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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
강희진 지음 / 비채 / 2014년 5월
평점 :
2014년 대한민국은 세대 갈등이 첨예한 사회다. 압축적인 산업화를 경험한 사회의 일반적인 경향이라고 하기에는 과도하고 과격하며 비상식적이다. 산업화의 상징이라고 일컬어지는 박정희에 대한 평가를 보면 현재 대한민국이 겪는 세대갈등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조국근대화를 이룩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탈출시켜 준 구세주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헌법파괴, 헌정유진, 인권탄압으로 민주화를 파괴한 독재자로 평가된다.
대학에 들어가 책을 읽으며 사회와 인문학적 소양을 깨우친 뒤, 세상이 달리 보였다. 그간 배워왔던 것들이 모두 진실이 아닐 수 있음을 인식하는 것은 꽤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그러고 나서 서른 줄이 넘기 전까지 나는 도무지 산업화 세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명백하게 잘못된 독재자이고 나쁜 사람임에도 신처럼 떠받들며 추앙하는 기성세대를 보며 기가 막혔다. 멀리서 찾지 않아도 된다. 내 부모님과의 대화만 가만히 톺아보면 된다. 2002년 대선, 나는 부모님이 노무현 후보에게 투표하시도록 설득하려 했다. 조곤조곤 말씀 드리면 상식 수준에서 이해하시고 설득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도무지 말이 먹히지 않았다. 읽었던 책, 찾아봤던 사실에 입각한 자료도 부모님께는 도무지 먹히지 않았다. 박정희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줄곧 1번에만 투표해 온 심리적 기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서른이 넘어 어떤 어른과 이야기를 하다가 이 모든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궁금증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전쟁을 겪고 굶어 보지 않았으면 몰라~”
맞다. 나는 전쟁을 겪지도 않았고, 배를 곯아 본 적도 없다. 전쟁 후 산업화 과정을 거치며 자신의 일상과 동네, 사회와 국가가 어떻게 변해갔는지 온 몸으로 체험한 내 부모님 세대와 그 이전 세대를 나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설픈 지식과 논리로는 감당할 수 없는 그들의 삶에 오롯이 새겨진 문신과도 같은 기억과 추억은 절대로 지워지거나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녀자들이 전쟁을 벌인 것도 아니고, 전쟁에 진 것도 아녀자들의 잘못은 아니건만 전쟁으로 인한 단죄는 아녀자들의 몫이었다. 임금은 교지를 내려 한강, 소양강, 금강, 예성강, 대동강 등을 회절강이라 칭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아녀자들에게 그곳에서 회절하는 정성으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김씨 부인은 콧방귀를 끼면서 강에서 몸 씻기를 거부하고 되레 침을 뱉고 돌아섰다.” (p.271)
화냥년이라는 욕은 아주 저속하고 불쾌하다. 욕 중에서도 아주 못된 욕이다. 일상에서도 잘 듣지 못하는 욕이다. 간혹 TV에서나 소설에서 보게 되는 단어다. 어린 시절 나는 화냥년이 사창가의 여성들을 비하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절개를 잃고 고향으로 돌아온 여성들을 가리키는 ‘환향녀’라는 정확한 명칭을 알고 나서 퍼뜩 들었던 느낌은 서글픔이었다. 결코 돌아와서도 환영받지 못한 전쟁의 피해자들의 민낯을 부끄러움 없이 폭력적으로 대우한 것이니 말이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온 여성들의 삶도 마찬가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특히 병자호란 뒤 청나라로부터 돌아온 여성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성들의 숫자보다 적을 것이다. 제도적으로 죽음을 방치하고 조장했다. 그런 와중에도 질긴 목숨을 부지해 돌아온 여성들을 향한 노골적이고 집요한 조롱과 압박은 겪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강도의 폭력이었을 것이다. 사대부나 평민, 노비를 막론하고 닥치는 대로 절개를 잃거나 청나라로 끌려갔다. 먹히지도 않을 사대사상에 찌들어 망해가는 명에 빌붙은 사대부와 조정은 청나라의 만행을 막지도 못했고, 청나라의 만행에서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피해자 여성들을 지키지도 않았다. 특히, 사대부가(家)의 여성이었다면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정절과 신념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는 선비(사대부)문화에서 정절을 잃은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한가지뿐이다. 조선 중기 이후 조정에서 내려진 열녀의 상당수는 만들어진 열녀라는 말도 있지 않나.
“누구도 전쟁에 대해, 패배와 굴욕, 죽음과 상처에 대해 책임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꽃이 피고 또 졌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 (p.7)
나라의 가장 큰 어른인 임금이 한갓 오랑캐의 발아래 이마를 찧고 예를 갖추는 비극이 지난 후의 나라꼴은 어땠을까? 내가 박정희를 추앙하는 세대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처럼, 전쟁을 겪지 않은 이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작가가 묘사한 것이 그대로 마음에 다가온다. 시간은 가고 삼라만상은 여전한데, 숨길수도 없고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기운과 느낌은 어찌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임금이 글쎄~ 오랑캐놈 사타구니 아래를 기어 지나갔대~’
‘임금이 글쎄~ 오랑캐놈 발가락을 핥았대~’
‘임금이 글쎄~ 오랑캐놈 하고 붙어 먹었대~’
말은 말은 물고 늘어지고 고꾸라지며 도성을 떠돌았을 것이다.
“단지 드러내지 않을 뿐 모두가 가슴속에 공포를 숨기고 사는 세상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장안은 공포에 휩싸였다. 치욕과 분노, 감당할 수 없는 자기 비하가 가져온 공포였다.” (p.280)
짐승보다 못한 오랑캐로 치부하던 청나라 놈들에게 완전히 유린당한 조선과 그 속에서 사는 이들에게 호란은 씻을 수 없는 굴욕이었다. 하지만 변함없었던 것은 나라를 움직이는 자들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오랑캐가 아니라 자신들의 상국(上國)이 되었음에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여전히 ‘대명, 대명’을 지껄였다. 힘도 없고 능력도 없는 자들이 도그마에 빠져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뜬구름 위에서 꿈을 꾸고 있었다. 어차피 백성들, 국민들의 삶은 전쟁 전이나 후나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들이 국가를 움직이고 만들어간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코앞까지 다가온 공포였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존재기반 자체를 뒤흔들어 엎어버릴 수 있다는 공포를 겪었다.
“임금은 황폐한 민심으로부터 왕위를 지키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반면 임금의 바로 코 밑에서는 반정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 (p.76)
“대감, 들으셨습니까? 전하께서 미행(微行)중에 시정잡배들과 어울려 술을 드시고 그들과 함께 주정을 부렸다 합니다.” (p.28)
정신 차리지 못한 자들은 무너진 임금의 코 밑에서 반정을 준비했다. 사대부 나라의 명분과 이념을 저버린 채 짐승보다 못한 오랑캐와의 화친을 주장한 광해를 몰아낼 때와는 다른 반정의 이유였다. 자신들에게 쏠리는 호란에 대한 책임을 떠넘기기에는 임금만한 먹잇감이 없었다. 호란 이전부터 호란 이후까지 줄곧 멍청하고 유약하며 무능력의 전형을 보여준 임금을 물러내고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왕족 중 하나를 임금의 자리에 앉히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그 어떤 왕보다 완벽하게 굴욕적인 패배를 겪은 임금은 미쳤다. 미친척한 것이 아니라 미쳤다. 광해를 쫓아낸 뒤 자신을 용상의 자리에 앉힌 자들이 언제라도 자신을 폐주 광해 취급할 수 있다는 것을 체득한 것이다. 오랑캐 장수의 발 앞에 이마를 찧으면서 어쩌면 임금은 모든 자존심을 집어 던졌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코 광해처럼 되지 않으리라 다짐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자주 미행을 다니며 미친척했다. 시정잡배들과 어울려 놀기도 하고 자신의 코앞에서 임금을 욕하는 무리배들과도 어울렸다. 따르는 신하들과 조정의 대신들은 임금의 연기에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
“이신은 황제의 칙사(勅使), 조선을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황제의 오른팔이었다.” (p.10)
“임금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다른 한편으로 임금은 이신이 손에 쥔 <동몽선습>을 불구덩이 속으로 던져 넣는 모습을 상상하며 내심 통쾌함을 느꼈다. 삼전도의 굴욕은 사대부들이 조선의 임금을 제후로 여기고 명나라 황제를 진짜 임금이라고 섬기는 바람에 생긴 참극이었다. 그 똥물은 오롯이 왕의 몫이었다.” (p.53)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청의 속국이 되었다. 조선의 신하와 백성과 땅과 하늘은 조선의 것이 아니라 청나라의 것이 되었다. 청의 황제는 자신의 오른팔을 제후국에 파견해 속속들이 간섭했다. 칙사 이신 이전에는 무례와 간섭이 도를 넘었다. 하지만 이신은 그렇지 않았다. 폐주 광해의 내금위장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임금도 알고 조정 대신들도 알고 있었다. 황제의 입이자 귀였기에 어찌할 수 없었을 뿐, 임금에게도 조정 대신들에게도 칙사는 눈엣가시였다. 제거할 수 없으면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이용할 수밖에 없었으나 이신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돈이나, 권세로 움직일 수 없는 인사였다. 그래서 임금과 대신들에게는 더 골치였다.
“나쁜 왕은 죽여야 한다... 이신은 중얼거렸다. 오랫동안 품고 있던 진심이었다.” (p.381)
이신은 처음부터 왕을 죽이려 했다. 조정 대신들도 임금을, 왕을 죽이려 했지만 이유는 다르다. 맞다. 나쁜 왕은 죽여야 한다. 나쁜 지도자는 없어져야 한다. 왕조국가에서 왕을 죽인다는 것이 하늘을 거스르는 것이라 하여 역모라 지칭했지만, 그 어떤 왕조국가에서도 역모는 늘 시도된 일반적인 현상이다. 하늘이 있지만 하늘이 없는 것과 같다. 조정 대신들이 결코 볼 수 없었던 임금의 실체를 마주한 이신은 임금의 목을 가누던 칼을 내려놓는다.
“짖어라.”
이신은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
“멍멍!”
임금은 목청을 높여 개 짖는 소리를 냈다.
“멍멍, 멍멍!”
이신은 스르르 칼을 내렸다. 그는 임금의 목을 배고 싶었으나 어디에서 임금은 없었다. 사대부 이종도 보이지 않았다. 죽을 수 없는 자의 비애만이 가득했다. 이신은 그 비애를 임금과 함께 남겨두고 돌아섰다. (p.393)
임금은 이미 삼전도에서 곤룡포를 벗어 던졌다. 임금이지만 임금이 아니고 왕이지만 왕이 아니었다. 이미 그랬다. 그에게 공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황제의 칙사도, 조정의 늙은 여우같은 대신들도 실재하는 공포가 아니었다. 그래서 번쩍이는 칼날 앞에서 기꺼이 개가 되어 짖을 수 있었다. 별다를 창피와 수모가 아니었다. 인조는 조선의 왕이 아니라 생물학적 인간 이종에 머물기로 작정했다. 그렇게 이미 왕이 아닌 자로 살기에 적합한 자(者)가 된 것이다. 그런 지도자를 가진 백성은 그것 자체가 공포다. 호러다. 절망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자꾸만 현재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또한 비극이었다. 슬픈 소설, 슬픈 현실이다. 400년이나 지금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