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 마이너스
손아람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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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년 대학 입학.

98년은 여러 가지로 골치 아팠다. 본격적으로 국가 전체가 IMF체제 안에 들어갔다. 국가가 부도가 나 IMF라는 듣도 보지도 못한 괴물에게 잡아 먹혔다. 실제로 아버지는 주식으로 기천만원을 탕진했다. TV뉴스에는 연일 기업들의 부도와 가장들의 죽음이 보도 되었다. 나는 수능에 실패했다. 듣도 보지도 못한 대학에 입학했다. 편입을 목표로 1,2학년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공부와 토익만 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다가 선배들을 만났다. 과방과 단대학생회에서 그들에게 듣게 된 말과 글, 음모와 이론은 신기했다.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것들이었다. 98년과 IMF는 모든 가치를 해체시켰다. 친구, 낭만, 동아리, 지성, 정의 같은 것들이 주된 해체 대상이었다. 나를 비롯한 몇몇의 신입생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신입생들은 과활동이나 동아리 활동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중앙도서관과 단과대 열람실에 틀어박혀 공무원 시험과 토익을 대비한 공부를 시작했다. 대학 입학 2년 전, 내가 입학한 학교의 운동권 학생들은 총장실을 점거했다. 총장의 비리와 학내 운동권세력 탄압에 대한 항의로 총장 퇴진을 요구하는 지역 내에서는 꽤 이슈가 되었다. 교수회의마저 총장에게서 등을 돌렸다. 당장 총장이 퇴진할 줄 알았는데, 그는 지역사회의 기득권 중에서도 갑이었다. 몇 년을 질질 끌다 퇴진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다시 총장 자리에 앉았다. 지금까지도. 96년 총장 퇴진 운동 이후 학내 운동 진영은 급속도로 위축되고 IMF라는 폭탄을 맞고 입학한 신입생들은 더 이상 학내 운동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곧 우리나라에서 월드컵이 개최되는데, 너 같은 놈들이 또 후배들 끌고 거리로 뛰쳐나와 활개 치게 놔둘 수는 없지. 축제 기간 동안만 잠깐 머리 식히고 나와라. 너만 쳐 넣는 거 아니니까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p.300)

 

“그제야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았다. 남영동. 나는 대공분실로 끌려가고 있었다.” (p.202)

 

 

 

2002년 한일 월드컵.

이 책의 저자와 나는 같은 시기 대학에 다녔다. 2002년 나는 휴학생인 채로 한일 월드컵을 시청했다. 역사 상 최초로 민주적인 방식으로 정권교체를 달성한 김대중 정부에서 월드컵의 안정적이고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대학 운동권 학생들을 탄압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때는 정말 그랬다. IMF체제가 본격화 된 후 4-5년 동안 너무 힘들게 살아온 한국인들에게 2002월드컵은 마취총과 같았다. 갑자기 붉은색이 거리와 가슴과 본능을 사로잡았다.

남영동. 대공분실. 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질감은 불쾌하다. 1980년에도 그랬고 2002년에도 마찬가지다. 아니, 당시, 그러니까 2002년에는 남영동과 대공분실이 현실에서 사라진 존재로 생각되었다. 아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학생들이 남영동으로 끌려갔다.

나는 이 책의 가장 큰 재미가 픽션과 논픽션의 절묘한 줄타기라고 생각한다. 소설이 아니라 르포나 역사서를 읽는 것 같았다.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내 기억을 떠올리며 읽는 것 또한 재미있었다.

맞다. 그때도 그랬다.

 

대식이는 단대 학생회장이었다.

98년 새내기로 처음 맞은 대동제에 대한 기대가 컸다. 단대 깃발을 함께 만든 후 노천강당으로 걸어가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휘청휘청 거대한 단대 깃발을 겨우 붙들어 들고 들어선 노천극장에서 본 것은 절망과 초라함이었다. 한때 지역 학생운동의 거점이었던 곳이 아무도 찾지 않는 황무지가 되었다. 200백 명? 도 채 되지 않는 학생들이 모였다. 나는 깃발을 놓고 노천극장을 빠져 나왔다.

대식이는 200백 명도 되지 않는 학생운동 세력의 중추가 되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대식이는 한복 비스 무리한 옷을 입고 강의와 강의 사이 시간에 자주 들어와 학우들에게 참여와 관심을 호소했다. 함께 98년 대동제 깃발 제작을 위해 밤을 새우던 동희가 들어와 울부짖었다. 대식이가 구속되었고 탄원서를 제출해야 하니 도와달라고.

 

 

 

“나는 주체사상의 정서적 호소력이란 것에는 중독되지 않았지만 스타크래프트에는 단박에 중독됐다.” (p.63)

 

 

맞다. 그때도 그랬다.

학생들은 대식이의 구속에는 관심이 없었다. 동희의 울부짖음도 외면했다. 스타크래프트를 하기 위해 모여 든 학생들로 PC방은 매일, 매시간 만원이었다. 사회적 정의, 지성의 추구, 연대의 가치 보다 학점과 토익, 공무원 시험과 각종 자격증, 워킹 홀리데이와 교환학생이 화두였다. 책에 등장하는 진우는 마지막까지 학생 운동의 중심이 되고 졸업 후에도 운동권으로 성장하고 고착되지만 내 주위에는 진우 같은 친구는 없었다. 대학 졸업 한참 후 대식이가 지역의 중견기업에서 영업일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뿐이다.

 

 

 

 

“나는 진우의 이름을 불었다. 대석 형은 내 이름을 불었다. 전학협 간부가 대석 형의 이름을 불었다. 청년진보당 간부가 전학협 간부의 이름을 불었다. 민주노총 간부가 청년진보당 간부의 이름을 불었다. 침묵을 지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p.223)

“우리를 여기에 끌어들인 선배들은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나도 후배들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언젠가 우리는 떠나게 된다. 평범한 세상으로, 진우보다 내가 먼저였다.” (p.477)

 

 

책에서 그려내는 태의, 진우, 미주의 대학생활은 길고 고단했지만 낭만적으로 읽힌다. 아주 잠시, 학생운동 끄트머리에 발가락 하나 얹어 본 기억 때문일까? 실망과 좌절을 안고 그 세계에서 발을 뺐지만 지금까지 내내 목구멍 한 쪽에 낀 고기 가시처럼 뱉어낼 수 없고 토악질 할 수 없는 대식이와 동희의 울부짖음에 대한 부채감 때문일까?

실제로 태의나 진우, 대석처럼 시위대의 선봉이 되어 전경과 마주쳐 전투를 치르기도 하고 수배되어 경찰서나 대공분실 같은 곳에 끌려가지 않았던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일까? 저자가 그려내는 청춘들의 처절함이 아름답기까지 했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선배들처럼 친구와 후배의 이름을 대고, 자연스럽게 운동에서 발을 슬며시 빼는, 그런 과정마저도 합리적이고 공정한 게임의 룰로 느껴질 정도로. 작가의 글 솜씨가 대단해서 일까? 모르겠다.

 

 

 

“늙은 남자는 오래전에 둥지를 틀었다. 그는 내가 입학하기 전부터 졸업한 뒤까지도 학교에서 살았다.”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그의 이름은 아무도 몰랐다. 다들 미친 남자라고만 불렀다. 왜냐하면, 그가 미쳤기 때문이다.” (p.113)

 

내가 다닌 학교에도 이런 사람이 있었다. 선배들은 그를 ‘김군’이라고 불렀다. 새까만 피부에 작은 눈, 스포츠머리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몸냄새, 양 손에 들고 있는 우산과 신문. ‘김군’은 열람실에도 중앙도서관에도 학생식당에서 프리패스로 다녔다. 학생들이 밥을 사주기도 하고 커피를 건네기도 했다. 책에 등장하는 미친 남자처럼 특정한 말을 되풀이해 중얼거리지는 않았다. 학생들에게 위해를 가하지도 않고 그냥 그 자리에 있었다. 졸업 후 한참 뒤 다시 찾은 학교에도 여전히 ‘김군’이 있었다. 그리고 또 한참이 지난 지금, ‘김군’이 그곳에 있는지는 모르겠다.

 

 

 

“세상이란 단어에는 아무 뜻도 없어. 너희는 선배들과 싸우고 있다. 너만 할 때는 딱 너랑 똑같은 눈빛을 가졌던 놈들. 그리고 언젠가 네 후배들이 너랑 똑같은 눈을 하고 너의 미래와 싸우게 될 거야. 끝이 없는 윤회 같은 거지. 나는 너희를 혐오한다. 너희는 역겨워. 너희에 비하면 무장 강도가 차라리 순수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p.407)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력처럼 나는 실제적으로 학생운동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늘 그들에 대한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다. 386에게도 마찬가지였다. 30대 이전까지는. 민주정부 10년 이후 이제는 정치 기득권이 되어 그들이 학생운동에서 그렇게 빠져 나갔듯이 ‘슬며시’사회의 정중앙에서 똬리를 튼 채 완전 변태했다. 그리고 그 완전변태가 시대와 역사적 흐름에 맞는 것인 양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지루하고 역겹다.

 

 

 

“우리가 떠나도 미친 남자는 여기 남는다. 늘 그랬듯이. 미친 남자는 우리 가운데 변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p.489)

 

 

세상에 변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인정한다. 하지만 변하더라도 곱게 변해야 한다. 좀 많이 변하더라도 미치지는 않아야 한다. 미친 사회를 살면서 미친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맞닥뜨리다 보니 정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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