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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회 ㅣ 이렌 네미롭스키 선집 1
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이상해 옮김 / 레모 / 2022년 3월
평점 :

이렌 네미롭스키라는 낯선 이름이 기억해야 할 이름으로 각인되는 순간!
날카로운 언어와 예리한 문체로 인생의 명암을 냉소적으로 그려낸 수작!
1903년 우크라이나의 부유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1942년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전쟁과 유대인 박해의 희생자가 된 이렌 네미롭스키. 아우슈비츠로 끌려갈 운명을 직감하고서도 끝까지 펜을 놓지 않았다던 그녀의 예사롭지 않은 작품 이력을 따라가다 보니, 지금에서라도 재발견되어 네 권의 선집으로 만날 수 있게 된 것이 괜스레 반갑다.
『무도회』 속에는 사랑과 욕망을 향한 헛된 욕심과 삶의 짙은 비애가 녹아 있는 네 편의 단편작들이 수록되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풍경 속에서 욕망하고 절망하고 우울했던 당대인들의 표상을 예리하게 그려낸 점이 특히 인상적이다. 여기에 자기 파괴적이고 모순된 삶의 진실과 아이러니를 날카롭게 묘파해낸 이렌 네미롭스키의 언어는 직설적이다 못해 상당히 강렬하다. 그 누구라도 책을 덮는 순간, 잔뜩 벼르고 벼른 날 선 생의 감각이란 것이 인장처럼 가슴에 와 박히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아! 내 가엾은 마르셀…, 뭘 원하니? 그게 바로 삶이야. 날것 그대로의 삶은 그런 거야.” / 「그날 밤」 중에서 139p
표제작인 「무도회」는 금융가였던 아버지와 어린 이렌을 유모에게 맡기고 자신만의 삶을 누렸던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자전적 성격의 소설이다. 1926년, 프랑화와 파운드화의 가치가 널뛰기를 하는 바람에 증권으로 큰돈을 벌어 단숨에 졸부가 된 캉프 부부는 허세와 가식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지만 이를 바라보는 딸 앙투아네트의 마음은 온통 증오로 가득하다. 상류층의 삶을 즐기는 데만 온통 몰두해있는 엄마에게 있어 딸은 늘 걸리적거리고 하찮아 보이는 존재이고, 사춘기 소녀인 앙투아네트에게 있어서 엄마는 천박한 속물성에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사건건 트집만 잡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뿐이다.
이들의 갈등은 강프 부부가 무도회를 열기로 하면서 극에 달한다. 결국 앙투아네트는 우체통에 넣어야 할 초대장을 갈기갈기 찢어 센강에다 던져버린다. 이윽고 펼쳐지는 악몽 같은 시간은 허영심과 알량한 자존심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했던 이들의 헛된 욕망에 조소와 연민의 마음을 보내는 작가의 의식이 투영된 장면으로, 기묘하고도 잔혹한 유머의 진수를 보여준다.
앙투아네트가 억지로 웃어 보였다. 비겁하고 괴로운 노력 탓에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가끔씩 죽이고 싶을 정도로, 칼로 얼굴을 그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혹은 발을 구르며 ‘아유, 정말 짜증 나!’라고 소리치고 싶을 정도로 앙투아네트는 어른들이 미웠다. / 「무도회」 중에서 11p
“앙투아네트, 혹시라도 누가 너한테 뭘 물으면 일 년 내내 남프랑스에 살았다고 말해…. 칸인지 니스인지 구체적으로 밝힐 필요는 없고, 그냥 남프랑스라고만 해…. 꼬치꼬치 캐물으면 칸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 그게 더 품격이 있으니까…. 하지만 당연히 네 아빠 말이 맞아. 입을 다무는 게 최고지. 어린 여자애는 가능한 한 어른들과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해.” / 「무도회」 중에서 16p
절대, 절대 더는 안 기다릴 거야. 이 나쁜 욕망들, 석양이 질 무렵 서로를 껴안고 걸어가는, 술에 취한 사람들처럼 살짝 비틀거리며 지나가는 두 연인을 볼 때 마음을 갉아먹는 부끄럽고 절망에 찬 시샘은 왜 이는 걸까? 열 네 살의 나이에 노처녀의 증오심을 갖다니? 언젠가는 자기 몫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멀었다. 결코 오지 않을 것처럼. 그때까지는 굴욕적이고 답답한 생활과 레슨, 엄격한 규율을 소리나 빽빽 질러대는 엄마…. / 「무도회」 중에서 33p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다른 젊은 여자」와 「로즈 씨 이야기」는 전쟁이라는 비극 속에서 삶의 진정성을 엿보게 하는 작품들이다. 이 중 「다른 젊은 여자」는 전쟁이 일어나자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로 오게 된 천진난만한 열여섯의 소녀 질베르트가 마들렌이라는 한 여인을 만나 지난 전쟁의 경험담을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마들렌은 독일군의 폭격으로 아수라장이 된 고향에서 부상당한 프랑스군을 갱도에 숨겨주고 간호해주었던 지난날을 회상한다. 모두가 만류했지만 한 시간만 더, 그리고 또 한 시간만 더 그가 버텨주기를 바라며 프랑스군의 회복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마들렌의 희생과 결연한 의지에 질베르트는 문득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전쟁은 이 작은 영웅의 이름을 묻지 않겠지만, 모든 가치를 상실한 듯한 전쟁 속에서도 헌신과 사랑을 잃지 않았던 이들의 마음을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묵직한 여운을 준다.
그는 자신의 이해를 통해 세상을 보았다. 자신의 이해가 세상의 운명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그 운명은 그에게도 아주 중요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자신의 보신을 합리화했다. 유럽의 운명에 대한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렇게 마음의 평화를 버림으로써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내놓았다고 손쉽게 확신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그 이상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 「로즈 씨 이야기」 중에서 97p
여태까지 그는 이성적으로 깊이 생각하려 했으며, 논리적이고 신중하게 행동해왔다. 그런데 이성과 신중함이 그 힘을, 예전의 효력을 점점 잃어갔다. 어떤 기후 조건에서는 정밀한 기계들조차 고장을 일으키는 것처럼, 그것들도 미쳐버린 세상과 접촉하자 탈이 나 덩달아 미쳐버렸다. / 「로즈 씨 이야기」 중에서 99p
그는 목숨만은 구할 생각이었다. 이런 순간이면 미래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빨리 쪼그라든다. 그는 이제 내년이나 내달이 아니라 곧 다가올 낮과 밤, 그리고 시를 생각했다. 그 이상으로는 아무것도 찾지 않았다. 그는 배가 고프고 목일 말랐다. 그는 빵 한 조각, 물 한 잔 외에는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았다. 식량을 가져올 생각을 미처 못 하다니! / 「로즈 씨 이야기」 중에서 103p


「그날 밤」은 남편의 외도로 자신의 삶에서 느끼는 실존적 불안감을, 결혼을 하지 않고 홀로 살아가는 세 여인들을 향한 얄팍한 연민을 통해 해소하는 카미유로 하여금 삶은 이토록 모순적이고 어긋난 감각을 선사한다는 것을 냉소적으로 보여준다. “언니는 이 모든 걸 우리한테는 절대 얘기하지 말았어야 했어!” 카미유를 향한 동생 알베르트의 마지막 외침은 근래에 읽은 소설들 중 가장 강렬한 한 장면으로 기억될 듯하다.
“난 널 보면 부러워. 알베르트, 넌 네가 얼마나 행복하지 알기나 하니? 사랑, 사랑, 끔찍하기 짝이 없는 거짓 놀음!” 내 가엾은 엄마가 외쳤다. / 「그날 밤」 중에서 125p
“네 말이 맞아, 마르셀. 그건 우연이 아니라 본능, 나아가 욕망의 문제야. 결국, 우리는 늘 이 세상에서 가장 격렬하게 욕망하는 걸 얻게 돼. 그게 우리가 받는 가장 큰 벌이야.” / 「그날 밤」 중에서 130p
국내 독자들에겐 다소 생소하지만, 이렌 네미롭스키는 이 작품집으로 하여금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이름으로 자신을 각인시켰다. 쉽고 간결한 문체, 폐부를 찌르는 강렬하고 날카로운 언어, 그런 가운데서도 한 편 한 편 모두 짙은 여운을 남기는 이렌 네미롭스키의 소설은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꽤 묵직한 느낌이다. 그녀의 또 다른 작품들 역시 무척 기대가 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