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함무라비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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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오너가 구속되는 것을 내 생애 보게 될 줄이야~!”

 

라고 리뷰의 첫 문장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이재용씨에 대한 영장은 기각되었다.

제대로 된 의지와 능력을 가졌다면 현재 박영수 특검과 같은 신속하고 적확한 수사를 할 수 있는 집단이 검찰이라는 것을 목도하는 요즘, 이재용씨의 영장 기각을 바라보는 심정은 갑갑하다.

‘결국 삼성이 이기는구나’ 싶다.

긴 시간을 고민하고 새벽에야 발표를 했다지 아마.

해당 판사에 대한 비난여론이 들끓고 있는 모양이다. 그 판사가 이전에 내린 판결을 찾아내고 프로필이 떠다니고, 난리다.

하지만, 다른 판사였다고 해도 기각이 아닌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었을까 싶다. 해당 법원에 영장실질심사를 하는 판사가 3명이라고 하는데, 업무 상 돌아가면서 심사를 한다고 한다. 특검이 재청구해서 다시 심사를 받으라느니, 국민적 저항으로 사법부를 압박해야 한다느니, 말이 쏟아진다.

다른 2명의 판사가 재청구된 이재용씨의 영장을 들고 무슨 판단을 내릴까?

 

이 뉴스를 접한 이후 「미스 함무라비」를 읽으니 장르가 바뀌어 버렸다. SF가 돼 버렸다. 현실성이 전혀 없는 SF말이다. 책에 등장하는 여러 건의 소송 사건, 중재, 판결, 인물. 현실로 보이지 않는다. 주된 인물인 한세상 부장판사, 박차오름, 임바른 판사 같은 사람들이 실제 사법부에 존재할까 싶다. 그렇다고 세 사람이 모두 SF나 아동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절대적 선이라고 책에서는 이야기 하지 않는다. 현실의 한계와 조직의 논리에 부합한 인물로 그려지기도 하고, 인간으로서 가지는 동정심과 감정에 판결의 기준이 흔들리기도 하는 연약한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물론, 내가 아는 대한민국 사법부의 모습은 아주 작은 부분일 것이다. 책이나 미디어를 통해 접한 것이 대부분이다. 천종호·김지연 판사와 같은 인물도 있다. 책에서의 묘사처럼 법조계 전관이나 다른 여타 압력에 굴하지 않고 소신을 가지고 판결을 하는 판사들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게 당연한 거다. 판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말이다. 워낙 그렇지 않은 판사들의 모습만을 지켜봐온 나를 비롯한 국민들이기에 지금처럼 사법부를 향한 시선이 곱지 않은 것이다.

말 그대로 마지막에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 사법부다.

    

 

“이 나라에 유일하게 평등한 게 있다면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이치라고요.”

“그래도 법원 돌아가는 건 좀 다르다고 하던데…….” (p.231)

 

법조 브로커를 앞에 둔 중소기업 사장의 순수한 질문은 우리들에게도 해당한다.

에이~ 그래도 아직 사법부는 괜찮지 않아?”

“검찰하고는 다르지 않겠어?”

“그래도 법원은 아직 살아 있잖아?”

 

괜찮기는 개뿔.

    

 

“즉각 신고할 수 있는 앱도 있고요. 권리 위에 잠자는 시민이 되지 말라고요!” (p.20)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경우 없이 끼어드는 사람들에 대해 왜 항의하지 않는 거죠? 왜 반칙을 응징하지 않는 거죠? 권리 위에 잠자는 시민이 되지 말라고요!” (p.127)

 

박차오름 판사는 골칫덩이다. 돌출행동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상사인 부장판사 한세상은 여러 번 주의를 주고 자중시키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골치 아프지만 한편으론 고맙고 대견하기도 했을 것 같다. 앞뒤 가리지 않는 열정을 가진 후배 판사를 바라보는 선배 부장판사의 속마음이 불편하기만 했을까 싶다.

하지만, 박차오름 판사를 대하는 국민 중 한사람인 내 마음은 한세상 판사보다 더 불편하다.

“권리 위에 잠자는 시민이 되지 말라고?”

우리는 우리 권리가 뭔지도 모르고 사는데? 우리는 잠 잘 시간도 없는데? 즉각 신고할 수 있는 앱을 스마트폰에 깔아놓았다고 치자. 당장 만원 지하철 안에서 내 몸을 더듬는 놈이 있는데 앱을 켜서 신고하라고? 길게 늘어선 차량 줄을 보란 듯이 새치기하는 고급 세단을 향해 신고하라고? 그냥 못 본 척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성폭행·추행 사건만 따지고 보자. 피해자가 겪는 2차,3차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가해자가 술에 취해 있으면 감경이 되는 사회다. 가정 내에서 이루어지는 성폭행·추행은 더 심각하다. 친딸에게 수 년 동안 인면수심의 성범죄를 저지른 아버지가 겨우 5년 구속되었다가 출소한다. 길어야 징역 9년, 10년이다. 그런데 뭐? 권리 위에 잠자지 말라고요? 박차오름 판사님.

일단, 제대로 판결을 하는 모습을 먼저 국민들에게 보여줬으면 한다. 물론, 그런 판결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알려지지 않고 보도되지 않았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그나마 스트레스가 덜하다.

충분히 사법부·법원을 신뢰할 수 있을 때에야 가능한 일이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사건의 시비를 법대로 가리고 싶을 때,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곳이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 조건들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요원한 희망이다.

    

 

“저 힘들다고 남들 힘든 건 보려고도 안 했네요. 괜찮냐, 다친 데 없느냐,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를 못하고 꼬투리 잡히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만 했네요. 제가 미쳤었나봐요. 죄송합니다.” (p.78)

“오빠와 남동생들이 아들이랍시고 집안 재산으로 호의호식하는 동안 딸들이 얼마나 차별받고 힘들게 살았는지 한 맺힌 목소리로 늘어놓기 시작했다.” (p.223)

 

결국 해결은 우리들이 한다. 검사, 변호사, 판사님들이 계시지만 우리가 한다.

이거, 피곤한 일이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 속 고소·고발·소송, 부모의 유산을 둘러싼 자식들의 갈등. 제발, 책에서만 우리들이 해결하는 것이었음 좋겠다. 진심으로.

실제로는 더 훌륭하고 강단 있으며 합리적인 판사님들이 많이 계실 것으로 믿어 보고 싶다. 장사도 하지 못하고 재판정에 다니느라 고생하시는 고기집 사장님이 잘못을 뉘우치기 전에, 양자로 들인 막내아들의 진정한 효심으로 사건이 해결 국면으로 바뀌려 하기 전에, 원고·피고·사법부를 바라보는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판결이 나왔으면 한다.

어려운 일이라 생각한다. 책에서도 판사들이 겪는 고충은 충분하게 그려진다. 하지만, 우리는 마지막으로 기댈 곳이다. 더 이상은 기댈 곳이 없다.

    

 

“법복 차림을 하니 근엄한 풍모였다.” (p.9)

“그 옷은 주권자인 국민이 사법부에 위임한 임무를 상징하는 겁니다. 명심하세요.” (p.10)

 

정말 명심해 주셨으면 좋겠다.

처음 사법고시에 합격한 순간, 처음 법복을 입는 순간은 다들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비슷한 각오를 할 것이다. 그 ‘처음’을 잊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다.

자꾸만 ‘좋겠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내키지 않지만 솔직한 심정이다. 확신한다면 이 리뷰의 내용과 방향은 180도 달랐을 것이다. 확신이 없으니 희망이라고 해보는 거다.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면 초임 판사인 박 판사가 아니라 재판장인 내가 더 져야지.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돌아가서 다음 주 선고할 판결 초고나 빨리 가져와!” (p.327)

 

한세상 부장판사. 은근히 츤데레다.

초임인 박차오름 판사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선배다. 평소에 아무리 잘해주고 따뜻해도 결정적인 순간에 조직 논리를 들이댄다든지, 가차 없이 꼬리자르기를 하는 것이 세상 현실이다. 꽉 막히고 보수적이며 때론 성차별적인 인물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는데, 한세상 판사. 은근 매력 있다.

마지막 국민참여재판이 끝난 후 판사직에서 사임하게 되는데, 대형 로펌을 낀 노회한 변호사로 법정으로 돌아와 임바른 판사와 박차오름 판사에게 무언의 전관을 요구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국정농단과 대통령의 뇌물죄를 다루는 뉴스가 오래 되다보니 피곤했는데 이재용씨의 영장 기각으로 다시금 마음을 다잡는다는 사람들이 많다. 촛불이면 끝날 줄 알았던 순수한 마음을 회개하는 이도 줄을 잇는다. 제발 횃불까지 드는 일은 없었으면 싶다.

속도를 내며 치고 나가는 특검을 돕지는 못할망정,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지는 말아야 한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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