 글을 쓰고 싶지만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먼저 시작해보라고그러고 보니 나는 이런저런 안 될 가능성부터 타진하느라 시작을 주저하고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느라 늘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었다.

 

 

 

  나처럼 시작을 두려워하고 있는 이들에게 책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두려워하면서 하라크게 하려고 하지 마라완벽하게 하려고 하지 마라작게 시작하라실수하면서 하라.” 힘들지만 두려울 때 두려워하면서 해야 한다고두렵지 않고 어떤 일을 하는 것을 기대하지 말라고어느 권투선수가 어떻게 한 대도 안 맞고 경기에서 이길 수 있겠느냐고어느 축구선수가 공을 한 번도 뺏기지 않고 앞으로만 계속 달릴 수 있겠느냐고나 역시 한 대도 맞지 않고 권투에서 이기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고공을 단 한 번도 놓치지 않고 골을 넣어보려 했던 사람이었다. “한 대도 안 맞고 이길 수 없다.” 이 말을 가슴 속에 새기며 두려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지금의 나에게 그 무엇보다도 절실하고도 중요한 메시지가 아닐까.

 

 

 

말하면 그 말을 가장 많이 듣는 사람이 자기 자신입니다누군가에게 알리기 위해서라기보다 내가 듣기 위해서 그 말을 계속하세요그 말을 계속 듣다 보면 점차 길이 나서 항상 가던 쪽에서 삶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합니다눈길이 자꾸 닿고발걸음이 가고내 말이 약속이 되어 스스로 지키기 시작해요어느새 그 지점에 이르러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그렇게 볼 때 사실 마법’ 맞습니다. / 57p

 

 

당신도 지금 작은 나무를 심었을 수 있습니다취업이라는 묘목을 심었을 수도결혼이라는 묘목을 심었을 수도자녀교육이라는 묘목을 심었을 수도사업이라는 묘목을 심었을 수도 있습니다조급해하지 말고 1, 2년은 작은 열매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다 따서 버릴 수 있는 담대함과 지혜를 발휘하십시오조급함도작은 성취에 취함도 없이지금 우리에겐 묵묵함이 필요합니다대신 우리의 일에우리 마음의 나무에 힘을 주는 일을 합시다그리고 5, 7년이 지나 탐스러운 열매가 삶에 맺히게 되면 그때 달고 귀한 열매를 맛보자고요. / 106p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용서받아보지 못한 사람은누군가 나를 속이려 하거나 실수를 저질렀을 때 그의 허물을 오히려 들춰내고탓하며그의 과오를 비웃습니다많은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기도 하죠내가 용서받아본 적 없으니까누군가 나의 허물을 덮어준 적 없으니까똑같이 그렇게 합니다.

반대로 내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상대방을 위해 실수와 흠집을 눈감아줄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단 한 순간이라도 본인이 따뜻하게 위로받았거나 용서받아본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부모님이나 선생님또는 친구였을 수도 있겠죠헐벗은 것같이 춥고 시리고 부끄러울 때 누군가 따뜻한 담요를 덮어주었던 순간이 삶에 있었던 것이지요. / 228p

 

 

 




 

 

 

 

  이처럼 나를 살게 하는 것들에는 나만의 속도로나만의 기준에 따라나만의 호흡으로좋은 만남을 통해 한 사람 한 사람의 우주를 사랑하고 배우면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인생의 귀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그저 좋은 글귀만 나열되어 있는 여느 자기계발서와 달리 저자가 스스로 삶을 재정비하며 경험한 것들에서 비롯된 깨달음이었기에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덕분에 변화하고 싶은데 선뜻 나서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인지나만의 호흡법에 따라 살아가는 방법이란 무엇인지 배울 수 있어 의미 있는 독서였다이유 없이 걱정과 불안이 반복된다면사는 게 점점 재미가 없다면행복을 좇고 있지만 정작 행복한 적이 없었던 이들이라면 꼭 이 책을 읽어보시길 추천드린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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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끝
미나토 가나에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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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일 거라는 기대감 한 스푼만 덜어내고 나면 따뜻한 감동과 공감 어린 이야기로 마음이 뭉클해진다!

모든 이야기의 끝은 작가가 정해놓은 엔딩이 아니라 읽는 이’ 즉 를 통해야만 비로소 완전해지는 것!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주인공인 에미는 작은 산간 마을에 살고 있다. ‘베이커리 라벤더라는 이름의 빵집을 운영하고 있는 부모님이 종일 바쁜 탓에 마을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에미는 그저 멀거니 산 너머 세상을 상상하며 시간을 보내곤 한다어느 날메이는 친구 미치요로부터 소설을 써 보라는 권유를 받는다이왕이면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이야기를 읽고 싶다는 미치요의 말에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한 에미는 재미있게 읽어주는 미치요 덕분에 점차 글을 쓰는 즐거움에 빠져든다하지만 미치요가 전학을 가게 되고중학교 2학년이 되자 빵집 일까지 도와주어야 했던 에미는 점차 이야기의 세계에 몰두하기 어려워진다그러던 와중 빵집에 자주 오는 손님인 햄 씨(햄 샌드위치와 햄 롤을 사 가기 때문에)와 추리소설책을 주고받으면서 가까워지고그의 제안으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던 산 너머 마을로 다녀오게 된다덕분에 보다 넓은 곳에서 학교를 다니며 문예부에 들고 싶다는 꿈을 꾸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가까운 고등학교로 진학하고 만다.

 

 

 

  이후 햄 씨는 에미와 교제를 약속한 뒤 훗카이도 대학에 합격해 마을을 떠나고그 사이 에미는 잊고 있었던 새로운 추리소설을 써보기로 한다때마침 전학을 갔던 미치요가 당대의 유명한 추리소설가 마쓰키 류세이의 제자가 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에미의 안부를 물어온다에미의 새로운 소설을 읽고 싶었던 미치요는 에미가 보내 준 소설을 읽고 이를 마쓰키 류세이에게 보여준다마쓰키 류세이는 에미의 재능을 인정해 제자로 삼을 테니 도쿄로 오라고 제안한다에미는 꿈에 그리던 마쓰키 류세이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뜨지만 이미 햄 씨와 약혼한 신세였고여자관계가 난잡하기로 소문난 마쓰키 류세이에게 보낼 수 없다는 햄 씨의 반대에 좌절한다그렇게 부모님으로부터 빵집을 물려받고 햄 씨의 아내로 살아가는 수순으로 정해지려는 찰나이대로 꿈을 저버릴 수 없다고 생각한 에미는 마침내 역으로 향한다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약혼자 햄 씨가 와 있다…….

 

 

 

내가 만약소설을 완결시킨다면?

 

 

  미나토 가나에의 신작 이야기의 끝은 정해진 수순의 삶에서 벗어나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고픈 한 산골 소녀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부모님과 약혼자의 만류를 뒤로한 채 당대 유명 추리 소설가 마쓰키 류세이의 제자가 되기 위해 역으로 향하지만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약혼자가 그녀 앞에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그러면서 작가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 이야기에 다음은 없다결말은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고 해야 할까.’ 이 때문에 독자는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이게 끝이라고? 48페이지에 이르는 짤막한 이야기는 정말 이렇게 끝이 나는 건가그래서 에미는 어찌되는데부모와 약혼자의 뜻을 꺾지 못하고 고향에 주저앉게 되는 건가혹시나 다음 이야기에서 이 이야기가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페이지를 넘겨보지만 전혀 다른 시대다른 공간새로운 인물의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마음이 뒤숭숭해진다.

 

 

 

  분명 이런 기분언젠가 느껴본 적이 있는데이야기의 끝을 읽어나가며 나는 어떤 기시감 같은 것을 느끼곤 했다그러면서 책장을 쭉 훑어보던 나는 어느 책을 발견한 순간무릎을 탁 치고 말았다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란 책 때문이었다일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최고의 추리 소설가라 평가 받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신작인 만큼 당연히 냉혹한 살인으로 점철된 이야기를 기대하면서 구입한 책이었다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책에는 그동안 그가 그려왔던 작품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뭉클한 감동을 동반한 기묘하고 따뜻한 이야기라는 반전이 담겨 있었다미스터리 소설의 순한맛이라고 해야 할까미나토 가나에의 이야기의 끝도 분명 그러했다추리 소설을 좋아하지만 이 작가의 작품은 미처 읽어보지 못했기에이번만큼은 그 명성을 제대로 느껴보리라 마음먹었던 나로서는 한 방 먹은 기분이랄까.

 

 

 

  하지만 이 소설마치 조각조각 잘려나간 이야기가 한 데로 모여 들어 어느 새 커다란 이야기로 완성되는 구성이 기대하던 추리 소설은 아니지만 색다른 미스터리를 선사한다꿈과 현실 사이의 괴리 속에서 고민하는 각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각자 처한 상황에 맞게 에미의 이야기를 완성해가는 여정은결국 모든 이야기의 끝은 작가가 정해놓은 엔딩이 아니라 읽는 이’ 즉 를 통해야만 비로소 완전해지는 것이라고 소설은 말하는 듯하다.

 

 

 

가끔 그렇게 먼 곳을 보는데 뭘 보는 거야?”

산 너무 세계요가보고 싶지만 안 되니까 상상만 하는 거예요.” / 20p

 

 

사실은 모에가 쓴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 읽기 시작했는데 몇 줄 읽자마자 아무래도 모에는 아닌 것 같다문체도 시대 설정도 너무 구식이다마쓰키 류세이가 살아 활약하고 있으니 지금으로부터 사오십 년 전일까그보다 이는 허구일까사실일까어느 쪽이든 내가 모르는 시대의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다만에미가 어떻게 되었을지 영 마음이 쓰인다.

에미가 나였다면류이치는 어떻게 했을까. / 73p

 

 

하지만 자네 작품에는 뭔가 딱 한 걸음 정도가 부족해구로키 선생의 그런 지적은 아마 전하지 않았으리라부족한 뭔가는 존경하는 사진작가의 조수를 하면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이제는 어묵 공장을 잇게 되었으니 그럴 기회는 사라졌고 프로가 된다는 꿈도 끝났다고 스스로 다독이고 있다.

도모코 씨가 얼마나 내 사정을 알아차렸는지는 모른다이 소설을 본인의 해석이나 의견을 더하지 않고 내게 건넨 것은 스스로 답을 찾으라는 의미일까.

내가 만약소설을 완결시킨다면……. / 128p

 

 

 



 

 

 

 

꿈을 빼앗긴다는 거어떤 기분이야?”

 

 

  에미가 하늘 저편가 닿지 못할 것 같던 산 너머의 세계를 늘 상상했듯 우리는 저마다 완성하지 못한 꿈을 생각하곤 한다소설 속의 등장인물들 역시 에미의 이야기를 통해 가족연인처한 상황친구와 같은 여러 요인으로 인해 방해 받거나 또는 좌절된 꿈들을 떠올린다사진작가가 되기를 꿈꾸지만 가업을 이어야 하는 청년자신을 항상 한심하게 바라보고 재능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남자로부터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여자가족을 위해 헌신하느라 넓은 세계에 대한 동경을 가슴 저 깊은 곳에 봉인한 채 살아온 남자… 이들은 저마다의 입장에서 완결되지 못한 에미의 뒷이야기를 완성해간다그러는 사이 각자의 삶 안에서 진정한 행복은 무엇인지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꿈은 무엇인지이제 그 꿈을 위해 나는 또 어떤 선택을 해야 할 지를 고심하게 된다. “당신도 타인의 기대에 따른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요?” 소설이 물어오는 이러한 질문에 우리 또한 대답해볼 일이다.

 

 

 

에미가 어떤 선택을 해야 행복해질지논리로 생각하지 마.

에미가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지아닌지만 생각해.

만들고 싶어서 역으로 온 것이다그렇다면 그대로 달려가 전차를 타면 그만이다그 탓에 햄 씨와 헤어져야 한다면 어쩔 수 없다하지만 햄 씨는 다케오가 아니다에미를 따라

함께 전차를 탔다가 직장인 학교에서 신는 덧신을 신은 채라는 것을 깨닫고 둘이 함께 웃으면 그만이다도쿄까지의 긴 여행 중둘이서 상의하면 된다그리고 도쿄역에 도착했을 때 햄 씨가 물으면 된다.

계속 갈래돌아갈래. / 172p

 

 

 

억지로 끌고 오면 이 아이는 평생 다른 사람 손에 꿈을 잃었다는 울분을 안고 살 것이다너 정도의 애정으로 미코의 울분을 풀 수 있을 리 없다세월이 흐르면 작아지리라 생각할지 모르나 실은 딱딱하게 굳어질 뿐이다일단 굳어진 것을 없애는 것은 어렵다이렇게 말하기는 그렇지만부모라도 그건 힘들다.

지금 눈앞에 있는 문제는 피하지 않고 직면해야 한다당당하게 맞서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사흘 밤낮이 이어져도 상관없다. / 209p

 

 

 



 

 

 

 

  추리소설일 거라는 기대감 한 스푼만 덜어내고 나면 따뜻한 감동과 공감 어린 이야기로 마음이 뭉클해지는 작품이다결이 다른 미나토 가나에의 새로운 작품을 만나보고 싶다면이 책을 추천 드린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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