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내내 지긋지긋 했다. 어린 시절이 이렇게 엉망인 것에 성이 나서. 이렇게들 방치되어 쓸데없이 휩쓸려 어찌 살까 끔직해서. 오래 전 영화로 보았을 때 맞닿지 않았던 이유도 같을 것이다. 다행히 이런 일련의 못 된 과정을 겪어도 제대로 어른이 되었다는 것인데 어디서든 가능했음 좋겠다.요즘 자주 일어나는 아동학대 사건을 대하면 책 속 상황보다 더 못됨을 본다. 울프에겐 그나마 간헐적으로 작용하는 가족이 있었으닌까. 이런 가족은 가족의 흉내 조차 낼 수 없다고 했지만.가끔씩이라도 들여다 보아주는 어른이 있긴 했으므로 아이는 가끔 근사한 자신을 흉내내보기도 한다. 그 바람들이 모여 그 고인물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 지도 모른다.아이들의 세계도 삶이어서 얼마나 나쁜 유혹들이 길가의 돌멩이처럼 산재하는 지. 술, 담배, 총 이것만으로도 이들은 황폐해지고, 거친 말들은 부추켜져서 삶을 말아 먹는다.‘지구 최후의 아이들‘에서 핵폭발 이후의 세상에서 다시 학교를 여는 어른에 주인공은 의문을 제시한다. 이게 무슨 소용이냐고.공부만 하라는 시절이 안스러워도 그 시절을 그렇게 채우며 선한 것과 하고픈 일을 찾아가는 가장 빠른 방법일 것이다. 우선 쭉 뻗은 길이니. 그 후에 갈림길에 들어서도 늦지 않을 것이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한 바로 그 이유처럼.지금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 발생의 원인 중 하나가. 세상에서 나이 어린 이들에게서 발생하는 사건들의 이유가 아닐까 싶다. ‘즉 이미 나를 이리저리하게 재단한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지면 내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공부도 잘 하고 운동도 잘 하는 사람으로, 품위 있고 대단한 소년으로 나를 소개할 수 있을 터였다. 내 말을 의심할 이유가 전혀없는 사람들은 내가 바로 그런 소년이라 믿을 테고 그렇거 되도록 해줄 것이었다. 사람들의 불신만 제외하면 내 기적 같은 변화를 가로막을 장애물은 전혀 없을 터였다.‘‘척에게는 단지 힘들다는 이유로 책임을 거부할 권한이 없었다. 남자가 되는 놀이를 했으니 이제는 진짜로 남자가 될 시간이었다.‘‘나와 가장 친하게 지낸 친구는 내가 퇴학당한 지 몇 주 후에 좇겨났고, 우리 둘은 분노를 향해 질주했다. 나는 분노로 나 자신을 지치게 만들었다.그러다가 군에 입대했다. 안도감과 함께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제복과 계급과 무기로 굴러가는 삶 속으로 돌아오니 좋았다.‘
역사라 부르기엔 너무 가까운 20여년 전에 시기별로 쓰여진 글들을 읽는다는 것은 알던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 든다. 지금 이 시절도 20여년 후엔 또 이렇게 다가올 것이다.모든 것이 드러나는 해라는 경자년에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 했던 우리의 실체와 마주하며 선진국의 민주시민이라 불리곤 한다. 인간의 일이 다 그렇듯 어느 면은 이뤄진 듯도, 어느 면은 한참 모자란 형태로 이 지위에 놓여져 있다. 어중간 해서 그렇다고도, 아니라고 하기엔 아쉬운 위치.잠시 멈춰 뒤돌아 눈밭의 발자국을 보는 기분이었다. 이렇듯 굴곡지게 지리하게 목숨까지 받쳐가며 울고 싸우고 다신 안 그래지길 바라며 배워가며 온 길이 이랬었다고 한다. 그런 지난함에도 이유가 있었다는, 또 수습하여 갈 일들이 한가득이라 한다. 한 개인의 역사와 한 세계의 역사가 가는 방법이 같다는 생각을 한다.‘(2006.4) 분명히 거기에는 정권의 통치 형태에 대한 개관적 비판 이상의 어떤 것이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정치적 여론이라기보다는 사회심리학적 특이현상에 가까운 것이다. 나는 그 심리학적 특이현상에 ‘공황적 가학 심리‘라는 이름을 붙이고자 한다. 그것은 그 근거에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에서 공황적이고, 타자에 대해 대단히 폭력적이라는 점에서 가학적이다. 다른 말로 윤리적 아노미에서 연유하는 공격성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현 정권은 바로 그러한 대중의 공황적 가학 심리에 의해 하나의 ‘희생양‘의 자리에 처해 있는 것이다.‘‘옛날 옛적 80년대에 어떤 민족해방파 평론가가 호기롭게 하던 말이 문득 떠오른다. ‘‘날 따뜻하니까 식민지 아닌 것 같지?‘‘ ‘
책은 반드시 복기를 해야 한다는 글을 며칠 전에 읽었는데 이 책은 아끼며, 조급해 하며 읽고는 놀라움으로 커피를 마시며 자연스레 그 일을 하고 있는 나를 보게 되었다. 오랫만이다. 새로이 경이롭게 구축된 세상의 면모를 쌓아가며 흥미진진 하게 읽었다. 지진 발생율이 높아가고 있는 이 즈음에 흔들을 보닐할 수 있는 오리진이라니. 이렇게 시의적절한 소재가 있을까 싶다. 작가의 영리함이다. 새로운 지구, 모든 문명이 허물어진 계절들, 암석에 대해 배울 때마다 그 낯선 용어 만큼 와 닿지 않던 암석의 질감을 일상적 언어로 보여 주는 작가의 명석함에 감탄한다. 글 전체에서 스톤이터의 입 속에서 으적거리며 부서지고 으깨지던 돌조각 같은 덜컥거리는 흔들을 느끼게 된다. 입에서 느껴지는 흙먼지라니. 꽤 몰입해서 읽은 모양이다. 작가가 구축한 새 세상에 감탄하는 건 반지제왕 이후 오랫만이다. 이 인칭으로 서술되는 이 신선한 낯섬과 고요 대륙 안에서 상용되는 생경한 언어들이 익숙해지면서 반전 처럼 등장하는 관계도라니. 눈이 동그래져서 읽었을 것이다. 아하~~~! 그리고 그 느닥없는 결말은 재앙에 숨이 끊긴 그 순간이겠지?나사가 후원하는 런치패드 워크숍에 참가하며 발상했다는 작가는 그 자신만만한 재치만으로도 매력적이다.‘그 순간 너는......정신을 놓았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다. 그저 충격이 너무 지독했기 때문이다.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온갖 시련을 견뎌 왔고 누구보다 강한 너지만. 그런 네게도 한계는 있다. 사람이 찾아온 건 그로부터 이틀 뒤다.너는 그 이틀을 죽은 아들과 함께 보냈다. 잠에서 깨어 화장실에 가고, 냉장실에서 음식을 꺼내 먹고, 수도꼭지에서 가늘게 흐르는 물을 받아 마셨다. 그런 건 딱히 생각하지 않아도 할 수 있으니까. 그런 다음 너는 우체의 곁으로 돌아갔다.‘‘향의 주택들이 주로 한 기지 유형을 고수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통일성은 외부에 시각적인 메시지를 보낸다. 잠재적인 공격자들에게 향의 구성원들이 자기 방어라는 목적과 의지를 중심으로 서로 동등하게 단결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이 향의 시각적 메시지는 ......혼란스럽다. 거의 무신경할 정도다 . 해석할 수가 없다. 차라리 적대적인 사람들로 가득한 편이 이보다 덜 불안할 것이다.‘
근거없이 ‘장미의 이름‘의 도서관을 지키던 장님 수도사를 연상시키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 중 17째 권이다. 남미 문학을 이해하는 일은 내겐 좀 벅찬 과제지만 그 성향 속에서 묶여졌을 이 전집을 볼 때면 뿌듯해진다. 조금씩 맛 볼 수 있는 대단한 성찬을 마주한 기분이다. 재료는 무엇이며 조리법과 그 맛은 어떠한 지 설명서가 첨가되어 있기까지 하다.단편들이건만 때론 녹록치 않은 무게감까지!1838년에 태어난 빌리에 드 릴아당 백작은 상상속에서 결투하고 공상하는 슬픈 주인공을 스스로의 모습이라 여긴 빈곤한 신사였다고, 아나톨 프랑스와 바그너의 친구였다고 소개된다. 작가의 ‘잔인한 이야기‘라는 작품집에서 발취된 작품들답게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불러 일으킨 이상현상을 다룬 ‘베라‘는 환상문학의 성격을 띈다. 죽음의 사도 같은 사형집행인을 우연히 만나 밤새 자리를 옮겨가며 놀다 점점 흉흉한 느낌에 사로 잡히는 젊은이를 다룬 ‘지난 파티에서 만난 사람‘이나 허세를 부리며 보기좋게 위기를 모면할 것 같던 순간 허를 찔리는 ‘체일라의 모험‘은 포의 분위기를 풍긴다.문자 그대로를 글로 보여주는 ‘희망이라는 고문‘, ‘이자보여왕‘의 질투의 잔인함은 셜리 잭슨의 글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어느 슬픈 작가의 슬픈 이야기‘는 결투가 얼마나 하찮은 일로 행해지는 지, 그것이 한 때는 유행처럼 번져서 남자어른들이 얼마나 부질없이 목숨을 잃었는 지를 읽으면 그 자식을 키운 어머니들이 가련해진다.
시리즈로 된 책을 순서 없이 읽으면, 그 사람들이 친밀해지기 전의 객관적 태도를 소설 속에서도 볼 수 있다. ‘구르는 돌‘ 보다 이 작품이 전작이어서 ‘스리 파인스‘ 라는 작은 동네의 배경이 도드라진다. 단풍이 화려하게 물들던 동네가 비에 축축히 젖어 들어 낙엽냄새 진동하고, 태풍에 그 낙엽이 정신없이 날리는 중에 책을 읽게 된다. 뭐 이런 일로 이리 큰 사건을 만들어내나 싶은 못난 살인범이 아쉽다. 모든 사람이 모두 달릴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은데, 누군가는 굳이 밥벌이를 안 해도 된다면 그냥 즐기며 살아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것을 나무라고 나서면 죄지은 기분이 되어 버리는 것은 우리의 살아온 습관 때문일 것이다. 늘 굶주릴까 쫓겨온 인간이 넉넉해진 세상에서도 무일을 태만이라 부르게 되는 것이. 자연도, 사람도 숨 쉴 공간이, 그냥 두어도 되는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싶다.‘그는 갓 죽은 사람의 손을 볼 때면 언제나 아픔을 느꼈다. 그 손이 잡았을 온갖 사물과 사람들이 상상되는 것이다. 음식, 얼굴들, 문손잡이들, 기쁨이나 슬픔을 표하기 위해 취했을 온갖 손짓.그리고 마지막 손짓은 틀리없이 자신을 죽인 그 타격을 막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가장 가슴을 아프게 하는 건 자기 눈을 가리는 흰머리를 무심결에 쓸어 내 본 적이 없을 젊은이들의 손이었다.‘‘지혜로 이끌어 주는 네 가지 문장.미안합니다.모르겠습니다.도움이 필요합니다.내가 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