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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 시대 - 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알랭 드 보통 지음, 최민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평점 :
손석희의 뉴스룸이 시작되었다.
반응을 살펴보니 대체로 긍정적이다.
“한걸음 더 들어가 진실에 접근하는 것, 그 방법에 있어서 사실을 공정하고 품위 있게 다루자는 것”
100분 편성이라는 파격적인 구성과 지난 세월호 참사 기간 중 꾸준한 취재와 보도로 대중으로부터 얻은 신뢰를 바탕으로 손석희 만의 브랜드가 런칭 된 것이다.
사실 나는 여전히 회의적이다. 손학규 전 의원이 아무리 합리적이고 대중으로부터 지지를 받고 정치를 잘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한나라당 출신이다. 태생적 한계를 벗기란 태어날 때부터 가졌던 고유의 기질을 바꾸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 손석희의 뉴스룸은 JTBC에서 방송된다. JTBC는 종편이다. 종편의 탄생은 다분히 정치적인 이해에 의해서다. 많은 언론인들과 학자들, 대중들이 반대를 했지만 결국 공룡은 탄생했다. JTBC는 중앙일보에 속해있다. 중앙일보는 삼성에 속해있다. JTBC는 삼성과 이건희씨 일가에 대한 비판을 절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제 아무리 손석희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각에서 손석희씨의 JTBC행에 대해 비판하면서 차라리 대안언론에 참여했어야 한다. 재벌의 개가 되려 한다. 등의 노골적이고 지극히 감성적인 비판은 더 유치하다고 본다. 손석희씨의 JTBC행은 지극히 개인적인 가치 판단에 따른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마치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고 알아서 좌절하고 절망하거나 맹목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지금껏 진보진영이 보여준 찌질함의 맥락과 일치한다. 강준만의 ‘진보 싸가지론’에 대해서도 기다렸다는 듯이 진보·지식인 진영에서 한마디씩 거드는 것과도 비슷한 자세다. 유치하고 지리멸렬하기 짝이 없는 행태다.
아무튼 나는 손석희의 뉴스룸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종편이 탄생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지금은 자사의 공신력과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손석희의 보도방향과 편집방향에 대해 별다른 압력을 행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이 온다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소유한 언론사에서 자기들의 치부를 까발리고 전국민들에게 알리는 바보짓을 할 재벌이 어디에 있나.
다만 뉴스라는 언론형태의 지평을 넓히고 1시간 뉴스라는 낡은 틀을 깼다는 것에는 긍정적이다. 되지도 않는 뉴스들을 보느라 피곤한 사람들이 채널을 주르르 돌리다가 손석희의 뉴스룸에 오랜 기간 멈춰 있는 일이 많을 것이라 생각된다.
분명 기존 뉴스들과는 다를 테니까.
“삐걱거리는 몇몇 우파와 좌파 집단들이 편향이라는 개념에 관한 우리의 인식을 장악했을지언정, 궁극적으로는 삶에 대한 시각만큼이나 수많은 편향들이 존재한다.” (p.33)
한국의 정치인들이 가장 잘 하는 거짓말이 있다.
“많은 국민들이... 대다수의 국민들께서...”
라는 거짓말.
그들이 규정한 ‘많은 국민들’과 ‘대다수 국민들’의 범위가 어디까지 인지 본인들도 결코 알 수 없다. 언론환경 자체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사실 보도 자체도 제대로 되지 않는 터라 알랭 드 보통의 이 책 「뉴스의 시대」가 더 불편하게 읽혔다. 이 책의 전제는 최소한 뉴스가 제대로 사실과 팩트를 보도한다는 데 있는데, 한국의 언론은 그렇지 않다. 오늘 오후 분명하게 벌어진 일이 저녁 뉴스에서는 모습을 감춘다. 정치적 이해와 언론조직의 가치 판단에 따라 희석되고 편집된 뉴스를 접한 지 오래다. 많은 국민들은 더 이상 뉴스를 믿지 않는다. 느닷없이 연예인의 열애, 범죄 뉴스가 보도 되면 ‘또 무슨 일 덮으려고 저래?’라는 무조건 반사를 하게 된다. 파블로프의 실험에 피실험 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뉴스는 범죄자가 경찰차 뒷좌석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우리와 우리 사회의 무수한 병폐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지금 막 확인되어 안전하게 제거되었다는 희망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p.71)
한국에서는 범죄자가 경찰차 뒷좌석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좀처럼 볼 수 없다. 특히 힘 센 사람들의 경우 더욱 그렇다. 고개 빳빳이 들고 조사를 받으러 들어가거나 휠체어를 탄 채 세상에서 가장 아픈 사람 코스프레를 하면 그만이다. 얼마 전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법원의 판결도 그렇다. 국정원법 위반을 하여 정치적으로는 범죄지만 선거법 위반은 아니다. 라는 판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판결이 보도된 즉시 SNS에서는 패러디가 봇물 쳤다. 사람들은 내가 발붙이고 있는 땅에서 벌어지는 일을 제대로 알기 위해 외신을 찾아본다. 이것이 한국의 언론현실이다. 기성·제도권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않은 채 권력에 빌붙어 그들이 원하는 뉴스만 다루다 보니, 국민들은 원하는 뉴스를 접할 수 없다. 많은 대안언론이 쏟아졌지만 영향력은 아직 많이 부족해 보인다.
최소한 뉴스를 통해 나쁜 놈이 끌려가고 처벌받는 것이 보여야 하는데, 이것이 이 책과 알랭 드 보통의 전제일 텐데, 한국에서는 요원해 보인다.
“가장 중요한 사안의 맥락을 대다수 대중이 단 한순간도 붙잡을 수 없도록 무질서하고, 복잡하고, 단속적인 방식으로 사건들을 보도하는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 (p.36)
그러니 쓸데없는 뉴스가 넘쳐 난다. 제대로 사실 확인도 하지 않은 설익은, 뉴스라 할 수 없는 소식도 보도되기도 한다. 뉴스가 가진 가치가 땅까지 추락했다. 그런데 또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곳이 한국이다. 주구장창 종편을 틀어 놓은 식당이나 상점이 즐비하다. 그들은 하루 종일 그 종편의 뉴스가 사실인 줄 알고 산다. 얼마나 자극적이고 무책임한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일단 TV에서 방송되는 뉴스니 사실이라 믿는다. 사실과 팩트를 전달해야 하는 뉴스를 믿음으로 반응한다. 어처구니없는 현실이다. 종편 탄생 전에는 생전 보지도 못했던 사람들이 종편에 나오니 전문가가 된다. 그렇게 그 종편을 믿는 사람들은 믿게 되는 것이다.
언론자유지수가 해가 갈수록 추락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현상의 결과다.
“재난 뉴스가 완화시켜주는 것은 바로 성취의 이미지들이 지닌 학대 효과다. 교통사고, 암, 폭발, 화재는 우리의 실패를 상대화한다. 재난은 그 안에 광범하고 유익한 메시지를 품고 있다. 즉, 인간은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이다.” (p.231)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폭격은 전 세계로 전해졌다. 그간 최소한 한국의 언론보다는 정직하고 언론사명의 척도가 높을 것이라 기대되었던 유럽 유수의 언론들도 눈을 감고 제대로 그것을 보도하지 않았다. SNS를 통해 전해진 팔레스타인 현지의 모습은 놀라웠다. 이스라엘인들은 마치 불꽃놀이 구경하듯이 가자 지구에 떨어지는 미사일과 폭탄을 구경하며 환호했다.
유럽인은 알랭 드 보통에게는 재난뉴스가 학대 효과를 일으키고 우리의 실패를 상대화하는 것이라 생각될 수 있겠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재난뉴스를 보고 ‘나는 살아있어서 다행이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어떻게 저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너무 가슴 아프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훨씬 많을 거라 생각한다. 인간은 고통 받기 때문에 그 고통을 겪는 상대에게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의 그 시간, 한국의 대다수 국민들은 배가 거꾸로 가라앉는 과정을 생중계로 지켜봤다. 잊힐 수 없는 트라우마다. 세월호 참사에서 그 어떤 “광범하고 유익한 메시지”를 나는 찾을 수 없다.
나는 이 책이 좀 지루했다. 알랭 드 보통의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아서인지 문장이 낯설고 표현이 난해했다. 어려운 개념을 설명하느라 난해한 것이 아니라 쉽게 풀어도 될 문장을 굳이 문학적으로 꼬아 놓은 것 같았다. 자신의 문학 작품을 쓸 때나 사용하면 좋을 표현과 구성이 오히려 책에 대한 몰입을 방해했다.
* 이 리뷰는 알라딘 신간평가단에서 투표를 통해 추천된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작성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