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수 이야기 - 역사를 바꾼 은밀한 무역 예문아카이브 역사 사리즈
사이먼 하비 지음, 김후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세계사의 흐름 속에는 반드시 ‘밀수’가 있었다!

밀수에 관한 모든 것, 그 은밀한 무역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볼 때 개인이든 국가든 간에 밀수 행위를 자제했던 ‘순수의 시대’는 없었다고 한다. 단순히 역사 속의 한 요소가 아니라 그 흐름을 주도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밀수의 역사가 곧 세계사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가장 어두운 곳에서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을 것이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밀수를 통해 세계사를 논한다는 것이 어쩐지 의외이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다. 하지만 밀수가 단순히 불법적인 데에 그치지 않고 사상과 문화를 전파하고 혁명을 일으키기도 하며, 각종 패권의 흐름을 이끈 주역이라면 우리는 이 흥미로운 접근법에 관심을 가져볼 의미가 있을 듯하다.

 

 

   이렇듯 <밀수 이야기>는 15세기 대항해시대부터 21세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정치, 경제, 문화 등에 있어 밀수에 얽힌 다양한 관점들을 총망라한다. 요약하자면 제1부에서는 지정학적인 맥락에 근거하여 식민지 개척을 통한 탐험과 밀수의 유기성과 향신료, 실크, 은과 같은 주요 밀수품을 중점으로 한 밀수의 전개 과정 및 대항해시대에서의 주요국 패권다툼 등을 다룬다. 제2부에서는 금, 아편, 차, 고무를 중심으로 제국주의 시대에서 보이는 밀수의 양상과 다양한 밀수꾼들의 이야기까지 폭넓게 다룬다. 제3부에서는 밀수가 나라의 흥망성쇠에 어떻게 이용되었으며 오늘날에는 어떠한 형태로 변화되었는지 등에 대해 살펴본다. ‘밀수’라는 키워드를 통해 복잡다단한 세계사를 관통하는 일이란 그만큼 방대하고 해박한 지식을 요구한다. 그래서 이 책은 사료적 가치가 충분하다고 여길 만큼 굉장히 사실적인 역사에 근거하고 그 무게감이 묵직하다. 반면 밀수꾼들에 관한 다양한 에피소드 및 각종 비사들도 함께 다루고 있어 마치 소설을 읽는 듯한 재미 또한 놓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밀수를 떠올리면 가장 가깝게 그려지는 이미지가 있다면 바로 해적이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봤던 해적의 이미지 때문일까, 광활한 카리브 해를 멋지게 누비는 해적선과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항해 노선을 따라 카리스마있게 항해사와 선원을 이끄는 선장에 몰입한 나머지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잊어버릴 때가 있다. 마치 그들은 타고난 바다사냥꾼의 유전자를 지녔을 것이라 응당 생각해왔지만 사실 그들에게는 개인의 영달을 넘어 거대한 논리가 존재했다. 이 시대의 밀수란, 국가적인 사업이자 식민지를 개척하여 경제의 패권을 차지하는 일과 다름없었다. 흔히 밀수꾼을 두고 야만적이거나 국가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들이라 규정짓고 있지만 알고 보면 국가의 비공식적인 대리인이자, 정치적 권력 투쟁의 중심 역할을 하기도 했고, 때로 애국자였던 점에서 인식을 달리하게 되는 부분이다. 이때 해적이자 밀수꾼이었던 이들은 국가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그러고 보면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서 눈에 가시 같은 존재이지만 잭 스페로우 선장의 항해 지식을 이용하여 이권을 챙기려는 영국군의 모습이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이렇듯 척결해야 하는 대상인 것과 동시에 국가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도 한 이들은 꽤 역설적이다. 결국 밀수 자체가 태생적으로 역설을 안고 있는 셈이다.

 

 

카리브 해에서 밀수의 파도가 높아진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필요’ 때문이었으며, ‘야생의 해안’에서 벌어진 담배 밀수나 네덜란드인들의 소금 밀수가 이에 해당했다. 소금의 경우 네덜란드의 상인들에게 필요했을 뿐 아니라 국가적으로 시급한 문제였으며, 밀수가 국가의 정책과도 연결돼 있다는 증거를 여기서도 발견할 수 있다. 더욱이 비록 불법적인 수단이더라도 일단 재화를 확보한다는 것은 권력을 얻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밀수는 필연적으로 큰 사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은 밀수는 더욱 스케일 큰 이야기를 만들었는데 앞서 살폈듯이 ‘세계 경제’를 만들어냈다. / 109p

 

 

   밀수를 통해 기계를 들여와 미국은 산업발전을 일으켰고,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왔듯 이로운 식물을 옮겨와 심는 데도 기여한 것이 밀수였다. 밀수는 분명 긍정적인 기능을 한 측면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밀수가 옹호의 대상인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는 노예를 실어다 옮겼고, 중국을 아편 소굴로 만들었으며, 나치 전범들을 이동시키는 활로를 만들기도 했다. 최근 아프리카로부터의 상아와 다이아몬드를 밀수하는 사례로 보면 반드시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저 과시와 사치에 근거한 밀수가 자행되고 있는 일은 개탄스럽다. 특히 세계의 문화유산을 도굴하고 약탈하는 행위는 분명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

 

 

획득된 유물들이 유럽과 미국의 장엄한 문화 공간에 전시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마치 그것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고 마치 발달된 새 문명의 일부로서 그 자리에 항상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을 유도한다고 해도 그 행위 자체를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소유권(유물의 원래 위치가 아니라 현재 위치에 대한)에는 무시하지 못할 권력이 숨어 있다. / 309p

 

 

   오늘날에도 여전히 밀수는 존재한다. 알고 보면 도처에 밀수가 존재한다. 불법다운로드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영화나 음악 파일들도 밀수로 거래되는 것들이고, 진품과 유사한 모조품이 유통되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한국이 명품 핸드백과 같은 최고급 사치품의 ‘슈퍼 모조품’ 생산국으로 유명하다는 저자의 언급은 참으로 부끄럽다. 이밖에 코카인과 헤로인에서부터 무기 거래 또한 암암리에 계속되고 있고, 암시장의 거래도 활발하다. 오히려 공급선 또한 과거보다 훨씬 정교해졌다고 한다. 값싼 제품을 공급받으려는 수요자가 있는 한 여전히 거래는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여전히 밀수는 일상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이 전달하고 시사하는 바들은 어느 특정 집단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한번쯤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다.

 

 

물론 누구라도 무조건 ‘흑’으로 바라보는 세계는 존재한다. 무기, 마약, 인신매매 등은 보편적으로 비정상적인 활동으로 간주된다. 반면 모두가 똑같은 관심을 갖고 있는 일상은 우리가 그런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며 때로는 그곳으로 들어가기도 하기 때문에 중간의 회색 지대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지대에서는 일상적인 거래와 범죄 행위를 구분하기 어렵고, 개인적인 것과 집단적인 것을 구분하기도 어렵다. 축제가 펼쳐지는 바로 옆에 비열함이 있고, 비참한 환경 바로 곁에서 풍요로운 삶을 영유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이기 때문이다. / 383p

 

 

   아쉬운 점이 있다면 지정학적인 설명에 근거하는 설명이 많다보니 다소 지리적 명칭이나 저자가 설명하는 내용들이 명확하게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또한 원문이 그러한 것인지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 것인지 간혹 비문이나 오문이 있었다는 점도 아쉽다. 하지만 꽤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밀수’라는 독특한 관점에서 역사를 새롭게 읽어내는 시도가 매우 흥미로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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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이와 느린 춤을 - 아주 사적인 알츠하이머의 기록
메릴 코머 지음, 윤진 옮김 / Mid(엠아이디)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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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알츠하이머란 한낱 개인의 문제인가?

절망 속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끝내 놓지 않는 위대한 여정!

 

 

  사랑하는 사람이 더 이상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늘 함께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정신이 나와 함께 하지 않고, 나와의 그 어떠한 기억도 공유하지 못하는 채로 살아간다면 그 기분은 어떠할까. 알츠하이머라는 몹쓸 병이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모든 것을 앗아가는 그 비통한 순간순간을 마주해야 하는 일이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일까. 알츠하이머병에 걸리는 것 다음으로 두려운 것이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보호자가 되는 것이라면 기꺼이 환자를 간병하는 일에 자처할 수 있겠는가. 58세의 비교적 이른 나이에 조발성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남편을 무려 20년간 간병해온 아내의 이야기 <낯선 이와 느린 춤을>은 이 가슴 아픈 질문으로 끊임없이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아름다운 실화이다.

 

 

  이 책은 알츠하이머병이 한 인간을 어떻게 파괴시키는지, 이를 지켜보는 가족들의 고통과 외로운 싸움, 나아가 병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고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하는 법에 대해 매우 진솔하게 이야기해나간다. 미국 국립보건연구원에서 근무하며 학회에서도 매우 저명한 과학자이자 의사인 하비에게 느닷없이 찾아온 조발성 알츠하이머병은 그 이른 시기만큼이나 매우 무섭고 빠르게 그의 이성을 앗아갔다. 환자들마다 병의 진행 속도가 저마다 다른 데다 알츠하이머병을 가깝게 느껴본 적이 없는 까닭에 사소한 변화와 증상들이 서서히 감지되고 있었음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초기의 이상 증세를 ‘신호’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저 잠깐 잊어버린 것으로 치부할 수도, 유독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이라 여길 수도, 높은 스트레스로 인한 병증 중에 하나라 생각하는 경우가 더 많다.

 

 

최근의 연구결과가 밝혀냈듯이, 행동 변화는 치매의 초기 신호들 중 하나이다. 누군가가 항상 사람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만으로 치매의 신호라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평소 하던 행동에 변화가 생기거나 평소에 잘할 수 있었던 능력이 저하된다면 문제가 다르다. 하비의 사무실이 무질서했던 것은 치매의 신호가 아니었다. 하지만 하비가 예전과 달리 사무실에서 뭔가를 찾아내지 못하여 어쩔 줄 몰라 당황하고 있는 건 정말로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신호였다. / 41P

 

 

  가슴 아프게도 나의 외할머니에게도 이런 증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외할머니는 경로당에 가는 척하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버스를 잡아타고 종점에 가기도 하고, 자신의 숨겨둔 돈을 찾으러 가야한다고, 누군가 훔쳐가려 한다고 나에게 조용히 말하기도 했다. 때로는 자신의 유일한 보호자인 나의 부모님이 자신을 학대한다며 낯선 약국에서 버티는 사람에 경찰이 출동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간은 굉장히 멀쩡하게 잘 지냈고, 대답 또한 또렷하게 잘 하시곤 해서 이것이 치매인지 아닌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전문 기관으로부터 테스트도 받았지만 아직 치매가 아니라는 진단을 받았다. 분명 치매 초기 증상인 것 같은데 치매라는 판단을 할 수 없다니. 우리 가족은 당혹스러웠다.

 

 

  이 책 속의 하비 또한 마찬가지였다. 기억을 잊는 사소한 일들부터 시작해 험악한 행동을 보이기도 하는 등 여러 이상 징후들이 점점 눈에 띄게 발견되었지만 그는 무려 2년간이나 뚜렷한 진단명을 받지 못했다. 그저 항우울제와 아리셉트 같은 약을 처방 받았을 뿐이다. 정확한 진단이 없이 애매하게 흘러간 시간동안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정확한 치료 행위를 진행시킬 수가 없다는 건 가족들로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보다 빠른 진단과 완화할 수 있는 치료법을 진즉에 손썼다면 병의 진행은 좀 더 느려졌을까. 그렇든 그렇지 않든 간에 함께 고통을 겪는 가족들로서는 그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문제는 단순한 망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알츠하이머병을 겪는 이들이 보호자에게 때로는 위협을 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그들은 어마어마한 완력을 행사한다. 저자 역시 이러한 위험에 자주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병에 잠식되어 무력한 인간이 되어 가고 있을지라도 여전히 그는 가치 있는 사람이며 우리 가족에게 소중한 사람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것으로 저자는 남편을 다독여야했다. 그것은 남편만이 아니라 어쩌면 이 비극적인 현실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 저자가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여름철에 갑자기 폭풍우가 닥쳐오듯이 얼굴 표정이 갑자기 험악해지면서, 내 손목을 으스러질 정도로 세게 움켜잡았다. 손을 빼지도 못하고 혹시 내 팔을 부러뜨릴까 겁에 질렸지만, 나는 의식적으로 그에게 더 가까지 다가갔다. 머리와 턱을 아래로 내려서 그가 다른 손으로 내 목을 움켜쥐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는 붙잡히지 않은 팔로 그를 감싸 안으면서 무서움을 억누른 채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훌륭한 의사에요.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돕는 사람이잖아요. 힘들어하는 거 잘 알아요. 나는 당신을 도우려는 거에요.” 되풀이해서 이렇게 말했고, 내 말 중 어떤 대목을 그가 알아들었는지, 혹은 내 목소리가 그를 진정시켰는지 몰라도 하비는 힘을 빼고 내 손목을 놓았다. / 106P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환자의 가족들은 저마다 나름의 방법으로 최선을 다할 것이다. 저자인 메릴 먼로 역시 모든 커리어를 내려놓고 고군분투한다. 적당한 보호소도 찾아보고 간병인과 교대로 남편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하고, 나름 일지를 써가며 그가 더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보려 한다. 하지만 보호소에서도 쫓겨나고, 간병을 하느라 재산도 여의치 않다보니 오로지 집에서 간병을 하기로 결정하는 가운데, 어머니마저 알츠하이머병에 걸리는 악재가 겹친다. 그럼에도 그녀는 포기를 하지 않는다. 이미 육체와 정신 모두 바닥인 상태인 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알츠하이머병 환자를 돌보면서 겪는 그녀의 고통을 여과 없이 담아낸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고 감탄을 반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라면 과연 어땠을까.

 

 

  물론, 우리는 일찍 환자를 포기해버리는 이들에게도 질책보다 위로가 필요하다. 그만큼 이 병은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가혹하며 보호자를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궁지에 몰아간다.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다. 나의 엄마가 내게 전화해 무너지듯이 울었던 날, 나도 그저 그 무게와 고통을 가늠만 할 뿐이었다. 이 책을 보면서 엄마를 수시로 떠올렸고 그래서 마음이 더 아팠다. 얼마나 외로운 싸움이겠는가. 이 싸움을 얼른 끝내기 위해 병을 앓는 사람이 좀 더 일찍 편안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을 수 있길 바란다면 그 마음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우리를 버렸다. 하비가 예전의 그가 아니라서 그런 것이다. 하지만, 나까지 같이 버려져야 하나? 나는 그저 선택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열심히 잘 싸우거나, 치료법을 찾아내어 시간을 벌어서 병을 완치할 기회를 가지거나. 최악의 경우가 되면 하비가 치료를 중단하고 평화를 되찾아 내게 작별 인사를 건넬 수 있게 하거나. 내가 그를 진실하게 대했다는 점에 대하여 하비가 고마워 했으면 좋겠다. 누구라도, 그 사람이 병에 걸려 나을 희망이 없다는 이유로 인생에서 잊혀서는 안된다. / 190P

 

내가 느끼는 좌절감과 분노는 어머니에 대해서가 아니라 병에 대한 것이었어야 했다. 나는 다른 환자보호자들은 어떻게 이런 상황을 견디는지 궁금증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도 자식의 기대와 부모가 필요로 하는 것 사이 어딘가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일까? 극도의 피로감이 죄의식보다 더 커지는 순간이 오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조언은, 각자가 처한 생활환경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보호자들은 도대체 어떤 사건을 계기로, “이제 더 이상은 못 하겠어.”라고 포기하게 되는 걸까? / 238P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알츠하이머병을 정면으로 응시한 메릴 먼로는 일반 대중의 눈에 이 병이 잘못 그려지고 있는 것을 애통해한다. TV에서는 알츠하이머병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과 동떨어진 광고들이 만연할 뿐, 실상 그 민낯을 드러내는 일에는 주저한다. 노인 인구가 증가하고 잠재적 환자들이 늘어가는 시대에 여전히 환자, 환자보호자들에 대한 처우나 제도 개선의 변화 역시 미비하다. 결국, 그녀는 하비를 간병하면서 겪는 일들을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공개한다.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녀가 어떤 보상을 받으려는 마음으로 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비의 명성에 금이 가게 할 수도 있고, 주위의 시선을 감내해야 하며 자칫 오해를 부를 수도 있으나 그녀는 알츠하이머병의 실상과 이를 곁에서 겪는 가족들의 아픔을 모두가 알 필요가 있다고 여긴다. 또한 이 사회에 경각심을 고취하고 제도 변화 및 의료 발전에의 촉구를 유발하고자 한다. 공개하지 않고 숨어서 생활한다고 해서 환자의 존엄성이 지켜지는 게 아니라고 믿은 것이다. 그녀의 용기 있는 행동은 나아가 알츠하이머병의 예방을 목적으로 하는 임상 연구에 참가하기에 이른다. 매년 테스트에 참여하여 인지능력을 검사하고 자신의 데이터가 과학 연구 발전에 기여토록 한 것이다.

 

 

  그녀는 이제 알츠하이머를 생각하지 않는 일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어디에서든 그것의 미세한 신호를 감지하기도 한다. 가족들과 휴가 간 장소를 기억하지 못하는 부인, 같은 말을 반복하다가 매번 결과를 다르게 말하는 일행들, 자신이 무엇을 하던 중이었는지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 지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그 증후들을 발견하곤 한다. 그들도 언젠가는 이 병으로 고통 받을지 모르는 일이다. 특히 가족 중에 알츠하이머병 환자가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도 걸리지 않을까 걱정한다고 한다. 그녀 역시 이런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 또한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한 생각이 ‘나는 이 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였다. 내가 가족의 짐이 되면 어쩌나, 병이 나를 갉아먹는 것보다 더 큰 공포는 내가 그들의 삶을 망가뜨리는 것이기에.

 

 

하비와 나는 여러 해 동안 어떤 낯선 이와 느린 춤을 추었다. 알츠하이머는 하비와 나 둘 다를 사로잡았다. 그 병은 훌륭한 정신 하나를 파괴했고, 더불어 우리의 인생을 파괴했다. 나는 병마가 내 목을 조를 때에는 싸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하지만 그 병은 내가 다른 방식으로 탈출하는 건 막지 않았다. 내가 다음 춤 상대가 되는 건 단지 시간 문제인걸까?

거울을 바라본다. 거울 속의 나는 지쳐 있고, 20년의 세월을 잃어버리고 서 있다. 처음 하비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찾고 있었던 것을 지금도 나는 찾고 있다. 우리 모두가 치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말이다. / 323P

 

 

  현재 저자는 우연히 좋은 기회를 만나 헤프리 빈 알츠하이머병재단의 CEO가 되었고, 알츠하이머병의 조기 발견과 예방을 위한 활동에 힘쓰고 있다고 한다. 이 사회가 알츠하이머병에 더욱 관심을 기울일 수 있도록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병을 앓고 있는 남편의 곁에서 함께 하는 일상도 변함이 없다. 그녀는 말기 호스피스 치료를 집에서 하기로 하고 그의 마지막 날에 낯선 이의 손길이 닿지 않게 한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비, 자신이 사랑하는 이 남자와 마지막으로 느끼는 촉감이 자신이길 바라는 단 하나의 소망으로 그녀는 언제나처럼 마지막인 듯 하비에게 키스를 건네며 지내고 있을 것이다. 이 땅의 많은 알츠하이머병 환자와 그의 가족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영원히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엄마에게도 위로와 사랑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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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투쟁 2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지음, 손화수 옮김 / 한길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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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자기 투쟁의 고백!

일상을 서사로 만드는 힘을 가진 크나우스고르적 문학!

 

 

 

   감히 ‘크나우스고르적 문학’이라고 쓰고 싶은, 그만의 독특한 문학적 성취를 이루어나가고 있는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의 <나의 투쟁> 2권이 출간되었다. 삶의 민낯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그의 투쟁적 글쓰기에, 마치 보지 말아야 할 한 개인사의 어두운 낯을 속속들이 알아버린 것 같은 그 혼란스러웠던 1권의 첫 기억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마치 배설물처럼 바라보기 무섭게 몇 번이고 고개를 돌려버려야 할 것 같았던 독서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나 모름지기 작가란 자기만의 독특한 것을 일구어내야 할 의무를 숙명처럼 지닌다고 했던가. 그래서 자신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자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과 인간관계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불쑥불쑥 치닫는 감정의 질곡까지 거침없이 글로써 돌파해나가는 그의 힘에 매료되었다.

 

 

   <나의 투쟁> 2권 역시 깊은 사색과 자기 성찰에의 끈을 놓치지 않고 진득하게 밀고나간다. 진솔한 삶의 이야기 속에서 철학적 성찰은 언제나 존재하고, 진지하고 가멸찬 자기반성 또한 계속된다. 그럼에도 1권 보다 2권은 좀 더 가볍다. 1권이 ‘죽음’이라는 표상 아래의 어둡고 혼란스러운 시절을 이야기했다면 2권에서는 이제 어른이 된 그가 사랑과 가족 안에서 포용하는 모습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첫 번째 결혼을 뒤로하고 스웨덴의 스톡홀름으로 혈혈단신 건너와 현재의 아내인 린다를 만나 아이를 낳고, 육아생활과 글쓰기를 병행하며 살아가는 그의 모습은 우리들의 일상과 닮아 있다. 그는 학업을 마쳐야 하는 아내를 대신해 유모차를 끌어 산책시켜주고, 아이의 어린이집 활동에 참여하며, 아이의 베이비댄스 문화센터 수업까지 듣는다. 선이 굵은 남성의 이미지에 가까운 그가 엄마들 틈에서 강사가 틀어주는 노래를 따라 부르는 모습을 상상하니 피식 하고 웃음이 새어나온다. 마치 성불구자가 된 것 같다던 고백처럼 그에게 있어 육아를 하면서 겪는 그 모든 경험들은 낯설고 불편하다. 자신의 내면에 자유롭게 드나드는 아이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일 또한 어쩐지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부모이기에, 그 역시도 아빠이기에 누구나 환경에 따라 서로 비슷비슷하게 변해가듯 자신도 그렇게 살아간다.

 

 

아이들은 어른과 달라서 비록 상대방을 대할 때 예의와 격식을 차린다 해도 마무리 손질을 하지 않은 목제 가구처럼 그 투박한 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런 아이들은 나의 깊숙한 내면에까지 자유롭게 도달할 수 있다. 그런 일이 생길 때 내가 스스로 제한을 두고 하지 않는 일은 내게 다가오는 아이들에게 나의 신체적 우월성을 이용해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나는 아이들이 나의 내면을 휘젓고 다닐 경우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무관심하게 대하곤 한다. 하지만 가끔은 나도 아이들이 도를 넘게 친밀감을 표현하면 불쾌해질 때가 있다. / 70p

 

 

   육아를 하다보면 아이의 행동과 기분에 따라 마음이 들쑥날쑥해지는 것을 느끼곤 한다.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는 아이 때문에 울화가 치밀 때도 있지만, 갑자기 깔깔 웃는 모습을 보게 되면 기분이 좋아진다. 부모의 마음이란 모두 같은가보다. 이에 대해 저자는 혼란스러운 감정의 변화를 감추지 않고 모두 써내려간다. 아이를 키우고 있는 입장으로써 자연스럽게 공감대가 형성되는 부분이다. 우리는 부모이기에 인내를 앞세워 울컥하는 감정을 내리눌러야 할 때가 많고, 혼자만의 시간이 간절하지만 부모가 된 이상 이 아이에게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는 것을 안다. 이 아이의 세상엔 부모가 전부이기에. 저자가 그러하듯 내가 그러하듯 이 땅의 부모들의 마음이 그러하듯, 그저 안고 있는 행위만으로도 세상의 가장 큰 기쁨을 품은 듯 아이라는 존재 자체가 그 모든 것을 보상하기에.

 

 

헤이디와 나와의 관계 중 일부는 내가 헤이디를 안고 다니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고 안기는 일. 그것은 우리 두 사람의 관계를 말할 때 기본적인 사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헤이디는 걷기를 싫어해서 나만 보면 항상 두 팔을 번쩍 쳐들고 안아들라고 졸랐다. 내가 헤이디를 안아 올리면 헤이디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커다란 눈동자와 욕심스러운 입을 지닌 자그맣고 통통한 헤이디를 내 몸에 바짝 붙여 안을 때면 행복해진다. / 73p

 

 

   이렇듯 소설의 전반부는 아내인 린다와 그의 아이들의 이야기로 시작을 하지만 2권에서 더욱 주목할 부분은 린다의 사랑을 얻고 결혼에까지 이르는 과정에 있다. 노르웨이를 떠나 스웨덴에서 만난 린다라는 여성에게 마음을 빼앗긴 그의 모습은 굉장히 강렬하고 진솔하며 때로는 과격하다. 그녀로부터 자신의 사랑을 거부당했을 때 그가 자신의 얼굴에 유리 조각을 그어대는 모습이란 다소 충격적이다. 마침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연애 혹은 결혼 생활에서 오가는 그들의 감정은 그 기복이 너무나 심해 늘 위태로워 보이기 일쑤이다. 사랑에 빠진 한 남자의 열망, 질척거림, 때로는 도망치고 싶고, 다른 여자에게 시선을 빼앗기기도 하는 이 복잡한 감정들을 놀라울 정도로 담담하게 써내려간다. 1권에서 아버지의 추악한 일면과 자신의 가족사를 꾸밈없이 담아냈듯 2권에서도 그는 거짓을 덧씌우지도, 진실을 가리지도 않는다.

 

 

스톡홀름으로 이사 와서 린다를 만난 그해 봄, 세상은 내 앞에서 활짝 문을 열었고 삶은 엄청난 속도로 강렬해졌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사랑에 빠졌던 나는 세상의 온갖 것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했고 주변의 모든 것을 활짝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였으며 기쁨과 즐거움을 주체할 수 없어 감정이 폭발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 114p

 

 

가을이 되자 린다의 기분은 점점 더 가라앉았고, 그러면 그럴수록 린다는 나를 더욱 심하게 옭아매었다. 나는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밀실공포증 같은 답답함이 덮쳐왔기에 나는 탈출구를 찾기 시작했고 그녀와 거리를 두려고 했다. 동시에 그녀는 내가 만들어둔 거리감을 좁히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 380p

 

 

   어쨌든 사랑을 이루었고, 그녀로부터 사랑하는 아이도 가졌지만 저자는 평범한 일상에 끊임없이 번민을 느끼고 씨름한다. 저자가 말하는 일상이란 설거지나 기저귀 따위가 아니라 좀 더 근원적인 데 있다. 비슷하게 닮아가기를 요구하는 사회, 내가 하는 모든 행위와 생각이 작아 보이고 무가치하게 느껴지게 하는 데에서 오는 혐오감에서 기인한다. 판에 박힌 일과 책임으로 이어지는 일상을 참고 살아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습관처럼 이를 거부하게 되는 것은 항상 동경하는 그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은 진짜 자신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신이 원하는 가치를 실현하지 못한 채 현실과 동경 사이, 그 어디에도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해 여전히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자신이 동경하는 세상보다 이 삶이 더 가깝게 자리 잡고 있다면 이 삶을 말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데도 말이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은 내 것이 아니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그 삶을 내 것으로 만들어보려 무진 애를 써보았다. 그것이 바로 내가 해온 투쟁이다. 하지만 나는 성공하지 못했다. 먼 곳을 바라보는 동경은 눈앞의 일상에 구멍을 내기 일쑤였으니까. / 111p

 

 

나는 오직 올바른 사람이 되고 싶을 뿐이었다.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의 전부였다. 올바르고 진실하며 정의로운 사람. 사람들의 눈을 거리낌 없이 대할 수 있는 사람, 누구든 신뢰할 수 있는 사람.

하지만 실제로는 그와 정반대였다. 나는 책임져야 할 곳을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비겁한 사람에 불과했다. 지금도 나는 비겁하게 도망치고 있지 않은가. / 263p

 

 

  나의 투쟁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원하건 원치 않았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나와 나를 둘러싼 그 모든 것들의 이야기를 글로 써내는 것. 그곳에 나의 존재적 가치가 있고, 삶의 가치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 소설을 다 읽고 나니 그에게서 또 한 번 묵직한 잽을 얻어맞은 기분이다. 비록 주제가 사랑과 가족을 이야기하고 있더라도 1권만큼이나 강렬하고 그래서 손에서 놓을 수 없는 힘을 느꼈다. 나는 언제쯤 적당히 타협하고 아름답고 긍정적인 것에만 집착하는 태도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내 삶의 이면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는 일이란 정말로 가능한 것일까. 적어도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는 그렇게 했다. 저자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써내려가고 나면 그 뒤에는 무엇이 남을까. 가장 마지막 권을 읽게 되면 알 수 있을까. 아직 읽지 않은 그의 이야기가 계속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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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이 사람을 따르는가 - 가만히 있어도 사람이 따르는 리더의 조건
나가마쓰 시게히사 지음, 김윤수 옮김 / 다산3.0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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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리더형 인간인가?

  기업이나 단체를 이끌어가는 리더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사소한 모임이나 친구들 사이에서도 리더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나는 리더의 자질을 갖추지 않고 있음에도 꽤 그 역할을 많이 맡은 것 같다. 추진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결단력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나마 하나의 자질을 갖춘 게 있다면 억지로 이끌지 않고 먼저 움직여서 원하는 바를 유도하는 쪽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잡음이 없이 조직이 유연하게 움직여졌지만 조직원의 입장을 모두 고려하느라 결론을 내기가 힘들거나 혼자서 고군부투 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왜 리더인가, 나는 그럴 만한 능력이 부족한데’ 하며 리더로서의 자존감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당시에 내가 생각한 리더의 조건은 ‘카리스마, 추진력’과 같이 스스로 빛나는 힘을 지닌 것이었나 보다. 어째서 나는 전형적인 강력한 리더의 이미지에만 사로잡혀 있었을까.

 

 

  <왜 나는 이 사람을 따르는가>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인재와 리더에게 걸맞은 리더의 조건을 제시한다. 저자는 20대에 타코야키 노점상으로 시작해 주식회사 인재육성JAPAN의 대표로 인력 컨설팅, 외식업, 출판 등 다방면으로 사업을 전개한 일본의 젊은 CEO이다. 일본에서는 이례적으로 젊은 층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그를 차세대 리더로 주목하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노점에서 시작해 굴지의 사업가가 되기까지, 이 젊은 리더의 다양한 경험이 바탕이 된 리더십 강의와 저서가 일본 청년들이 지향하는 리더로서의 모델과 일맥상통하기에 인기를 끄는 게 아닌가 싶다. 그도 그럴 것이 책을 읽다보면 저자는 정서적 공감을 중시하고 구성원들을 존중하는 커뮤니티십에 중점을 둔 따뜻한 리더라는 점에서 많은 청년들에게 호감을 얻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리더의 조건이란 무엇일까. 이 책의 표지에서 언급하듯 ‘가만히 있어도 사람이 따르는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그만큼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될’ 정도로 다양한 덕목들이 요구되지 않을까. 이 책은 크게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어떤 리더에게 사람이 따르는가’를 주제로 하여 리더 스스로가 갖춰야 할 다양한 조건들을 제시한다. 2부에서는 ‘좋은 조직을 넘어 매력적인 조직으로’를 주제로 조직원들을 독려해 매력적인 조직으로 거듭나게 하는 방법들을 제시한다. 1부에서 다루는 내용에서 리더가 갖춰야 할 조건 중 가장 큰 특징은 바로 권력이 아니라 매력이 있는 리더가 되기, 내실 있는 리더가 되기, 배움을 실천하는 리더의 아우라를 손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당신은 부하 직원에게 먼저 미소를 보이는가?

당신은 부하 직원에게 먼저 따뜻한 말을 건네는가?

당신은 부하 직원이 동경할 만한 리더인가? / 19p

 

 

  리더 스스로에게 메리트가 있어야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지닐 수 있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우수한 리더는 혼자서 모두 해내는 천재가 아니다. 곁에 좋은 부하 직원이 있어야하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동기가 부여될 만한 메리트를 제시하는 것 또한 리더의 역할이다. 나는 과연 직원들에게 메리트 있는 리더인가. 스스로 자문하고 그것을 갖추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항상 필요하다. 내가 한 때 다니던 직장에서도 운동이나 자격증 취득과 같은 자기 계발을 적극적으로 하고 직원들에게 먼저 말을 잘 걸어주고 늘 호탕하게 웃는 리더가 있었다. 반면 늘 표정이 어둡고 따지는 듯한 말투를 지닌 리더도 동시에 있었다. 그들 모두 해당 업무에 대한 능력은 좋은 편이었으나 결국 앞서 언급한 리더가 더 높은 자리까지 올랐으며 그의 곁에는 저절로 좋은 직원들이 함께 했다. 이러한 경험을 비추어봤을 때 리더 스스로가 빛나는 매력을 갖추어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조건인 듯하다. 뿐만 아니라 견고한 내부를 가진 조직이 오래도록 번영하는 것처럼, 신뢰로 뭉친 인적 기반을 갖춘 리더 또한 중요하다. 인맥을 쌓고 다양한 사회활동으로 외부에만 눈을 돌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눈앞의 사람을 먼저 챙겨야 한다는 뜻이다.

 

 

모든 가치는 ‘안에서 밖으로’가 중요하다. 내실을 착실히 닦으면서 천천히 바깥을 향해야 한다. 이 ‘안에서 밖으로’가 진정한 의미의 성공을 창출한다. 내실 있는 리더는 굳이 스스로 발돋움하지 않아도 떠밀리듯 성공하게 되는 것이다. / 26p

 

 

  저자는 ‘만족을 모르는 기질’이 리더가 지녀야 할 자질 중에 하나라고 말한다. 즉, 배움을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때 책 이상의 도구가 없다고 강조한다. 저자의 모든 경험과 에너지가 농축된 결과물이 책인 만큼 그 에너지를 체화하고 활용함으로써 배움을 실천하는 리더의 아우라를 갖추라는 것이다. 또한 요즘처럼 자기 어필이 많이 요구되는 시대도 없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셀프 브랜딩’이 아니라 ‘이너 브랜드’를 갖출 것을 제안한다. 무리하게 셀프 브랜딩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 자신을 몰아가지 말고, 착실하게 자신의 발밑을 다지는 편이 자존감을 높이고, 결과적으로 주변에서 당신의 브랜드를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최대한 남에게 자신을 어필하고, 적극적으로 피력해야 한다는 생각에 피로감을 겪고 있을 이 시대의 리더들에게 위로가 되는 말인 듯하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남에게 자신을 어필하는 ‘셀프 브랜딩’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자긍심, 즉 ‘이너 브랜드’를 먼저 키워야 한다고. 내면에서부터 시작하는 이너 브랜딩은 겉치장에 치우친 셀프 브랜딩과는 무게감이 다르다. 행동 하나에도 확신이 담긴다. 확인이 있는 리더가 풍기는 에너지를 느낀 사람은 리더에 대한 확신과 믿음을 가진다. 그것이 가장 본질적인 형태의 브랜드다. / 100p

 

 

  책의 2부에서 “리더는 특별한 안목을 가지고 있으며, 크리에이터 보다는 큐레이터에 가깝다.”라고 워렌 베니스가 한 말을 인용한 것이 인상적이다. 저자는 지금껏 스카우트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경영자들이 종종 어느 유명 회사에서 경영 전문가를 데리고 와 중역에 앉히는 일이 많은데, 그동안 열심히 일해 온 직원들 위에 느닷없이 낯선 상사가 한 명 생기게 하는 일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그 사람이 와야만 회사가 성장한다는 것은 리더인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자꾸 외부에서 능력 있는 자를 찾으려고 하기보다 내부의 인재들을 독려하고 그 능력을 끌어올리는 게 더욱 중요함을 강조한다.

 

 

“일류의 인재를 모으는 게 아니라, 지금 있는 사람을 일류로 만든다.”

나의 경영 슬로건이자 리더로서의 매력의 원천이다. 이 슬로건의 힘은 크다. 자신을 일류로 만들어주겠다는 리더를 싫어할 부하는 없다. 없던 의욕도 생기고 잠재된 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거듭 말하지만 리더의 매력은 자신 안에 잠들어 있다. 우수한 부하를 찾아 헤매는 리더들에게 고한다. 우수한 리더는 지금 있는 멤버로 승리하는 리더다 / 123p

 

 

  가만히 살펴보면 이 책에서 저자가 제시하는 리더의 조건들은 가장 중요한 가치 몇 가지를 중심으로 의외로 기본적인 것에 충실히 하는 데 있는 듯하다. 기술적인 부분보다 리더의 마인드와 기본 자질에 더욱 집중한다는 점에서 내실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이제는 카리스마가 아니라 직원들 모두가 주역이 되는 환경을 만드는, 즉 내 사람들을 돋보이게 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하는 게 리더의 가장 역할인 것 같다. 한때 강한 리더십의 이미지에 사로잡혔던 나에게도 귀감이 되는 조언이었다. 차세대 리더들, 그리고 리더가 되기를 꿈꾸는 청년들에게도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책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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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산 형사 베니 시리즈 1
디온 메이어 지음, 송섬별 옮김 / artenoir(아르테누아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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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연쇄살인, 누가 그를 범죄자로 만드는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비정한 사회 현실을 고발한 묵직한 메시지!

 

 

  다양한 범죄스릴러 소설들이 쏟아지지만 그 중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배경으로 한 <악마의 산>은 좀 더 특별해 보인다. 우리가 자주 접하지 못하는 아프리카 최남단의 제3세계, 그 낯선 나라 속에 음험하게 도사리고 있는 수많은 공포들은 이 소설의 무게감이 결코 가볍지 않다고 여기게끔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어려운 사건을 착착 해결해나가는 지적이고 멋진 형사가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고층빌딩 숲이 즐비한 도심의 세련된 공간이 나오는 것도 아니며, 현란한 액션과 추격신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비정하고 음울한 사회 현실, 거리를 헤매야 하는 아이들, 타락한 경찰들, 몸을 팔아서 삶을 연명하는 여자들 등이 만연한 이곳은 그야말로 어디서든 범죄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만 같다.

 

 

  소설은 크게 3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한때 KGB출신에 고도의 훈련을 받은 전사 토벨라, 알콜중독자가 되어버린 강력계 형사 베니 그리설, 딸 아이를 키우기 위해 콜걸이 된 크리스틴이 그들이다. 우연히 강도 두 명을 만나 그들로부터 아들을 잃게 된 토벨라는 이 땅의 사법체계가 그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는 데다 도망치기까지 한 것에 분노한다. 아이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이 땅을 지켜주고 그들 앞에 놓인 위험한 장애물을 치워주는 게 마땅히 어른들이 할 일이지만 이 사회는 단숨에 변할 것 같지 않다. 결국 그는 스스로 복수를 다짐한다. 아프리카 전통 창인 아세가이를 이용하여 보석으로 풀려났거나 법의 심판을 앞두고 있는 아동성폭행범들만 골라 처단하며 나름의 정의구현을 실현하기로 한 것이다.

 

 

지금 이 순간 파카밀레가 옆에 있었다면 토벨라는 그렇게 말해 주었을 것이다. 목적이 수간을 정당화한다고. 파카밀레를 살해한 불의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빠져나가게 둘 수는 없었다. 힘없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사법체계가 제대로 된 처벌을 해 줄 수 없다면, 지금이 바로 최후의 수간을 사용할 시점이다. 설명하기도 이해하기도 어려운 이 세계에서 누군가는 맞서 싸워야 했다. “여기까지다. 더는 안 돼.” 누군가는 일어나서 외쳐야 했다. / 74p

 

 

  한편, 강력계 형사 베니 그리설은 능력이 출중한 베테랑 형사였으나 알콜 중독에 빠지면서 가족은 물론 동료들로부터 외면을 당한다. 결국 6개월 안에 술을 끊지 않으면 이혼을 하겠다는 아내의 통보로 인해 끊임없이 들러붙는 술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 와중에 전기주전자 코드로 목을 졸려 살해하는 연쇄살인범이 나타나고 그를 잡는 것으로 서서히 밑바닥까지 추락했던 자신의 명성을 다시금 되찾아가려한다. 그러던 중 아세가이를 이용해 아동성폭행범들을 살인하는 연쇄살인범을 잡으라는 특명이 내려지고,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과 함께 온갖 이목이 집중된 이 살인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단순히 줄거리만 요약하면 이렇듯 형사 베니 그리설의 대활약상을 기대해야겠으나, 사실 이 소설은 형사로서 혹은 한 가정의 아버지이자 남편으로서 그의 인간적인 부분에 보다 비중을 두고 있다. 추측하건데 ‘형사 베니 시리즈1’이라고 표지에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소설이 베니 형사의 고뇌와 그가 그것을 이겨내고 다시금 예리한 형사로 거듭나는 과정에 더 주목하려 한 듯하다. 그래서 멋진 형사의 스릴 넘치는 액션과 추리력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라면 실망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베니 형사에 대한 기대감이 읽으면서 줄어드는 기분을 감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고뇌가 굉장히 인간적으로 다가오고 그래서 그것을 딛고 이겨내 줄 것을 믿고 응원하게 되는 부분도 있다.

 

 

“저는 그 비명 소리가 들립니다.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희생자들이 누워 있는 현장으로 들어가면 비명 소리가 들립니다. 희생자가 죽어 가며 질렀던 비명이 누군가 들어 줄 때까지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겁니다. 비명 소리는 한 번 들리고 나면, 그 뒤로는 머릿속에 붙박인 것처럼 사라지지 않습니다.” / 87p

 

 

  세 번째 주요 등장인물 콜 걸 크리스틴은 미혼모이다. 처음부터 몸을 주고 거래를 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가장 빨리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었고 딱 5년만 발을 들이기로 한다. 그러다 콜롬비아 마약상인 카를로스를 만나게 되면서 일이 꼬이고 만다. 다른 고객들과 달리 그는 그녀를 독점하고 싶어하고 때로는 완력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와의 관계는 불안해 보인다.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헤어 나올 수 없는 힘을 지닌 자이기에 크리스틴은 점점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다 카를로스가 자신의 딸을 납치하는 일이 벌어지고 그것을 계기로 형사 베니 그리설과 얽히게 된다.

 

 

  이렇듯 유기적으로 얽힌 이들의 이야기는 처음에는 각자의 시선으로 전개되다 하나의 이야기로 얽혀진다. 굉장히 드라마틱하고 영화적인 느낌이다. 막 흥미로워지는 찰나에 다른 인물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바람에 궁금함이 더 커지기도 하고 때로는 맥이 풀리기도 하지만 확실히 술술 재미있게 읽힌다. 가끔 앞서 언급된 베니 그리설의 고뇌가 비슷한 내용으로 몇 번이나 반복되는 점은 속도감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참 괜찮은 범죄소설이라 생각이 든다. 음모, 뜻밖의 반전, 흥미로운 캐릭터, 어두운 사회의 일면과 범죄에 대한 작가의 의식 또한 진지하게 반영되어 있는 부분도 가볍지 않아서 좋다.

 

 

오늘날엔 모든 사람 안에 범죄가 스며들어 있었다. 무의식 속에서 겨울잠을 자고 있는 독사처럼. 그러다 탐욕, 질투, 증오, 복수, 공포의 열기 속에서 그 독사가 튀어 올라 사람을 무는 것이다. 그런 일이 아직까지 없었다면 행운이라 생각해도 좋다. 삶의 경로가 다행히 큰 사고를 피해가는 바람에, 인생의 끝에서 돌아볼 때 지금까지 저지른 가장 못된 일이 직장에서 종이 클립을 훔친 정도라면 그 인생은 운이 좋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 279p

 

 

  아니나 다를까, 저자 베니 형사의 시리즈가 영화화된다고 한다. 게다가 주연이 숀 빈. 내게 있어서 그는 영화 <반지의 제왕>으로 가장 먼저 알게 된 배우인데 생각해보니 소설 속 베니 그리설이라는 인물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물론 이 배우가 좀 더 섹시한 느낌이 많은 듯하지만. <악마의 산>을 시작으로 다른 베니 형사의 시리즈 작품들도 꼭 읽어보고 싶어졌다. 베니 형사는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되는 건지, 알콜을 이겨내고 멋진 형사로 거듭날 것인지 뒷이야기가 궁금하고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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