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투쟁 2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지음, 손화수 옮김 / 한길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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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자기 투쟁의 고백!

일상을 서사로 만드는 힘을 가진 크나우스고르적 문학!

 

 

 

   감히 ‘크나우스고르적 문학’이라고 쓰고 싶은, 그만의 독특한 문학적 성취를 이루어나가고 있는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의 <나의 투쟁> 2권이 출간되었다. 삶의 민낯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그의 투쟁적 글쓰기에, 마치 보지 말아야 할 한 개인사의 어두운 낯을 속속들이 알아버린 것 같은 그 혼란스러웠던 1권의 첫 기억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마치 배설물처럼 바라보기 무섭게 몇 번이고 고개를 돌려버려야 할 것 같았던 독서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나 모름지기 작가란 자기만의 독특한 것을 일구어내야 할 의무를 숙명처럼 지닌다고 했던가. 그래서 자신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자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과 인간관계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불쑥불쑥 치닫는 감정의 질곡까지 거침없이 글로써 돌파해나가는 그의 힘에 매료되었다.

 

 

   <나의 투쟁> 2권 역시 깊은 사색과 자기 성찰에의 끈을 놓치지 않고 진득하게 밀고나간다. 진솔한 삶의 이야기 속에서 철학적 성찰은 언제나 존재하고, 진지하고 가멸찬 자기반성 또한 계속된다. 그럼에도 1권 보다 2권은 좀 더 가볍다. 1권이 ‘죽음’이라는 표상 아래의 어둡고 혼란스러운 시절을 이야기했다면 2권에서는 이제 어른이 된 그가 사랑과 가족 안에서 포용하는 모습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첫 번째 결혼을 뒤로하고 스웨덴의 스톡홀름으로 혈혈단신 건너와 현재의 아내인 린다를 만나 아이를 낳고, 육아생활과 글쓰기를 병행하며 살아가는 그의 모습은 우리들의 일상과 닮아 있다. 그는 학업을 마쳐야 하는 아내를 대신해 유모차를 끌어 산책시켜주고, 아이의 어린이집 활동에 참여하며, 아이의 베이비댄스 문화센터 수업까지 듣는다. 선이 굵은 남성의 이미지에 가까운 그가 엄마들 틈에서 강사가 틀어주는 노래를 따라 부르는 모습을 상상하니 피식 하고 웃음이 새어나온다. 마치 성불구자가 된 것 같다던 고백처럼 그에게 있어 육아를 하면서 겪는 그 모든 경험들은 낯설고 불편하다. 자신의 내면에 자유롭게 드나드는 아이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일 또한 어쩐지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부모이기에, 그 역시도 아빠이기에 누구나 환경에 따라 서로 비슷비슷하게 변해가듯 자신도 그렇게 살아간다.

 

 

아이들은 어른과 달라서 비록 상대방을 대할 때 예의와 격식을 차린다 해도 마무리 손질을 하지 않은 목제 가구처럼 그 투박한 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런 아이들은 나의 깊숙한 내면에까지 자유롭게 도달할 수 있다. 그런 일이 생길 때 내가 스스로 제한을 두고 하지 않는 일은 내게 다가오는 아이들에게 나의 신체적 우월성을 이용해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나는 아이들이 나의 내면을 휘젓고 다닐 경우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무관심하게 대하곤 한다. 하지만 가끔은 나도 아이들이 도를 넘게 친밀감을 표현하면 불쾌해질 때가 있다. / 70p

 

 

   육아를 하다보면 아이의 행동과 기분에 따라 마음이 들쑥날쑥해지는 것을 느끼곤 한다.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는 아이 때문에 울화가 치밀 때도 있지만, 갑자기 깔깔 웃는 모습을 보게 되면 기분이 좋아진다. 부모의 마음이란 모두 같은가보다. 이에 대해 저자는 혼란스러운 감정의 변화를 감추지 않고 모두 써내려간다. 아이를 키우고 있는 입장으로써 자연스럽게 공감대가 형성되는 부분이다. 우리는 부모이기에 인내를 앞세워 울컥하는 감정을 내리눌러야 할 때가 많고, 혼자만의 시간이 간절하지만 부모가 된 이상 이 아이에게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는 것을 안다. 이 아이의 세상엔 부모가 전부이기에. 저자가 그러하듯 내가 그러하듯 이 땅의 부모들의 마음이 그러하듯, 그저 안고 있는 행위만으로도 세상의 가장 큰 기쁨을 품은 듯 아이라는 존재 자체가 그 모든 것을 보상하기에.

 

 

헤이디와 나와의 관계 중 일부는 내가 헤이디를 안고 다니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고 안기는 일. 그것은 우리 두 사람의 관계를 말할 때 기본적인 사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헤이디는 걷기를 싫어해서 나만 보면 항상 두 팔을 번쩍 쳐들고 안아들라고 졸랐다. 내가 헤이디를 안아 올리면 헤이디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커다란 눈동자와 욕심스러운 입을 지닌 자그맣고 통통한 헤이디를 내 몸에 바짝 붙여 안을 때면 행복해진다. / 73p

 

 

   이렇듯 소설의 전반부는 아내인 린다와 그의 아이들의 이야기로 시작을 하지만 2권에서 더욱 주목할 부분은 린다의 사랑을 얻고 결혼에까지 이르는 과정에 있다. 노르웨이를 떠나 스웨덴에서 만난 린다라는 여성에게 마음을 빼앗긴 그의 모습은 굉장히 강렬하고 진솔하며 때로는 과격하다. 그녀로부터 자신의 사랑을 거부당했을 때 그가 자신의 얼굴에 유리 조각을 그어대는 모습이란 다소 충격적이다. 마침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연애 혹은 결혼 생활에서 오가는 그들의 감정은 그 기복이 너무나 심해 늘 위태로워 보이기 일쑤이다. 사랑에 빠진 한 남자의 열망, 질척거림, 때로는 도망치고 싶고, 다른 여자에게 시선을 빼앗기기도 하는 이 복잡한 감정들을 놀라울 정도로 담담하게 써내려간다. 1권에서 아버지의 추악한 일면과 자신의 가족사를 꾸밈없이 담아냈듯 2권에서도 그는 거짓을 덧씌우지도, 진실을 가리지도 않는다.

 

 

스톡홀름으로 이사 와서 린다를 만난 그해 봄, 세상은 내 앞에서 활짝 문을 열었고 삶은 엄청난 속도로 강렬해졌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사랑에 빠졌던 나는 세상의 온갖 것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했고 주변의 모든 것을 활짝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였으며 기쁨과 즐거움을 주체할 수 없어 감정이 폭발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 114p

 

 

가을이 되자 린다의 기분은 점점 더 가라앉았고, 그러면 그럴수록 린다는 나를 더욱 심하게 옭아매었다. 나는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밀실공포증 같은 답답함이 덮쳐왔기에 나는 탈출구를 찾기 시작했고 그녀와 거리를 두려고 했다. 동시에 그녀는 내가 만들어둔 거리감을 좁히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 380p

 

 

   어쨌든 사랑을 이루었고, 그녀로부터 사랑하는 아이도 가졌지만 저자는 평범한 일상에 끊임없이 번민을 느끼고 씨름한다. 저자가 말하는 일상이란 설거지나 기저귀 따위가 아니라 좀 더 근원적인 데 있다. 비슷하게 닮아가기를 요구하는 사회, 내가 하는 모든 행위와 생각이 작아 보이고 무가치하게 느껴지게 하는 데에서 오는 혐오감에서 기인한다. 판에 박힌 일과 책임으로 이어지는 일상을 참고 살아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습관처럼 이를 거부하게 되는 것은 항상 동경하는 그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은 진짜 자신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신이 원하는 가치를 실현하지 못한 채 현실과 동경 사이, 그 어디에도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해 여전히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자신이 동경하는 세상보다 이 삶이 더 가깝게 자리 잡고 있다면 이 삶을 말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데도 말이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은 내 것이 아니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그 삶을 내 것으로 만들어보려 무진 애를 써보았다. 그것이 바로 내가 해온 투쟁이다. 하지만 나는 성공하지 못했다. 먼 곳을 바라보는 동경은 눈앞의 일상에 구멍을 내기 일쑤였으니까. / 111p

 

 

나는 오직 올바른 사람이 되고 싶을 뿐이었다.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의 전부였다. 올바르고 진실하며 정의로운 사람. 사람들의 눈을 거리낌 없이 대할 수 있는 사람, 누구든 신뢰할 수 있는 사람.

하지만 실제로는 그와 정반대였다. 나는 책임져야 할 곳을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비겁한 사람에 불과했다. 지금도 나는 비겁하게 도망치고 있지 않은가. / 263p

 

 

  나의 투쟁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원하건 원치 않았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나와 나를 둘러싼 그 모든 것들의 이야기를 글로 써내는 것. 그곳에 나의 존재적 가치가 있고, 삶의 가치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 소설을 다 읽고 나니 그에게서 또 한 번 묵직한 잽을 얻어맞은 기분이다. 비록 주제가 사랑과 가족을 이야기하고 있더라도 1권만큼이나 강렬하고 그래서 손에서 놓을 수 없는 힘을 느꼈다. 나는 언제쯤 적당히 타협하고 아름답고 긍정적인 것에만 집착하는 태도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내 삶의 이면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는 일이란 정말로 가능한 것일까. 적어도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는 그렇게 했다. 저자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써내려가고 나면 그 뒤에는 무엇이 남을까. 가장 마지막 권을 읽게 되면 알 수 있을까. 아직 읽지 않은 그의 이야기가 계속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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