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노보 찬가 - 정글자본주의 대한민국에서 인간으로 살아남기
조국 지음 / 생각의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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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진보집권플랜」을 보고 조국 교수를 처음 알았다. 그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잘 생기고 키도 큰데다 진보적 성향까지 갖춘 그를 아주 잠시나마 쓸데없이 시기·질투 했다.

 

책은 「보노보 찬가」가 더 재미있었다. 「진보집권플랜」은 인터뷰 형식이기 때문에 인터뷰어의 의도에 따라 전체 내용의 방향이 정해진 듯 했다.

그리고 「진보집권플랜」은 정권의 꼴사나운 짓들을 1년이나 더 지켜본 탓일까. 다소 거칠고 투박한 느낌이었다면 이 책 「보노보 찬가」는 좀 더 논리적이고 다듬어진 느낌이었다. 하긴 이런 정권하에 살면서 하루가 다르게 열 받는 일이 늘어 가는데 1년이면 엄청난 ‘물리적 스트레스량’의 증가는 필연적 결과일 것이다.

 

언젠가 봤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통해 보노보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거친 침팬지와는 달리 위계질서가 무의미하고 유인원 중 가장 온순하며 친화적인 동물이 보노보이다. 갈등 해결을 위해 침팬지는 대부분 폭력적 행동을 보이지만 보노보는 성행위(또는 유사 성행위)를 통해 갈등을 해결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하지만 지금 현재 한국의 현실에서 ‘보노보’가 필요한지 ‘침팬지’가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2년 전 출간된 이 책에서는 각박하고 투박한 한국의 현실에서 ‘보노보’와 같은 개인과 집단, 기업과 단체가 많아져야 한다고 역설하는데 2년이 지난 지금 ‘보노보’보다는 ‘침팬지’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장기전’을 준비하며 ‘가치전쟁’을 벌이고 ‘스몰 볼’을 구사하라.”

“민주화운동과 여러 분야의 민중운동에서 수십 년 헌신했던 ‘역전의 용사’들이 모여 있는 진보진영은 이러한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직시해야 한다.” (p.67)

 

“진보에게 필요한 것은 비수 같은 날카로움이나 망치 같은 파괴력만이 아니다.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을 중시하고, 자신에 대한 비판도 웃어넘기며 상대를 끌어안고, 자기 정파의 이익을 먼저 양보하는 포용력과 넉넉함을 보고 싶다.” (p.78)

 

조국 교수는 이 책에서 무엇보다 ‘보노보’ 적인 가치와 성격을 지녀야 할 대상을 진보진영에 두고 있다. 진보가 그렇게도 듣기 싫어하는 말이 ‘진보는 분열해서 망한다’임에도 늘 진보진영은 분열한다. 다들 너무 잘나고 똑똑하고 전투력이 뛰어나서 부딪히고 파열한다. 고즈넉한 강가의 조약돌이 아니라 협곡에 흩어진 기암괴석 같다. 그래서 서로 껴안지 못한다. 생채기만 날 뿐이니까.

 

나도 ‘역전의 용사’고 너도 ‘역전의 용사’니까 서로 잘난 체 하지 말고 ‘보노보’처럼 사이좋게 어깨동무하고 힘을 합쳐보자 라고 역설하지만 이 책이 출간되고 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진보진영은 서로 잘난 체 하고 있다. 눈앞에 거의 다가왔던 먹이도 먼저 뛰어드느라 놓치게 된 꼴이다.

그렇다면 조국 교수의 ‘보노보 찬가’는 실패했다. 적어도 진보진영에 있어서는 말이다.

 

 

촛불의 ‘진화’가 필요하다.

첫째, 사회·경제적 약자를 위한 복지예산 지키기 운동이 필요하다.

둘째, 고용불안과 저임금에 허덕이며 촛불을 들 처지도 되지 못했던 800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이들을 정규직으로 단계적으로 전화시키는 방안 마련에 나서야 한다.

셋째, 의료·보건 분야가 시장논리로 재편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p.63∼64)

 

촛불도 전혀 ‘진화’하지 못했다. 국민 저변에 깔려 있던 정권에 대한 불만과 정치적 민주주의의 퇴행에 대한 분노를 제대로 그릇에 담아내지 못했다. ‘억지로 불러서 나온 촛불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억지로 그릇에 담을 수 없었다.’는 논리는 핑계에 불과하다. 파편화된 대중의 심리와 행동양식을 겸허하게 분석하고 겸손하게 모으려는 노력을 진보진영에서는 전혀 하지 못했다. ‘하지 않았다’라고 까지는 쓰지 않겠다. 왜냐하면 그간 정치검찰과 공권력을 동원해 끊임없이 겁주고 협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해도 진보진영은 촛불로 표현되는 국민 마음에 어깨 걸어주는 ‘보노보’도 되지 못했고, 하나부터 열까지 엉망진창인 정권을 향해 위협을 가하는 ‘침팬지’도 되지 못했다.

 

100% 실패다.

 

촛불의 민심을 제대로만 그릇에 담아냈다면 이번 총선에서 어렵지 않게 원내로 들어갈 의석수를 장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뭐 이미 지나가버린 일이야 돌이키면 속상할 뿐이고 아직도 제대로 진보통합을 이뤄내지 못한 현실도 답답할 뿐이다.

 

유시민 통합진보당 공동대표가 늘 강조하는 것처럼 ‘정치는 과정이 아니라 결과로 말하는 것’이다. 의석수가 모자라 입법하나 하지 못하는 진보진영은 가치를 둘 수 없다. 도무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자들이 ‘한번만 믿어 달라. 기회를 달라’라고 하면 설득이 되지 않는다.

 

‘정치는 과정이 아니라 결과로 말하는 것’

이다.

 

총선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벌써 유인물과 후보별 공약 팜플릿이 넘쳐나야 하는데 너무 조용하다. 보궐선거도 아니고 총선인데 말이다. 아예 관심이 끄라는 것인지 고담시티인 대구에서는 그런거 나눠줘봐야 어차피 될 사람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여튼 너무 조용하다.

그래서 불안하다.

남은 시간이 너무 없으니 ‘보노보’로는 어림도 없을 것 같다. ‘침팬지’중에서도 가장 과격하고 폭력적인 녀석이 필요하다. 그래서 뒤집어엎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잘생기고 멋있고 똑똑하고 진보적이기까지 한 조국 교수가 한 달 안에 「침팬지 찬가」를 출간해주면 좋겠지만 그것도 물리적인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우리 짱돌들이 일단은 ‘보노보’처럼 어깨를 걸고 ‘침팬지’처럼 무시무시하게 투표장으로 나가야 한다. 그래서 갈고닦은 엄지와 검지로 꾸욱 눌러 찍어야 한다.

얼굴은 웃으며 손은 비장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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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르수 우잘라 - 시베리아 우수리 강변의 숲이 된 사람
블라디미르 클라우디에비치 아르세니에프 지음, 김욱 옮김 / 갈라파고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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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만 해도 연해주 지역(시호테 알린 산맥)에는 고양이과 동물 중 가장 큰 몸집을 자랑했던 시베리아 호랑이의 주 서식처였다. 책에서도 주인공인 데르수 우잘라가 호랑이를 맞닥뜨렸던 몇 번의 경험이 있었고 탐사대를 덮쳐 개를 물어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시 무분별하게 사냥된 고양이과 동물들의 개체 수는 엄청났다. 종의 멸종을 가져올 정도였다고 하니 상상하기도 어렵다.

 

“도처에 중국인들이 지어놓은 사냥용 오두막과 검은담비를 잡으려고 쳐둔 덫이 발견되었다.” (p.135)

“하루가 멀다 하고 숲에서 불이 났다. 조선인들이 밭을 일구기 위해 일부러 불을 질렀던 것이다. 그 와중에 차츰 살 곳을 잃은 검은담비는 먼 데로 도망쳤고, 평생은 사냥과 낚시로 생활해온 원주민들에게는 삶을 지탱할 힘이 없었다.” (p.184)

 

자연과 함께 동화되어 필요한 만큼만 자연으로부터 공급받고 그들과 친구가 되어 살아가던 원주민들에게 중국인과 조선인의 등장은 그들의 삶이 통째로 짓이겨지는 절망이었다. 친구가 되어주지 않고 약탈하고 심지어 중국인은 고리대금업까지 자행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계곡을 타고 조잘거리며 흐르는 시냇물은 전날 저녁 갑자기 불어 닥친 바람에 대해 이야기해주었고, 마른 풀은 며칠 동안 비가 오지 않아 굶어죽을 지경이라고 한탄했다는 것이다.” (p.122)

 

“별이 뭘까? - 저기 별 떴다. 보면 된다. 달은 대체 뭘까? - 눈 있는 사람, 달 본다. 저게 달이다. 데르수는 내가 자연현상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면 눈에 보이는 그대로 설명했다. 무한에 대한 공포나 완전한 허무의식, 이것은 어쩌면 문명인만이 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p.123)

 

데르수 우잘라는 ‘문명’의 관점에서는 ‘야만’인이다. 하지만 그는 ‘문명’인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자연’인 이었다. 매일 보는 산과 나무, 시냇물, 물고기, 사슴, 바람, 별, 하늘 등 모든 것들이 그대로 친구였다. 책에서 데르수는 모든 동물을 말할 때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누구 오는지 모르나, 대장? 너구리 와, 오소리 와····.까마귀도 와. 까마귀 없으면 쥐 와. 쥐 없으면 개미 와. 타이가엔 ‘사람’ 많이 산다. 그는 타이가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을 친구로서 사랑했다.” (p.206)

 

러시아어 구사력이 극히 떨어진 탓도 있겠지만 100여 년 전 시호테 알린 산맥 지역(연해주 지역)을 살던 사람들에게는 내 가족과 똑같은 존재가 바로 동물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기독교를 믿지 않고 러시아어를 쓰지 않고 총을 가지지 않았다고 해서 ‘야만’인이라 부를 수 없다. 결코 그렇지 않다. ‘문명’이라는 잣대는 그들이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이다.

책에서 짧게 조선인에 대한 언급이 있다. 당시 일제 강점기의 고통을 견디지 못해 한반도 북쪽지역으로 이주하거나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이 많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또 다른 삶의 터전을 빼앗는 행위가 되었던 것을 알지 못했다. 물론 중국인들처럼 약탈하고 원주민을 노예로 부리는 일은 없었지만 터전을 잡고 살아가던 동물과 원주민을 삶을 빼앗아 버렸다는 것에 있어서는 안타깝고 미안했다.

 

이 책을 집필한 아르세니에프는 군인을 포함한 탐사대를 꾸렸다. 당시 동북아시아의 정세가 한 치의 멈춤도 없이 급변하고 열강들의 침략이 거세던 때였다. 그런 중에도 탐사와 기록에 대한 그의 열정이 놀라웠다. 지형적인 특성 상 강우량이 엄청나고 폭우가 많이 쏟아진다는 시호테 알린 산맥 주변을 걸어서 탐사했다는 것 또한 놀라운 사실이다. 그 때는 제대로 된 지도도 없었고 지도 상 공백 지역이었다고 하니 걸어서 지도를 만들어 낸 셈이다.

 

 

“나는 일기장을 꺼내 들었다.” (p.168)

“저녁 늦게 일기를 썼다.” (p.205)

 

또 그는 철저한 기록자였다. 머리말에 러시아 국민 작가로 존경받는 고리끼의 편지가 실렸다. 이 책 초판을 본 고리끼가 너무 재미있고 감동적이어서 친구들에게 읽히고자 2판 몇 권을 보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 고리끼가 편지 말미에 이렇게 말한다. ‘감사의 표시로 저의 보잘것없는 책을 몇 권 보내드립니다.’

아르세니에프는 열정이 넘치는 탐험가이자 탐사를 글로 옮기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폭풍우를 지나고 난 뒤에도, 호랑이가 덮치고 간 뒤에도, 굶주림에 사경을 헤매고 난 뒤에도 일기를 쓰고 기록했다.

철저한 기록만이 역사를 만들고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다.

 

결국, 모든 탐사를 마친 뒤 늙은 데르수는 대장과 함께 도시로 간다. 이미 나이 50을 훌쩍 넘긴 데르수는 더 이상 타이가 밀림에서 사냥을 하는데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다. 점점 약화되는 시력은 그것을 더욱 악화시켰다.

 

당연한 결과로 데르수는 도시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긴 시간 탐사를 마치고 도시로 돌아온 아르세니에프도 탐사를 기록하고 정리하는데 바빠 데르수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대장! 또다시 데르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장, 미쳤다! 대장, 물마시고 돈 준다! 대장, 강에 돈 안 줬다! 그는 아무르 강에 대해 이야기했다. 거기 물 많다! 왜 돈 주고 물마시나...” (p.352)

 

데르수에게는 도시의 모든 것이 이해할 수 없었다. 작은 상자에 들어가 답답하게 사는 것이나 아무 강이나 들어가 마음껏 먹을 수 있던 물도 돈을 주고 사먹어야 하고 땔감은 언제든 제공해 주던 산이라 공원에서 나무를 베지만 주변의 신고로 경찰서까지 잡혀가게 된다.

어쩌면 데르수를 가장 잘 알고 있던 아르세니에프 조차 ‘문명’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야만(자연)에 익숙해져 있지만 조금만 시간이 흐르면 문명(도시)에 잘 적응할거야. 그럼 데르수도 더 편할거야’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야만(자연)’에 길들여져 ‘문명(도시)’에 적응하기 어렵듯이 ‘문명(도시)’에 길들여져 ‘야만(자연)’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얼마 전 모 방송에서 ‘최후의 툰트라’라는 이름으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시베이라 동토에 걸쳐진 아름다운 툰트라를 볼 수 있었고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원주민의 모습도 볼 수 있었는데 데르수 우잘라에 대한 사진이 남아 있었다면 아마 이렇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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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도바 2016-08-09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클라우디에비치 아르세니에프의 데르수 우잘라를 읽으면서 이 블로그를 찾아왔습니다. 서평이 너무 아름답고 정밀하여 감탄했습니다. 친구신청하고 갑니다. 아...러시아 툰드라사진도 정말 좋습니다. 처음 봅니다. ^^*
 

BBK 혐의를 혼자 뒤집어쓰고 아직도 천안교도소에 수감중인 김경준씨의 육성 진술을 공개했다.

지금 가카의 힘이 최고를 달리던 그 때, 김경준에게 전방위적인 압박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은 물론이고 아내까지 송환해 조사한다고 하니 홀로 남을 딸에 대한 걱정과 연민으로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카의 치부를 덮을 수 있을 정도의 보기 좋은 자필 편지를 쓰라는 검찰의 회유에 애매모호한 영어 편지를 작성했으나 다음 날 작위적으로 왜곡된 내용의 편지가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또 가카에 대한 BBK혐의가 날로 짙어지던 때 갑자기 홍준표가 들고 나와 당시 민주당을 실신 KO시켜버린 기획입국에 대한 편지.

이것에 대한 진위논란은 현재진행형이고, 그 전에 박근혜쪽 인사가 자신에게 선거 전 미리 입국해 줄 것을 종용했다는 육성 진술도 공개됐다.

방송이 나가고 이틀이 지나고 있지만 여전히 한국에 존재하는 모든 언론사의 귀는 닫혀 있다. 이거야말로 특종감인데 말이다.

왜 이렇게까지 한국의 언론이 엉망진창이 되었는지는 봉주 8회 방송 2부에서 그 단면을 유추해 볼 수 있었다.

 

현재 한 달이 훨씬 넘게 파업을 진행중인 MBC와 뒤따라 파업을 하고 있는 KBS, 11일 부터 파업 예정인 YTN의 전,현직 기자와 피디가 나왔다.

언론의 사명을 잊은 채 정권의 개가 된 언론사와 그 우두머리가 어떤 모습인지 낱낱이 공개했다.

파안대소가 나올 정도로 비상식적인 일들이 21세기에 일어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회의 공기(公器)의 의무를 가진 언론이 진실을 파헤치고 부조리 고발을 하지는 못할 망정 저기 어디 제3세계 독재국가에서나 있음 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연실색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렇게까지 무리를 해서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서라도 그 사람들을 지상파 언론의 사장으로 내려 앉혔는지 이제야 잘 알 것 같다.

뒤늦게나마 '이대로는 도저히 안된다'라는 자괴감을 안고 용감하게 회사밖으로 뛰쳐나온 MBC, KBS, YTN의 파업중인 직원들과 노동자들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지지한다.

 

빨리빨리 해가 뜨고 져서 시간이 빨리 흐르기를 기도해 본다.

 

 

 

 

 

 

 

 

 

 

 

김용민 교수의 검찰 출두가 아침에 전해졌는데 큰 일이 없어 다행이다.

숱한 공격과 방해 공작에도 여전히 시시덕거리며 종횡무진 여론의 파도를 만들어 내는 나꼼수 3인의 안위위를 위해서도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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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팝니다
켄 실버스타인 지음, 정인환 옮김 / 이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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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을 파는’사람과 ‘물건을 사는’사람의 자유로운 의사소통과 치밀한 계산, 합리적인 협의와 조정으로 가격이 결정된다. 이것은 작금의 시장경제를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래서 정부나 국가는 되도록 시장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라 여긴다. 적정한 수준에서 가격이 형성되고 등락의 폭이 현격하지 않으면 시장은 잘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물건을 파는 사람’과 ‘물건을 사는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힘의 차이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힘이 세고 크면 정부나 국가의 간섭조차 배재된 시장경제에서 홀로 왕노릇을 할 수 있다. 누구의 간섭과 견제도 받지 않는 한쪽의 일방적 시장가격 결정은 다른 한쪽에게는 폭력이 될 수밖에 없다.

허구한 날 두들겨 맞지만 찍 소리도 낼 수 없다. 저 쪽은 그 누구도 대들 수 없는 절대국가 ‘미국’이니까.

 

한국도 숱하게 맞아 왔다. SOFA 재협상을 그토록 울부짖어도 ‘어느 집 개가 짖나~’라며 애써 모른 체하고 무시해 왔던 한국의 처사는 어찌 보면 불쌍하고 애처롭다. 얼마나 힘이 없고 때린 놈이 무서우면 ‘아예 모른 체하고 말겠다~’라고 체념해 버리겠나.

미군에서는 퇴물로 여겨지는 F-16전투기를 최신 전투기라고, 최신 전투기라고 떠들어대며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사오는 예의쯤은 당연히 갖추어야 할 자세다.

 

 

“군수산업계는 새천년을 맞아 돈도 없고, 무기도 필요 없는 제3세계 국가를 상대로 값비싼 무기를 판매함으로써 생산 라인을 유지하는 것을 주요 전략으로 삼고 있다.” (p.81)

 

미국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은 슈퍼볼도 할리우드도 월스트리트도 아닌 군수산업체이다. 이것은 기존의 여러 책에서 확인한 바다. 하지만 군수산업체와 네오콘, 그리고 미의회의 삼위일체 결합이 어떤 매개와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었다.

이 책 「전쟁을 팝니다」읽으며 이러한 불분명한 추정에 대한 사실관계를 분명히 할 수 있었다.

 

 

“군수 업체가 워싱턴 정가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다. 선거 자금을 대 주기도 하고, 거액을 들여 로비를 벌이기도 한다. 하지만 미 국방부와 군수업계 사이에 긴밀한 연관 관계 때문에 공직에서 물러난 군 장교 출신자나 국방부 고위 인사를 영입하는 게 특히 유용하다.” (p.242)

 

소련의 붕괴로 냉전체제는 분명히 상실되었지만 방만하고 거대하게 운영되던 군수산업은 쉽게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또 다른 ‘대상’이 필요했다. ‘전쟁을 팔 수 있는’ 대상이다.

명확하게 특정하지 못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현실적이지 않아도 괜찮았다.

 

 

전쟁과 군사적 긴장은 무기 업체에 희소식이다. 소련의 붕괴는 전 세계 무기중개상들을 어려움에 처하게 했다.” (p.37)

“‘군사적 위협 부풀리기’가 주요 업무인 국방부 평가국” (p.49)

 

국방부나 군수산업체가 운영하는 안보집단에서 잠재적인 위협을 들먹거리면 바로 언론에서 부추김을 한다. 그 부추김에 편승해 다시 안보집단에서 소설을 만들어 낸다.(이를테면 북한의 재래식 노동미사일이 대륙을 넘어 하와이와 알래스카까지 타격할 수 있다는 등의) 미 의회에 포진한 군수산업체와 밀접하게 연관된 의원들이 정부를 압박한다. 결국 국방부 예산은 대폭 증강한다. 그 돈은 여럿이서 나눠먹는다. 그리고 소화가 다 되기도 전에 눈에 불을 켜고 또 찾는다. ‘전쟁을 팔 수 있는 대상’을

 

 

책의 저자인 실버스타인은 탐사전문 언론인이다. 책에 소개된 여러 인물과 사건들이 신문을 읽는 것처럼 신속하고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군수산업체가 미국 정부의 눈가림 아래 전 세계에서 행해 온 파렴치한 짓들을 상세히 알 수 있다. 책에 등장하는 무기 로비스트들 중 많은 수가 나치출신의 군인들이라는 사실에 아연실색했다. 전범으로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할 자들이 막강한 실력의 로비스트가 되어 전 세계를 누비고 다녔었다.

남미,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중동, 동유럽을 포함한 수많은 국가의 쿠데타에 간섭하고 실질적인 무기 제공과 판매 또는 용병 파견을 통해 장사질을 했다. 물론, ‘공산주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또는 ‘그 나라 국민의 생명과 인권 보호를 위해’등의 그럴듯한 핑계를 내세웠지만 모두 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저 퇴물이 되어가는 수십, 수백억의 무기들을 처분해 줄 말 잘 듣는 애완견 같은 대상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이것은 인도·파키스탄 분쟁의 예를 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당시 미국은 좌파 정권이던 인도보다 파키스탄을 선호해 엄청난 양의 무기를 지원하고 팔았다.(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지금 파키스탄은 완전히 불량국가 아닌가) 그런데 아쉬움이 있었는지 인도 군부와 몰래 만나 자신들이 파키스탄에 무기를 팔았다는 사실을 일부러 발설한다. 그리고는 또 무기를 팔아치운다.

이 얼마나 꼼꼼하고 성실한 장사꾼인지.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민간 군사 업체가 미 정부로부터 한 해 따내는 계약만 적게는 100억-200억 달러에서 많게는 1000억 달러 규모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대부분의 재건 공사를 미국 업체가 따 내며 막강한 이득을 챙기는 사이, 재건 복구의 수혜자여야 할 이라크 인들은 철저히 소외되고 있다.” (p.9)

“이라크 재건 복구 과정에서 민간 업체가 따 낸 대규모 계약은 거의 모두 경쟁 입찰 방식이 아니라 단독 응찰에 따른 수의계약 방식으로 이뤄졌다.” (p.10)

 

대단한 승리의 전쟁이라 떠들어대던 미국의 이라크 침공 전쟁은 쓸 곳이 없어 방치되던 첨단 무기들을 소모하는 전쟁 놀이터였다. 빠짐없이 완전하게 부숴놓고 ‘재건’을 한다는 명목으로 또 군수산업체에 돈을 얹어준다. 그리고 콩고물은 두루 챙긴다.

아~ 아름다운 순환 고리~!!

 

 

애초부터 군, 정부, 의회와 결탁한 군수산업체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힘을 지닌 독불장군이 되었다. 이것은 지금도 유효하다. 여전히 그들은 전 세계에 두루 자신들의 무기를 팔아치울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전력이 어떻든 상관없이 영입한다. 그리고 반공·테러의 위협을 들먹이는 상·하원 의원들에게 뇌물을 먹여 포섭한다. 그래야 끊임없이 압력을 가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와 군은 그 올가미에 늘 걸려드는 손쉬운 구매자다. 애써 설득하기도 전에 지갑부터 열고 있으니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저자인 실버스타인도 국가 공조나 경제블럭처럼 군사블럭을 만든다거나 세계기구를 통한 제어나 규제는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민간차원에서 계속해서 문제제기하고 보도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게 만드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한다.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근신하여 깨어라 너의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베드로전서 5장 8절)]

 

 

물론, 이 책의 상황과는 딱맞아 떨어지지는 않지만 텍스트만 놓고 보면 잘 적용해 볼 수 있는 구절인 듯하다.

먹이를 찾아 두루 다니는 사자에게 먹히지 않으려면 잘 알아야 한다. 그 사자가 다니는 길에는 얼씬도 하지 않아야 한다. 사자를 피할 수 있는 도피처를 마련해야 한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한다.

FTA다 SOFA다 내줄 거 다 내주고 도대체 뭘 얻어올 수 있는지 모르겠다.

남의 나라 해군기지 만들어주느라 제 나라 국민들 잡아 족치는 꼴이니 말해 무엇 하나 싶다.

다시 한 번 동북아시아의 전쟁 분위기를 고취시켜 주는 장단에 덩실덩실 칼춤을 추고 있다.

아~! 해군기지 만들어지면 이 책에 등장하는 군수산업체는 늴리리 꽃춤을 추며 잔치를 벌이겠다.

눈치도 보지 않고 경쟁 구매자들보다 앞서 지갑을 열고 ‘사라’고 말 떨어지기 무섭게 달려드는 구매자는 판매자에게는 완전한 호구일 뿐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전쟁을 팔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할 것이다. 여론을 조작하고 거짓으로 실험결과를 떠벌리고, 불필요한 군사적·정치적 긴장을 조성하며 말을 잘 듣지 않으면 경제적 압박을 가할 것이다.

정신 바짝 차리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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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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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글은 숨 가쁘다. 읽고 이해하고 가슴까지 적셔야 하는데 글은 이미 저만치 가있다.

「칼의 노래」를 읽고 김훈의 글에 완전히 빠졌다.

이전까지 내가 본 어떤 글과 문장, 표현과는 달랐다. 매료됐다.

 언젠가 내 몸에서 짓이겨져 내가 글이 되고 글이 내가 되는 경험을 꿈꾸고 희망했다.

 

그런데 김훈의 글에서 그걸 발견하고는 흠칫 놀랐다.

마치 내가 쓴 것 같았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김훈의 글은 아프다. 호흡이 짧아 글의 너머가 아득하다.

언젠가 반드시 오리라 기다리는 피안(彼岸)의 세계다. 그래서 몇 해 전 넋을 잃고 경탄했던 몽골 어느 사막의 일출과도 같다. 닿을 수 없고 만질 수 없다. 「공무도하가」부터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 책 「흑산」을 두고 설왕설래가 많았다. ‘이제는 김훈도 다 된 것 아닌가’ 하는 걱정부터 ‘이전의 작품들을 버무려 놓은 짬뽕에 불과하다’ 라는 혹평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김훈이기에 그런 얘기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흑산」을 어렵게 읽었다. 진작 사두고 꺼내 읽지 못했다. 매번 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희열과 함께 알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에 시달렸다. 이유는 정확하게 모른다. 하지만 결코 책을 놓을 수 없다. 며칠을 띄엄띄엄 어렵게 읽었다. 한 번 읽은 책은 될 수 있으면 다시 꺼내 들지 않는 독서성향을 가진 나지만 김훈의 책은 곱씹어 읽어야 했다. 다른 책 읽는 것보다 서너 배는 더 용을 쓰며 읽는다.

 

 

“나는 말이나 글로써 정의를 다투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다만 인간의 고통과 슬픔과 소망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나는, 겨우, 조금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말이나 글로써 설명할 수 없는 그 멀고도 확실한 세계를 향해 피 흘리며 나아간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또 괴로워한다. 나는 여기에서 산다.”

“늘, 너무나 많은 말을 이미 해버린 것이 아닌지를 돌이켜 보면 수치감 때문에 등에서 식은땀이 난다. 이 책을 쓰면서도 그러하였다. 혼자서 견디는 날들과, 내 영세한 필경의 기진한 노동에 관하여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p.387)

 

작가의 마지막 변이다. 나는 김훈을 직접 만나기는커녕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한 문장도 결코 쉽게 쓰지 않아 쉬이 이해하기 어려운 그의 말과 문장이 왜 내게는 가슴에 오롯이 박히는지 모르겠다. ‘다만 인간의 고통과 슬픔과 소망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는 김훈의 항변이 그대로 동감이 된다.

 

 

“토렴해 드리리까? 오늘은 물이 치받소. 배 부리려면 힘이 많이 들겠소.” (p.156)

 

“햇볕에 마른 빨래 냄새 같은 것을 풍기고 있었을까.” (p.322)

 

 

그의 글은 솔직하다. 이것은 내 생각이다.

일부러 꾸미거나 윤택을 내려 이리저리 끼워 맞추지 않는다.

 

 책에 등장하는 마노리, 박차돌, 육손이, 아리, 강사녀, 김개동은 천한 노비들이다. 정약전 황사영은 지체 높은 양반이다. 오칠구, 문풍세, 이판수는 그 중간쯤이다. 그런데 그들의 계급고하가 어떻든 김훈의 글을 통하면 피차일반이다.

나름의 고통과 슬픔이 실존한다. 그래서 선인도 악인도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삶의 가장 밑바닥에서 손바닥만한 하늘조차 들어볼 허리춤의 여유가 없던 자들에게 ‘주여~’ 라며 부르고 울부짖을 수 있는 천주의 존재는 그것만으로 구원이었다.

또 조선말기 어지러운 정국에서 하룻밤 사이에 당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고 죽이는 아비규환을 살던 지식인 정약전, 황사영에게 천주는 새 시대의 도래를 희망하게 했다.

오칠구와 문풍세, 이판수는 잡아들이고 죽이고 뜯어내며 현세의 천주를 이루려했다.

다 매한가지다.

 

 

“저것들은 대체 누구인가. 저것들은 왜 저러는가. 왜 죽여도 또 번지는가. 저것들은 어째서 삶을 하찮게 여기고 한사코 죽을 자리로 나아가는가.... 임금은 그것을 물었으나 신료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p.97)

 

“주여, 주여 하고 부를 때 노비들은 부를 수 있는 제 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눈물겨웠다. 호격에는 신통력이 있어서 부르고 또 부르면 대상에게로 건너갈 수 있을 듯 싶었다.” (p.104)

 

“마재 물가 마을에서, 처숙부들은 황사영에게 낮은 목소리로 천주교 교리를 설명해주었다. 황사영에게는 갈 수 없는 먼 나라의 새벽 강물 소리 같기도 했고, 또 다급한 육신의 목마름 같기도 했다.” (p.69)

 

각자의 ‘천주’는 이곳에 없었다. 결국 그들이 피안(彼岸)으로 접안했는지 나는 알 길이 없지만 김훈의 말처럼 ‘나도 여기에서 산다.’

 

살아서 하루를 버틴다.

각자의 ‘천주’를 붙들어야 하는지 각자의 ‘흑산’을 놓아버려야 하는지 상세히 알려주지 않는다.

애면글면 바지춤을 부여잡고 활자에 코를 박을 뿐이다.

 

내게는 그렇다. 거짓말하지 않는다.

굳이 조선후기 천주교의 전파와 그것을 어떻게든 막고 박멸하려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어떤 개입도 없다. 소설은 소설일 뿐인 것이다. 더 욕심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김훈의 글을 좋아한다. 또 한 번 그의 글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조바심내지 않으니 숨차지만 벌렁 나자빠지지 않는다. 간결하고 거추장스럽지 않다.

 

 

“바다에는 시간의 흔적이 묻어 있지 않았고, 그 너머라는 흑산은 보이지 않았다.” (p.31)

 

이런 문장을 쓸 수 있는 작가와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 축복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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