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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가끔 내가 아닌 내가 어딘가에 있는 것은 아닌 가 상상해 본다. 혹은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는 것은 아닌 가 상상해보기도 한다. 실제로 다중인격 같은 장애가 존재하기도 하고 이것은 책이나 드라마 영화에서 자주 사용되는 소재다.
나는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에 다중인격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딱 한 사람 있었다. 군 시절 만난 사람인데, 내 소대원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소대장의 가장 큰 업무 중 하나가 병력관리다. 적어도 한 달에 두어 번은 일대일 면담을 해서 심경의 변화에서부터 집안 사정, 여자 친구와의
관계까지 최대한 자세하게 파악해야 했다. 전문적으로 심리나 상담을 공부한 것은 아니지만 전문가가 아니어도 일대일 관계에서 더 친근해지려는 목적이
더 컸던 것 같다. 군에서도 그것을 요구했던 것 같고. 아무튼 평소 말이 별로 없고 어눌하며 선임병들에게 여러 가지 지적을 받아오던 이병을
상담했는데, 그 친구의 이야기는 놀라웠다. 자기 안에는 또 다른 자기 자신이 여러 명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 군 생활을 하는 자신도 있고 여전히
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자신도 있으며 또 다른 삶을 사는 자신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것으로 언제든지 불러올 수 있고 내쫓을
수 있지만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아연실색했다. 국가의 징집시스템이나 병무청의 신체검사가 조금만 더 전문적이고
세부적이었다면 그 친구는 현역병으로 입대하지 않았을 텐데, 일단 몸이 건강하다 보니 소초 근무까지 하게 된 것이었다. 상급 부대에 보고하고
전문가의 심층 상담을 받은 뒤 병원에도 입원하고 꾸준하게 약도 복용했다. 보직도 큰 스트레스 받지 않는 곳으로 옮겼다. 몇몇 병사들은 최고의
연기자라며 하나에서 열까지 연기라고 항의하기도 했지만, 나와 단 둘이 상담할 때의 그 모습과 눈빛은 전혀 거짓이 아니었다. 영화에서 보는 것보다
더 리얼하고 무서웠다. 나도 전역하고 나중에서야 찾아보니 ‘해리성 정체감 장애’라는 정확한 명칭을 알게 되었다. 가끔 군 생활을 떠올리면 그
친구가 꼭 생각난다.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지. 아직도 여러 명의 자신과 살고 있는지 말이다.
“당신을 처음 봤을 때,
나를 닮았다고 생각했어. 당신은 자신의 인생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고 있어. 뭔가에 휘말려 들어 자신의 본질을 망각하고 싶어 한다고. 자신의
인생에서 유리되려고 하고 있어...” (p.165)
주인공 신견이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하는 사설탐정은 놀리듯 신견의 삶을 간섭한다. 언뜻
걱정해 주는 것 같지만 걱정이 아니고 조롱이다. 평범하던 신견의 삶에 사나에가 들어오면서 급류를 만난 것처럼 휘말려 들어간다. 신견 자신의
의지도 아니었고 사나에의 의도라는 것을 뒤에 알게 되지만 개의치 않는다. 더군다나 신견 자신은 다중인격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평범하다니! 멍청한.
“너의 침묵을, 오른쪽
허벅지를 긁어대는 네 버릇을, 오른쪽 눈만 질끈 감는 습관적인 틱을, 새어머니의 속옷을 훔쳐내는 짓을, 같은 반 친구 유리짱을 껴안아버린
실수를.” (p.10)
“뭔가 재미있는 거
해보자. 나는 생각나지 않으니까 네가 충고 좀 해줘.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어렸을 때처럼.”
(p.139)
작가가 묘사한 신견의 다중인격을 읽으며 앞부분에서 언급한 소대원이 떠올랐다. 책의 묘사와는
전혀 달랐던 소대원의 고백이었지만 ‘그때 그 녀석이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었겠구나. 이런 일들이 머릿속에서 일어났겠구나.’ 생각하니, 한참
전에 일어난 일이지만 오늘 일 같이 생생하다. 어쩌면 사나에에게 갑자기, 급속도로 빠져든 자기 자신이 R인지 아닌지조차 모를 수도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범행 현장에는 사체를
장식하듯이 무수한 종이학이 흩어져 있었다. 특히 아내 유리의 사체는 종이학에 파묻혀 있었다. 그 숫자가 도합 삼백십이 개였다고 한다.”
(p.39)
이제는 한국에서도 워낙 자극적이고 엽기적인 살인 사건이 많이 일어나서 웬만한 살인 사건에는
놀라지 않게 되었다. 일본에서 예전에 일어난 살인 사건들 중에 벽에 시체를 넣고 콘크리트로 겉을 다시 발라버린 사건이 기억난다. 그 장면을 본
것도 아니고 다른 책을 읽다가 그 사건이 소개되어 인터넷으로 찾아본 것뿐인데, 이후 며칠 동안 잠을 쉽게 들지 못할 정도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력을 멈출 수 없었다. 대부분 상상하기도 싫은 장면이 마지막 장면에 나타나서 이후 악몽을 꾸기도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책에서 묘사되는
‘종이학 사건’은 끔직하다. 일가족 중 딸만 살아남고 부모와 오빠가 죽은 사건이다. 내용만 전개해도 뭔가 심상치 않고 꿍꿍이가 있는 듯 없는
듯, 찝찝한 사건이다.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렇겠지만 사나에도 ‘종이학사건’ 이후 생긴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신견이 어려서 만난 R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그렇게 신견과 사나에는 만날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둘의
만남은 처음부터 불안했지만 그 불안함만큼 뜨겁게 타오른다. 서로의 불안함과 상처와 몸과 성욕을 한 데 뭉뚱그려 뒤엉킨다.
“당신에게 살해되면, 내
죄는 사라져.” (p.150)
“.....나는
범죄자조차 되지 못해.”
“그렇건만 내면에는 R이
계속 존재한다는 모순. 해방도 못하면서 아마 앞으로도 내내 R이 평생 존재하리라는 모순.”
(p.182)
사나에는 신견과의 섹스 도중 자신을 죽여줄 것을 여러 번 요구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신견을
속여 자신을 불행한 가정사로 인해 황폐화된 피해자로 코스프레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너무 악의적이다. 차라리 신견과 뒤엉킨 그 순간은
솔직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거듭된 사나에의 요구에 신견은 차라리 R을 불러내 살인을 마무리하는 것이 아니라 무너져 가는 사나에의 정신과 몸을
보며 성욕을 불태운다. 처절하고 너저분하지만 사실적이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p.66)
“창 건너편에서
사이렌 소리가 났다.” (p.80)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났다.” (p.102)
사이렌 소리는 불안하다. 차를 타고 갈 때도, 집에서 TV를 보고 있을 때도 사이렌 소리가
들리면 불안하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에 일본인들이 집단적으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것은 아닌 가?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하게 되었다. 이
책과 같은 소설뿐만 아니라 다른 인문, 사회분야 책을 읽어도 동일본 대지진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특히 소설에서는 불안함의 근원으로 묘사된다.
주인공 신견도, 사나에도 불안하다. 그 둘 뿐만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인물들도 하나같이
불안하다. 그들이 모여 사는 직장과 가정, 사회도 불안하다.
모두가 불안하다. 정규직이다 아니다. 중산층이다 아니다. 가 중요하지 않다. 모두가
불안하다. 돈을 발에 채일 정도로 가져보지 못해 그들이 어떻게 얼마만큼 불안한지 짐작할 수는 없지만 그들도 분명 불안하다. 대통령도 불안하고
국회의원도 불안하고 재벌 회장도 불안하다. 그것이 현실이다. 리얼이다.
“여기까지 와버렸으니
이제는 그래도 상관없다. 나는 나 자신의 악덕도 이제는 알고 있으니까... 설령 최악의 사실이 드러난다고 해도, 어찌 됐건, 우리는 이미 떨어질
수 없다. 뭔가 불편한 진실이 만일 또 있다고 해도, 이제는 잊어버리면 된다.” (p.245)
불안과 아픔을 가진 채 살아간다. 모두들 생채기가 난 채 일상에 파묻힌다. ‘종이학
사건’을 둘러싼 실재적 진실에 거의 다다른 신견은 포기해 버린다. 그 실재적 진실을 파헤친다고 해서 자신의 삶, 그 어떤 것도 더 좋아지거나
나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다. 절대로 말해서는 안
되는 비밀이다. 기밀이 해제되는 비밀문서처럼 그렇게 용인될 수 없는 비밀이다. 당신에게도 그런 비밀 하나쯤 있으리라 생각한다.
신견이 사나에의 진실을 파헤치는 것 보다 차라리 사나에와 한 몸으로 뒤엉켜 버린 것을 택한
것처럼 죽을 때까지 비밀을 간직하는 것을 택한 나와 같은 사람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