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의 황제
김희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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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줄 알았으면 진작 정규직으로 취직하지 그랬어요? 몇 년 전인가, 철도노조 파업이 한창이던 때, 대학생이 한 인터뷰의 내용이다. 파업이 장기화되고 국민적인 여론을 등에 업으려던 찰나, 조중동이 가만있지 않았다. <연봉 6천만 원이 넘는 노조원이 파업을 한다>라는 뉘앙스의 제목을 하루에도 몇 번씩 쏟아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 사는 한국의 젊은이들의 눈에 비친 연봉 6천만 원 받는 아저씨는 선망의 대상이다. 자기가 아무리 노력하고 공부하고 준비해도 들어갈 수 없는 직장에 있는 아저씨다. 그런 아저씨가 파업을 한다고 하니, 심정적으로 동조는 못할망정 조중동에서 만들어 낸 프레임에 그대로 갇혀 똑같이 비판을 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 대학생만이 아니라 많은 수의 국민들이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연봉 6천만 원 받는 노조원이 어떤 일을 얼마나 오랜 기간 해왔으며, 그 과정 중에서 그가 흘린 땀이 얼마나 되는지는 고려하지 않는다. 현상에 집착해 공격을 한다. 무서운 세상이다.

 

 

그들이 내게 묻는 건 이런 거였다. 즉 지금 하늘에 떠 있는 비행접시에서 조만간 외계인들이 무리 지어 내려올 예정이며, 난민 신세가 된 그들을 W시가 받아주는 대신 그 외계 생명체들에게 환경미화와 같은 단순 업무를 맡기기로 비밀 계약이 이루어졌다는 것. 따라서 외계인들이 내려오면 회사 소속 미화원들이 대량 해고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 (<지상최대의 쇼> 중, p.163)

 

 

어느 날 갑자기 W시에 미확인비행물체가 나타났다. 강원도 영서지방의 작은 도시에 불과했던 W시의 하늘을 뒤덮는 비행접시가 나타난 것이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공포에 떨었다. 공상과학 영화나 할리우드 영화에 등장하는 비행접시는 대부분 공격적이다. 지구를 파괴하거나 인류를 파괴하기 위한 목적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전쟁을 한다. 인류와 외계인의 전쟁. 두려움에 떨던 W시민들의 머리 위를 6개월 동안 덮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비행접시는 도시의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연일 색종이를 뿌려 주기도 하고 고립되었던 W시의 경기가 관광으로 되살아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한 말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아, 글쎄 저 외계인들이 사실은 자기들 행성에서 쫓겨 왔대.”, “쟤네들 여기에 정착해서 살려고 하는 거래.”, “외계인들이 벌써 내려와서 일하고 산대.” 유언비어는 일파만파, 십만파, 백만파로 퍼지게 마련이다.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던 김판석씨는 동료들과 이 유언비어를 접한다. 외계인들의 값싼 노동력이 W시에 투입된다면, 아마도 자신들처럼 미화원로 채용될 것이 뻔하다. 그러면 내 밥그릇을 뺏기는 건데? 이건 아니지. 절대 안 되지. 그러면 외계인 놈들을 쫓아내야 되겠네. 물러가라. 물러가라! 외계인 고 홈!!!

 

 

“도서관에서 매일같이 마주치던 이들이 이번에도 서로 눈을 내리깔며 모른 체하는 걸 보니, 새삼 일상으로 돌아온 게 실감났다. 벌써 몇 년째 여기서 각종 시험에 대비하여 공부를 해온 우리는,” (<지상최대의 쇼> 중, p.160)

 

 

불일 듯 일어난 유언비어는 군중을 끌어 모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언제나 목소리의 크기와 숫자가 이긴다. 비행접시가 W시 상공에 멈춰 있는 동안 W시에 떠돌던 수많은 유언비어는 하나도 사실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들은 그곳에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언제 왔나 생각될 정도로. 그리고 W시에 남은 이들은 그들의 일상으로 홀연히 돌아간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한때 라면이라는 음식이 있었다.” (<라면의 황제> 중, p.75)

 

 

라면은 완전식품이다. 라면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나도 무수히 라면을 먹었다. 자취생활이 거의 10년 정도 되는 내게 라면은 동반자였다. 귀찮고 피곤하고 짜증나도 라면봉지 하나면 충분했다. 어느 정도의 물과 어느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그렇게 삶긴 면발을 먹고 국물을 들이켜면 충분했다. 그런데 라면이 없다면?

 

 

 

“그건 진짜 최고의 음식이었어. 아마 자네들은 상상도 못 하겠지, 그 따뜻한 국물 맛을.” (<라면의 황제> 중, p.79)

 

라면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그 맛있고 편리하고 저렴한 음식이 없어진다니.

 

 

 

“예를 들자면 라면금지법안의 통과 같은 것들. 라면은, 그보다 더 오랜 과거에 아편이나 담배가 겪었던 것과 같은 운명을 맞아야 했다. 이제라면 어디에도 없었고, 하다못해 집 뒷마당에 솥을 걸고 면을 튀긴 뒤 직접 만든 가루수프를 넣고 끓여 먹는 행위조차 단속 대상이 되었다.” (<라면의 황제> 중, p.83)

 

 

라면금지법이라……. 라면금지법이 통과될 수 있을까? 아니, 그런 걸 입안하는 국회의원이 있을까? 그런데 가능할 것 같다. 싱글법도 제정하려고 폼 잡았던 한국 아닌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 벌어지는 다이내믹 코리아. 아편이나 필로폰 같은 마약을 하게 되면 불법이다. 큰 형사적 처벌을 받게 된다. 이제는 담배도 피울 수 있는 곳이 거의 없다. 그런데 라면을 마음대로 먹을 수 없는 세상이 된다?

 

 

라면을 먹기 위해, 그 향긋하고 담백하고 고소하고 짭조름하며 달콤한 면발을 먹고 구수하고 시원하며 매콤하고 속이 뻥 뚫리는 기가 막힌 국물을 마시기 위해서는 특급 작전을 펼쳐야 한다. RO에 버금가는 지하조직을 만들어 가입해야 한다. 신분을 확인하고 보장받기 위해서는 몇 단계의 까다로운 절차와 장시간의 인내가 필요하다. 지하조직원으로 위장해 라면을 먹는 현장을 급습하려는 경찰과 정보당국의 위장 가입이 많기 때문에 3중4중10중으로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어느 날 밤늦은 시각, 모처에 모여 든 이들의 손에는 너나 할 것 없이 까만 비닐이 들려 있다. 그들은 눈빛만으로 거사를 치루기 위한 암호를 주고받는다. 몇 달을 기다려 왔나? 버너와 냄비를 꺼낸다. 수저를 꺼내는 사람이 있다. 라면을 꺼낸다. 저 바스락거리는 라면 봉지소리! 물이 끓는다. 수프를 넣고 기다린다. 야채를 넣는다. 면을 넣는다. 뚜껑을 닫고 식기를 나눈다. 혹시 냄새가 새 나가지 않나, 멀리서 고배율의 렌즈로 촬영하는 사람은 없나 파수꾼이 360도 경계를 한다. 냄비 뚜껑이 들썩거린다. 이미 약속한 대로 조용히 냄비 주위로 모여든다. 라면과 국물을 받는다. 그때!!

“그대로 멈춰!!!!!”

한 무리의 경찰과 사복을 입은 정보요원들이 무리를 급습한다. 밀고자가 있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어디서 기다렸다 튀어나왔는지 모를 경찰차와 시커먼 차들이 무리를 에워싼다. 5-6대의 차량에서 뿜어내는 라이트 위로 연기가 피어오른다. 모조리 바닥에 쏟긴 면발과 국물이 마지막 힘을 다해 토해내는 신음이다. 단 한사람도, 면발을 먹지 못했다. 국물도 홀짝이지 못했다.

다음 날, 이 사건은 대대적인 뉴스가 된다.

 

 

에이~ 이런 일은 절대 없겠지!!

<페르시아 양탄자 흥망사>, <교육의 탄생>, <2098 스페이스 오디세이>, <개들의 사생활>, <어느 멋진 날>, <경이로운 도시>,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책에 실린 다른 단편들도 재미있었다. SF 장르지만 현실성을 담보했다.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소재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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