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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내부의 적 - 자유와 민주주의의 위기를 근본적으로 성찰하다
츠베탕 토도로프 지음, 김지현 옮김 / 반비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87년 이후 정치적 민주주의는 어떤 식으로든 진화해 왔다. 3당 합당과 고착화된 지역주의를 분쇄하지는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달성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선배 세대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이미 IMF의 광풍이 이념을 휩쓸고 간 후 신자유주의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올 때였다.
그래서 지난 4년간의 후퇴한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한 불편함과 스트레스가 크다. 그전까지 당연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누려오던 것들이 4년 만에 무너져가는 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연말 대선을 앞두고 레이스에 뛰어든 후보들이 너나할 것 없이 ‘경제민주화’를 부르짖는다. ‘정치민주화’가 엄청나게 후퇴되고 퇴보했음에도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시급한 화두이기에 ‘일단 먹는 것부터 해결하자~!’라는 원초적인 문구가 이번에도 먹힐 듯싶다.
‘먹고 사는 문제’는 그 어떤 것과 바꿀 수 없는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에 당연한 이치이기는 하나 ‘먹고 사는 문제’는 아니지만 ‘먹고 사는 것만큼 중요한 문제’들이 많은데, 그것에 대해서 조금만 관심을 회피하면 지난 4년과 같은 꼴이 그대로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함께 먹고 살아야’하는데, 민주주의 사회가 심화되고 신자유주의가 팽배해지면 질수록 ‘함께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한 가치가 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우리가 흔히 이상향으로 생각하는 북유럽 선진국에서 극우주의자에 의한 테러가 일어나고 많은 유럽 국가에서 인종주의가 다시금 부활하는 일들이 왜 일어나는 것일까?
이 책 「민주주의 내부의 적」은 그것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데 적절한 책이다.
“나는 이 책에서 해결책이나 처방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더 잘 이해하도록 도우려 한다.” (p.17)
저자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불가리아 태생인 저자가 대학 공부를 위해 프랑스로 유학 온 후 프랑스인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귀화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인생의 역사가 세계대전 후 68혁명을 기점으로 이루어낸 서유럽의 민주화 과정, 그리고 반대편 냉전 체제하에서 구소련 체제하에 있던 동유럽의 공산주의 체제 형성 과정의 역사와 일맥상통한다.
1. 천사가 되려한 짐승들
민주주의에 대한 역사는 유럽의 시각에서는 이미 수백 년이 된 개념이지만 나와 같은 한국인에게는 아직도 제대로 누려보지 못한 개념이다. 유럽은 말 그대로 밑에서 부터의 혁명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충분히 성숙되고 숙성된, 그래서 국가에 소속된 국민의 의식 속에 고스란히 흐르는 잠재역량이라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굉장히 다르다. 근·현대사가 그 어떤 국가와 집단의 그것보다 급변했고 정치적 테제를 결정하는 주체가 늘 통치 권력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에서 미군정으로, 미군정에서 독재 권력으로 통치 권력의 형태만 바뀌었을 뿐이다.
그래서 흔히 유럽, 특히 북유럽 하면 ‘우리보다는 성숙한 사회’, ‘엄청난 GDP를 자랑하는 복지국가’ 정도로 생각했었다.
박노자 교수의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를 읽으며 우리가 가지는 북유럽에 대한 판타지가 대단히 잘못된 것임을 경고 받기는 했지만 TV나 책을 통해 노출되는 북유럽과 서유럽은 노래 가사처럼 “희망의 나라”로 여겨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유럽인인 저자의 눈에 비친 서구(유럽과 미국을 포함한)의 민주주의는 심각한 위기 상황에 봉착해 있다. 책의 제목처럼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적으로 인해 그렇다는 것이다.
“안보리가 구현하는 국제 질서는 당위성이 아니라 힘의 지배에 기여한다.” (p.73)
“역사의 시기마다 군사 개입은 거의 도덕적인 태도를 표방했다. 이때 특히 서구의 정치적 메시아주의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p.85)
코소보 사태와 아랍의 재스민 혁명, 이라크 전쟁에서부터 아프간 전쟁까지 유럽과 미국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일념으로 전쟁에 개입하고 또는 주도적으로 실행했다.
저자는 이것을 정치적 메시아주의라 칭한다. 스스로 메시아가 되는 것이다. 코소보에서 아랍에서 이라크에서 메시아가 되어 주기를 고대했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전 세계의 민주주의, 발전, 자유 시장, 자유 경제를 위해 능동적으로 행동할 것이다.’ 보고서는 거듭하여 이러한 고귀한 목적을 위해서 어떤 수단이라도 동원될 수 있다고 정당화한다. 그것이 전쟁이라도 말이다.” (p.60, 「미연방 국가 안전 전략」)
“고상한 이상을 내세운 이 계획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는 공산주의의 구원을 약속하고 식민 전쟁을 벌이던 과거 정치적 메시아주의의 부활을 의미한다.” (p.60)
이라크에 대한 공격을 가하기 직전 부시 대통령이 전 세계를 대상으로 TV연설을 했던 것이 뇌리에 강하게 남아 지워지지 않는다. 그는 분명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공격을 ‘제2십자군전쟁’이라 칭했다.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말이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도대체 누가 부시에서 십자군을 이끄는 메시아가 되어 달라고 했다는 말인가?
이렇게 이어져 온 서구의 민주주의에 대한 내부의 공격은 또 다른 외부의 공격을 말미암을 수밖에 없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했다.
자꾸만 눈을 외부로 돌리려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냉전체제가 허물어지고 전 세계가 급격히 신자유주의의 격랑에 빠지고 나서 인류는, 아니 서구는 문명 진화의 최대치가 신자유주의가 될 것임을 기대했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완전한 믿음과 신뢰가 더 나은 세계와 문명을 견인할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모래성처럼 무너져버렸다. 너무나도 한순간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오일쇼크로부터 이미 징후는 계속되었으나 서구는 애써 외면했다고 봐야 한다. 장기적인 경기침체로 인한 더블딥, 나아가서는 트리플딥의 반복은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감추고 숨기며 오히려 상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논점을 흩트리는 것으로 과정이 진행됐다.
서구의 관점에서 그들보다 미개하고 미성숙한 아랍과 이라크, 근동지역같은 곳은 이러한 과정을 진행하기 위한 도구로 안성맞춤이었다.
“천사가 되려고 하다가 짐승이 된다.” (p.90)
「팡세」에서 파스칼이 말한 대로 그들은 메시아는커녕 그대로 짐승이 되어버렸다.
2. 데마고그와 데마고기의 놀이터
신자유주의와 자유민주주의 테제가 희미해져버린 서구의 자리에는 포비아(phobia)가 자리 잡았다. 책에서는 외국인, 특히 무슬림에 대한 포비아가 유럽 전역에 퍼져있는 현실을 진단한다. 앞서 지적한바 선진 정치국가라 인식되던 서유럽과 북유럽에서 ‘인종주의’를 내세운 정당이 제1야당이 되고 많은 젊은이들을 그 기치아래 끌어 모으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데마고기(demagogy)를 일삼는 데마고그(demagogue)들이 놀이터를 점령해 버렸다.
아무런 근거가 없는 허위 사실을 유포하고 이것을 특정한 정치적 의도를 위해 이용하고 활용하는 데마고그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는 사실은 문제의 심각성을 대변한다.
각 국가 내에서 상존하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분노의 형태로 타인(특히 외국인)에게 치환된다. 그것은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감정의 영역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데마고그들의 말초적이고 자극적인 선동·선전(데마고기)은 힘을 얻는다. 따르는 무리는 급속도로 늘어나고 나와 나의 국가·집단은 갑자기 모두 피해자가 된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찔러 넣은 채 총구만 ‘그들’에게 돌려 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저자도 책에서 지적하지만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러시안 룰렛이다. 지금 당장은 ‘그들’에게 총구를 들이대지만 격발되지 않은 총구는 언제든 나에게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기획은 우리를 한 극단주의에서 다른 극단주의로, 즉 전체주의적인 ‘국가 우선’에서 극단적인 ‘개인 우선’으로, 자유를 죽이는 체제에서 ‘사회를 죽이는’체제로 이행시켰다.” (p.111)
“라이벌이었던 공산주의가 몰락한 후 대중들이 자신의 두려움, 불안, 적대감을 다른 집단에 투사하는 것이다.” (p.155)
노르웨이에서 수십 명을 살해한 브레이브크스는 이러한 극단에 몸을 실은 젊은이다. 그가 남긴 문서들에서는 자신이 적극적으로 정치적 메시아가 되기를 결단했다. 물론, 컴퓨터 게임에 빠진 채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해 내지 못한 정신병리학적 요인도 중요하지만 그가 극우세력의 데마고그들의 선전과 선동에 심취했음이 더욱 중요한 요인이다.
앞으로가 더 문제다. 아직 극단적인 데마고기가 넘치는 정치세력 내지는 집단이 집권하지는 않았지만 점점 그것으로 빨려 들어가는 젊은이가 많기 때문이다. ‘나의 문제’가 ‘그들의 문제’로 피해의식을 덧입은 채 치환돼 버리면 이성은 상실된다.
데마고기(demagogy)를 일삼는 데마고그(demagogue)들이 놀이터만 점령하면 다행이다. r들이 만들 난장판은 상상하기조차 두려운 일이다.
유럽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정치적 극단세력들은 어떤 면에서는 맥이 닿는다. 디테일한 정치환경과 집단의 특성은 다를지 모르겠지만 요즘 부각되는 독도 문제와 과거사 문제에 대한 양국의 접근 방식을 보면 ‘자유를 죽이는 체제’를 벗어나 ‘사회를 죽이는 체제’로 이행하고 있지 않나 염려스럽다.
대선을 앞두고 국내에서도 난장판이 펼쳐질 것이 뻔하다. 각자 나름대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국가의 발전을 위해 ‘갑’이 되겠다고 뛰어들겠지만 심각한 내부의 적이 될 가능성 또한 농후하다.
나와 다르면 ‘빨갱이’, ‘수구꼴통’ 이 두 단어로 상대의 주체성을 상실시켜 버린다.
“유럽의 장점 - 민족의 다양성, 사상의 다양성, 이러한 유럽의 특수성은 메시아주의, 신자유주의, 포퓰리즘 같은 민주주의의 탈선을 막기에 충분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저항할 수 있는 지형을 만든다.” (p.206)
저자는 책의 말미에 이러한 민주주의 내부의 ‘적들’을 견제하고 균형 잡힌 사회발전을 위해 유럽의 특수성과 다양성이 활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내게는 좀 먼 나라 얘기에 불과하지만 수백 년간 쌓아온 그들의 정치적·문화적·시민적 역량이 폭주하는 탈선을 막기에 차선이라도 된다면 주목해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