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빌라
전경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전경린 작가의 작품은 처음이다. 이름이야 워낙 유명한 작가니 당연히 들어봤지만 작품을 읽지 않았다. 나와는 맞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있었다. 전경린이라는 이름에서 내가 받는 느낌은 대게 이런 것들이었다. 해체, 추상, 형이상, 어려움 등. 왜 그런지는 모른다. 배수아 작가에게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다. 배수아라는 이름이 주는 이미지들. 배수아 작가의「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를 읽고 나의 이런 막돼먹은 이미지 수용이 반은 틀리고 반은 맞는 것이구나 싶었다.

내가 만난 전경린 작가의 첫 작품 「해변빌라」도 나의 막돼먹은 이미지 수용법칙을 더 공고하게 만들었다.

 

 

“이건 비밀인데요.”

“실은, 몇 년 전부터 팔이 무거워져서 피아노를 제대로 칠 수 없었어요.” (p.91)

 

 

내가 볼 때, 유지의 이런 고백은 거짓말이다. 팔에 정말 이상이 생겨서 팔을 움직일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심리적인 장애를 겪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내게는 그저 사랑을 갈구하는 몸부림으로 보일 뿐이다. 사랑하고 싶고 붙잡아 두고 싶지만 그럴 없는 이사경과 오휘를 마지막까지 붙들고 싶은 간절함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뒤얽히고 복잡 미묘한 내용과 심리의 발단이 되는 사건도 이것의 발로라고 보인다. 갑자기 교수 이사경 앞에서 단추를 풀고 속옷을 벗는 유지의 행위는 상식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독자인 내게는 그렇다. 작품 속에서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는 한다. 유지가 마지막까지 그토록 붙잡아 두고 싶었던 이사경과 오휘는 내내 우유부단하고 뜨뜻미지근한 인물들이다. 느닷없이 옷을 벗은 학생, 유지를 안는 것이 이사경이 내린 결론이다.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가족이 겪는 일에도 우유부단하고 뜨뜻미지근하다. 오휘도 마찬가지다. 피아노라는 생명체를 통해 유지와 하나가 되고 그것을 매개로 몸을 섞는 행위를 반복하지만 원하지도 않는 결혼을 해버린다. 버려진 유지를 뻔뻔하게 다시 찾는 것도 오휘다. 이사경과 오휘가 단 한번이라도 맺고 끊는 것을 분명히 했다면 유지도 거짓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세상은 몹쓸 장소고 삶은 끝없이 잔인하죠.”

 

 

<해변의 가능성>이라는 수익은 전혀 나지 않을 것 같은 카페를 운영하는 편사장의 말이 이 책의 주제로 보인다. 27살 먹은 현도라는 남자와 23살 먹은 수미라는 여자는 둘 다 고아로 자라 대전에서 지내다 수미가 아이를 낳았는데 병원에서 바로 죽어버렸다. 그 뒤로 이곳 해변빌라와 해변의 가능성이 위치한 남쪽 어느 바다까지 흘러온 것이다.

이상경과 그의 가족, 노부인과 백주희와 환, 손이린과 편사장, 해영과 진수 등 모두 그렇게 그렇게 남쪽 끝 바다로 흘러들어 갔다. 파도가 무한히 반복하며 나갔다 들어왔다를 반복하는 것처럼 그렇게 자연스럽게 흘러들어 갔다. 몹쓸 세상과 잔인한 사회가 생매장한 살아있는 화석들이 도착한 종착지다. 그렇기에 꿈도 없고 희망도 없다.

유지가 차린 피아노 학원 <피아노호텔>도 그렇기에 절망적인 작명이다. 작가와 책과 책의 인물들을 뭉뚱그려 생각하며 책을 읽다보니 <피아노호텔>이라는 작명도 세기말적 환상으로 느껴졌다. 단순히 피아노가 밤새 잠드는 곳이라 <피아노호텔>이라 지었다는 유지의 말도 거짓말로 보인다.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는 노랫말처럼 잊힐 만하면 찾아와 자신과의 추억과 몸을 찾는 오휘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답답하다. 나 같으면 욕지거리를 하면서 다시는 얼씬도 못하게 하거나 이혼하고 내려와서 같이 살자고 할 것 같은데, 유지는 내내 망설인다. 이사경은 작업실에서 유지와 그녀의 도플갱어(이사경에게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유지를 관찰한다. 그의 작품 속에 유지와 손이린이 함께 녹아 있다. 그렇지만 손을 잡지도 마음을 붙잡을 말을 하지도 않는다. 내내 우유부단하고 뜨뜻미지근.

 

 

“나는 오휘가 모든 것에 등을 돌리고 세상 밖으로 빠져나오듯 고아가 되어 내게로 올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하지만 기대는 공허하고 부모님, 병원, 결혼 같은 삶의 현실은 굳건하지요.” (p.63)

“대신 입체 모형이 쿵, 하고 바닥으로 쓰러지던 소리가 들린다. 나 여기 있어요, 그게 전부인 것이다. 나 여기 있어요, 하며 누군가의 세계로 들어가 스스로 태어난 것이다. 그날 이후로 이사경은 나에게 남인 적이 없었다. 어떤 형태로든, 어떤 의미로든.” (p.211)

 

 

유지는 그나마 현실에 부닥치려 몸부림친다. 오휘, 이사경과의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관계에 함몰되지 않는다. 부모님, 병원, 결혼 같은 삶의 현실을 인지한다. 이사경 앞에서 옷을 벗었던 그날, 그 교실에 있던 입체 모형이 쿵, 하고 바닥으로 쓰러지면 당연히 소리가 들린다. 이사경의 귀에도, 유지의 귀에도 들린다. 갑자기 쓰러지면 놀라기도 한다. 그것이 현실이다. 분명히 입체 모형이 쓰러져 소리가 나고 놀랄 일임에도 아무렇지 않다면 그것은 살아있지 않을 것이다. 비현실이다. 어떤 형태로든, 어떤 의미로든 이사경과 오휘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자신의 본질과는 괴리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유지의 한계다. 그리고 내가 전경린 작가의 작품을 읽는 한계다. 내게는 이런 설정과 전개가 난해하다.

 

 

“유지는 앞으로 토요일과 일요일에 여기로 와서 피아노를 쳐야 한다. 알았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p.42)

 

 

아들 이사경과의 스캔들을 자연스럽게 묻기 위해 노부인은 유지를 집으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연조에게 피아노 과외를 시킨다. 지극히 현실이다. 노부인은 우유부단하지도 뜨뜻미지근하지도 않다. 직선이다. 과감하다.

 

 

“유지, 네가 보여.”

“나는 눈을 뜬 채 물속에 들어가듯 그의 품 안에 얼굴을 묻었다. 물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서늘했다. 그리고 캄캄했고, 무엇보다 따스했다.” (p.33)

 

뭔 말인지 모르겠다. 이사경의 말이다. 그리고 유지의 말이다.

차라리 내게는 책의 말미에 편사장이 폭풍 후 해안가로 떠밀려 내려 온 거대한 목선을 보고

“그럴지도 여긴 온갖 것이 다 밀려오거든.”이라고 말한 것이 더 현실적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보인다고 말하고 가질 수 없는 것은 깨끗하게 잊어버리는 것이 나은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책에 등장하는 여러 피아노곡들이 실제다. 한 번도 그래본 적이 없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책에 등장하는 피아노곡을 몇 곡 들어봤다. 그 중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21번>이 가장 좋았다. B플랫 장조라고 곡 설명이 되어 있는데 도입부 ‘딴따따따다다다’에서는 단조곡으로 들렸다. 브렌델의 연주와 리히터의 연주가 소개되어 있어 두 연주주의 곡을 들어 봤는데 내게는 브렌델의 연주가 더 인상 깊었다. 피아노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는 내 귀에도 인상 깊게 들렸으니 대단한 곡, 대단한 연주자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았다. 나는 책보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21번이 더 현실적이었다. 내 귀에 들리고 내 마음에 와 닿았으니 말이다. 그만큼 책은 나와 멀었다. 읽을수록 수긍이 되고 인물과 사건의 전개에 빠져 들어야 하는데, 점점 멀어졌다.

덕분에 좋은 피아노곡을 듣게 된 것은 고마운 일이다.

 

 

작품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인물은 유지도 이사경도 아닌 편사장이었다. 편사장은 남쪽 마을 끝에 <해변의 가능성>이라는 전혀 그 해변의 분위기와는 맞지 않는 카페를 열었다. 오가는 손님이라 해봐야 몇 명되지 않는다. 좋은 술과 그랜드 피아노와 음악을 갖추었지만 강남도 아니고 큰 도시 번화가도 아니고 유명한 관광지도 아닌 다음에야 전혀 돈 벌 가능성이 없는 <해변의 무가능성>이다. 그는 자신의 카페에 드나드는 손님들에게 술을 대접하고 음악을 대접한다. 멋진 해영이라는 애인도 있다. 작품 속에서 이야기하듯이 편사장은 해영을 위해 모든 것을 한다. 사주고 입히고 먹이고 등등. 그런 그녀가 진수라는 놈과 도망가 버린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이 앞에 잠시 언급했던 거대 목선이다. 폭풍 이후 <해변의 가능성>이 있는 무가능성의 해변으로 밀려들어 온 현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데 쉽게 처리하지 못하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 말이다. 등장인물들은 편사장의 카페에서 위로와 위안과 잠시나마 안정을 얻었지만 편사장의 결말은 애처롭다. 이것 또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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