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 - 불멸의 인생 멘토 공자, 내 안의 지혜를 깨우다
우간린 지음, 임대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팔을 부축해 드릴 선생님이 없다.

 

 

“무우대에 이르러 나는 선생님의 팔을 부축하며 위로 올랐다.” (p.59)

 

 

그런 선생님이 계셨는데 지금은 부재하신 게 아니라 처음부터 없었다. 팔을 부축해 드린다는 것은 그만큼 선생님과 친밀하다는 것이다. 함께 계단을 오를 수도 있고, 등산을 할 수도 있고, 몸이 좋지 않으셔서 부축을 해 드릴 수도 있다. 나는 그렇게 할 선생님이 없다. 처음부터 없었다. 다른 서평에서 여러 번 밝힌 바 있어 또 다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민망하지만 사실이기도 하고 부축해 드릴 선생님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는 방증이다.

 

 

 

“그때 선생님의 자상한 눈빛을 보았다. 선생님은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p.63)

 

 

자상한 눈빛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시는 선생님이 나는 없다. 미간을 찌푸리신 채 무섭게 호통 치시더라도 그런 선생님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나는 없다. 어릴 때는 잘 몰랐다. 인생의 스승이 없다는 부재가 주는 안타까움과 억울함을 느낄 새도 없이 지나가 버렸다.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별 필요가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내가 꿈꾸는 대로 내 인생의 그림이 그려 질 것 같았다. 간혹 어떤 이들이 조언과 직언을 해주었지만 흘려들었다.

그런데 30줄을 넘기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나니 선생님의 부재가 주는 안타까움과 억울함은 짙어만 간다.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한 교육정책의 구조적 문제를 탓하고 싶지 않다. 나와 같은 시절, 같은 교육정책 속에서도 인생의 선생님, 스승을 만난 사람들이 많으니까. 다만 내게는 왜 그런 행운이 찾아오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다. 너무 아쉬워서 억울한 것일 테다.

 

 

 

“미안하구나, 방금 한 말은 농담이었느니라. 자유 너의 말이 옳구나.” (p.240)

 

 

 

고맙다.

 

내가 유일하게 선생님으로 모셨던 분에게서 들었던 마지막 말씀이다. 고(故) 리영희 선생님. 돌아가시지 며칠 전 병상에 누워계신 선생님과의 통화 마지막 목소리다. 한 번도 만난 저거 없고, 뵌 적도 없는 분이지만 그분의 책을 읽고 내 인생의 선생님으로 모셨다. 내 인생관과 세계관, 내 인생의 지향성을 바꾸게 해준 게 리영희 선생님의 책이었기 때문이다. 멀리서 선생님의 책을 읽으며 가르침을 얻고 마음에 새긴 것이 전부지만 좋았다. 건강하게 활동하시면서 내 인생의 가르침이 될 말씀도 많이 해주시고 책도 써주시기를 바랐다.

어느 날 우연히 찾아 본 기사에서 선생님의 병환소식을 알게 되었고 위독한 상황이라 많은 제자들이 병원으로 찾아간 사진도 보게 되었다. 무작정 병원으로 전화를 걸어 선생님과 통화했다. 선생님 책을 읽고 영향을 받은 사람입니다. 존경합니다. 쾌차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한참 무슨 말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말을 쏟아 냈다. 선생님의 대답은 한 마디였다.

고맙다. 고맙다.

아마 제자나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던 학생 한 명으로 생각하셨던 것 같다. 힘겹게 고맙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게 내 유일했던 선생님과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화였다.

단 한번 뿐이었지만 이후 내 평생 동안 마음에 새기고 가슴에 박을 말씀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고(故) 리영희 선생님과의 마지막 통화, 마지막 대화가 생각났다.

 

 

 

夫子曰 : “小子識之, 苛政猛於虎也.” 《예기禮記》<단궁檀弓>

“가혹한 정치가 호랑이보다 무섭구나! 호랑이가 있는 곳에서는 그래도 모두가 잡아먹히지는 않지만, 가혹한 정치 아래서는 살아남을 사람이 없구나!”

“너희는 알아야 한다. 가혹한 정치가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것을.”

 

 

 

가혹한 정치가 호랑이보다 무서운 세상을 살고 있다. 자칫하면 나락으로 떨어질 위험천만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이렇게 무섭고 위험한 시대와 세상을 사는 내게 자공의 눈에 비친 공자의 모습은 부러움 그 자체다. 가까이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선생님과 함께 먹고 자며 살았던 수십 년의 시간. 선생님과 나눈 대화, 겪은 사건, 보고 느낀 것들은 그대로 자공의 삶이 되었다. 장사꾼의 자식이었던 자공이 어떻게 공자라는 스승을 만났는지 정확하게 나와 있지는 않지만 수십 년 동안 한 선생님을 모신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책에서 자주 표현되는 대로 공자와 그의 제자들은 제자백가 시대를 살았다. 열국을 주유했다. 수많은 나라를 떠돌았다는 말이다. 열국을 주유했다는 말이 편하게 가르침을 전해주는 낭만적인 여행은 물론 아니었다. 중국의 역사에서도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대를 살았던 공자와 제자들은 수도 없는 위험과 목숨의 위협 속에서 한 몸으로 지냈다. 아주 혹독한 훈련을 겪고 난 후 군대 동기들 간 더 끈끈한 동기애가 생기는 것처럼 공자와 제자들도 그랬을 것이다.

 

 

 

 

“선생님도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불편하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하고 감싸주어야 한다는 말도 했다.” (p.82)

“결코 높은 곳에 홀로 앉아 계시거나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을 드셨던 신선은 아니었다. 그 누구라도 선생님을 폄하하지 말고, 그렇다고 한도 없이 선생님을 우러르지도 말았으면 한다.” (p.383)

 

 

자공의 눈에 비친 공자의 모습은 성인(聖人)의 반열에 오른 모습만이 아니다. 정치적 꾐에 넘어가 들러리를 서기도 하고, 뻔히 보이는 실수를 반복하기도 하고, 제자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어쩔 수 없는 생활의 곤궁함에 아끼는 제자의 관 하나도 마련해 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많은 공자와 관련된 책의 내용처럼 이 책도 공자에 대한 찬양과 추앙 일색이었다면 리영희 선생님 생각은 손톱의 때만큼도 나지 않았을 것이다. 자공의 눈에 비친 공자의 모습은 평범한 생활인, 부족하지만 존경하는 선생님이었다. 그 모습을 공자를 좋아하는 사람이나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 아닐까 싶다. 자공의 눈이지만 저자의 눈이기도 하다. 이 책이 중국에서 큰 대중적 인기를 얻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공자가 아끼던 제자 중 세 사람인 자공과 안회, 자로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데, 예수의 제자 중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겹쳐졌다. 자로는 무인이다. 무도가 뛰어나고 직설적이며 공격적이다. 책에서 여러 번 자로의 이런 면모가 표출되는 데, 매번 공자가 만류한다. 예수를 잡으러 온 군사의 귀를 칼로 자른 베드로의 모습이 비교되었다. 당시 로마와 빌라도 총독, 예루살렘의 기득권이었던 바리사이파를 향해서도 줄곧 비폭력 저항을 했던 예수는 이런 베드로를 꾸짖는다. 공자가 가장 아끼던 안회는 예수의 제자 중 사랑의 제자로 일컬어지는 요한과 비교된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자공과 야고보인데, 둘의 유사점은……. 잘 모르겠다. 어쨌든 공자와 예수가 아끼던 제자였다.

 

 

나는 베드로도 아니고 자공도 아니다. 자로도 아니고 요한도 아니다. 다만 그들처럼 내 스승을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보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아쉽고 억울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뭘 바꿀 수 있는 여지도 없다. 돌아가신 리영희 선생님이 부활하실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만약 부활하신다면 염치 무릅쓰고 계신 곳으로 찾아가 무릎 꿇고 사사를 간곡히 청하고 싶을 뿐이다. 자공도 요한도, 베드로도 자로도 공자 선생님과 예수 선생님이 후세에 이렇게 까지 존경받고 추앙받는 스승이 되리라 생각지는 못했을 것이다. 내 딸아이가 내 나이쯤 되는 시대에 리영희 선생님이 최소한 지금보다는 더 인정받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시대의 스승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현대인은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 이야기는 흡입력이 있을 뿐 아니라 기억하기에도 쉽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인해 독자들은 옛사람과 현대인의 높은 장벽을 부수고 공자의 지혜를 직접 깨닫게 될 것이다.” (p.11)

 

 

자공의 눈에 비친 스승, 공자의 모습 이라는 접근 방식이 좋다. 현대인에게 어필하는 스토리텔링 좋다. 높은 차원의 경전을 번역하고 주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시중에 나온 수많은 공자와 관련한 책을 읽기 힘든 이유다. 이 책은 가까운 제자의 눈으로 공자를 본다. 그의 말과 행동과 삶을 가까이서 지켜본다. 살갑고 친근하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아, 자공 선생님의 친구이셨군요. 정말 잘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자공 선생님께 공자 선생님에 관한 말씀도 많이 들으셨겠지요? 제게도 그 이야기를 좀 전해주십시오. 자공 선생님에게 공자 선생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p.366)

 

 

공자 사후 자공은 다른 제자들과 함께 3년 상을 한 뒤, 혼자서 더 스승의 묘를 3년 간 지킨다. 이후 관직이나 현실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간다. 공자가 아끼는 제자였고, 학문과 정치의 경지가 굉장한 수준이었지만 산 속으로 들어간다. 수많은 권유와 요청과 부탁이 있었을 것인데, 모두 물리친다. 그리고 우연히 공자의 문하에 있던 사제의 제자를 만난다. 자신이 자공인지 모른 채 자공과 공자의 가르침을 요청한다. 책에서 저자가 상상해 풀어 낸 자공의 마음은 설렘과 떨림이다. 이미 공자 선생님은 세상을 떠나셨고, 자신도 산 속으로 들어간 지 한참이 지났지만 스승의 사상과 가르침이 대를 이어 전해지고 있다는 마술과 같은 사실 앞에서 다시금 선생님을 향한 경외와 존경심이 일었을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저자의 묘사는 간결하고 짧지만 충분히 그 느낌을 공감할 수 있다.

 

나의 권유로 리영희 선생님의 책을 읽은 내 후배와 함께 한참동안 리영희 선생님의 삶과 그 분의 책에 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너무 좋았다. 대화를 나누는 우리 둘을 지긋이 바라보시는 선생님이 함께 계신 선생님의 서재에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이어지는 삶도 꽤 괜찮을 것 같다.

당장 뛰어 가 만나거나 전화해서 통화할 수 있는 선생님은 없지만 같은 선생님을 모신 이들을 발견하고 그들과 선생님의 이야기를 하는 것 말이다. 어떻게 보면 귀찮기도 하고 오랜 시간이 필요한 지난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 가치 있는 일이다.

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지의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로봇처럼 입력한 대로만 움직이면 원하는 성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쉽고 간단하다면 누구나 별 노력 없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를 독려하고 위로하고 가르쳐 줄 수 있는 무엇이 있어야 한다. 그 무엇은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틀린 것이 있을 수 없다. 우리의 인생은 각자 매길 수 없을 만큼 큰 가치를 가진 것이니까. 물론, 이것도 당위는 아니다. 그 무엇이 없이도 나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이미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테니까.

 

책을 읽으며 선생님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팔을 부축해 드린 자공을 부러워하고 내 현재를 안타까워 하다가 돌아가신 리영희 선생님 생각에 한참을 빠져 있었다. 잠시지만 행복했다.

이 책이나 일상의 어느 순간을 통해 내게는 선생님이었던, 그 무엇을 발견하는 분들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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