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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
양국일.양국명 지음 / 네오픽션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오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학교였다. 오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학교에는 꼭 그 학교만의 전설이 있다. 주로 그 전설은 확인되지 않은 루머가 대부분이었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 밤 12시가 되면 운동장에 있는
200백년도 더 넘었다는 회나무가 거대한 괴물로 변하고 학교 건물 정중앙에 위치한 이순신 장군 동상이 살아 움직여 괴물로 변한 회나무와 한판
싸움을 벌인다는 이야기들. 그때만 해도 운동장에 있는 야외화장실은 푸세식이었다. 친구들과 축구를 하다가 공이 그 근처로 가면 누가 가서 공을
가져올 것인지 가위바위보를 하기도 할 정도로, 냄새만으로도 공포였던 그 화장실에서도 밤 12시가 되면 일이 벌어진다고 했다. 푸세식 화장실 저
밑바닥에서 하루 종일 웅크리고 있던 귀신들이 뛰쳐나와 온 운동장을 활보한다는 이야기들. 특이한 것은, 오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학교에도 이런
괴담이 떠돌았고 생긴 지 얼마 안 된 신생 학교에도 이와 비슷한 괴담이 떠돌았다는 것이다. 전교생이 알고 있는 괴담들이었지만 그 어떤 학생도
실제로 본 적은 없는, 뭐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이
책 「악령」의 주 무대, KM문화예고는 명문 사립고다. 전교생이 학교에서 기숙하며 공부하는 학교.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산중턱에 위치한 학교다.
학교로 가기 위해서는 으스스한 숲을 지나야 한다. 학교는 기괴한 모습이고 교사들과 학생들도 기괴하다.
작가가 설정한 학교의 모습 중 가장 특이하게 생각되었던 것은 교장을 제외한 모든 교사가
여자였다는 것이다. 나는 남고를 다녔는데, 그 학교도 지역에서는 알아주는 명문사립고였다. 지역 1등 고등학교가 되지 못하는 것을 천추의 한으로
여긴 이사장과 교장이 부득불 1등을 따라잡기 위해 부단히도 아이들을 괴롭히고 청소년 학대로 여겨지는 구타와 강요된 학습이 만연하던 곳. 아무리
남고라지만 내가 다닌 학교에는 여교사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다못해 행정실 직원들도 죄다 여직원들. 학교에서 여자를 볼 수 있는 곳은 딱 한
곳. 식당뿐이었다. 급식을 담당하는 아주머니들과 매점 직원 누나. 학교에 있는 모든 교사가 남자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개인적으로는 아주 안
좋은 결과를 낳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다닌 학교가 그랬다. 모두 남자들만 모여 있다 보니 이게 뭐 이곳이 군댄지, 학굔지 구분이 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교사와 학생간 수직적 위계관계가 단단하다 보니 학년간 위계관계도 똑같이 따라갔다. 학교 건물 내·외부에서 1학년이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니면 날아차기를 당하거나 뒤통수를 가격당하거나 2,3학년 교실로 끌려올라가는 경우도 있었다. 점심을 먹지도 않고 농구코트를 먼저
맡기 위해 달려가더라도 천천히 먹을 밥 다 먹고 이 쑤시며 2,3학년들이 오면 비켜주어야 했다. 군대와 똑같았다. 1,2학년 때 그만큼 당했으니
3학년이 되면 자기가 당했던 그대로 1,2학년을 대했다. 내 학창시절 중 고등학교 때가 가장 재미있으면서도 가장 불만도 많고 숨 막히기도 했다.
태인은 불량학생이다. 아버지가 국회의원이지만 받아주는 학교가 없어 이 학교까지
흘러들어왔다. 이 학교는 도시에서는 멀리 떨어져있었지만 명문 고등학교였기 때문에 태인이 전학 올 수 없는 학교였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국회의원이다. 안되는 게 없는 한국이니까.
태인은 전학 온 첫날부터 여러 가지 일에 휘말린다. 학교 입구에 빽빽하게 늘어 선 나무 저
깊숙한 곳에서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마녀라고 불리는 학생주임은 로봇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수지와 지원을 만나고 자신의
기숙사 방 침대에서 불과 며칠 전까지 지내던 은호의 노트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은호가 죽었는지 시종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불길한 이야기도 듣게
된다.
“넌 그 아이
대신이니까”
“그 아이 방, 침대,
그 아이의 자리가 비었을 테니까.” (p.58)
은호의 방, 침대, 은호의 자리가 이제는 태인의 자리가 되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고등학교는
졸업을 해야 하기에 참아야 했다. 이전 학교에서는 당장 주먹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이 학교에서는 참아야 했다.
“학교의 비밀이 존재하든
안 하든 그것을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 즐겁게 학교생활을, 그리고 클럽 활동을 할 수 있을 거잖아?”
(p.174)
태인은 이니그마라는 클럽에 가입하게 된다. 학교에서 정한 인원수를 유지해야 클럽을 유지할
수 있고 그들만의 공간을 유지할 수 있는데, 원래 멤버였던 은호의 자리가 없어지면서 이니그마는 클럽당 배당되는 방을 비워야 할 판이었다. 그때
태인이 나타났다.
이니그마는 학교의 비밀을 밝히려 했다. 그 비밀이 무엇인지,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밝혀내야
하는 것인지 모르는 채로 그들은 학교의 비밀에 다가간다. 은호가 없어지기 전 자신의 노트에 남겼던 믿기 힘든 SF 호러 판타지 기록은 태인과
이니그마를 움직였다.
하지만 사람 사는 곳이 언제나 그렇듯이 학교의 비밀에 더 다가가 은호의 의문스러운 실종과
그 이전까지 있었던 다른 학생들에 대한 실종의 이유를 밝혀내려는 아이들도 있는 반면 교장의 면담에 의해 완전히 바뀌어 버리거나 애초부터 학교의
비밀을 낱낱이 밝히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았던 아이들이 나오게 된다.
“이런 곳에서 지내다
보면 가장 발달하는 것 중 하나가 상상력이거든.” (p.90)
지원
“사람을 겁주고, 사람을
상처 주고, 사람을 죽이는 건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야.” (p.125)
“나도 알아.”
인간은 상상력이 있어서 비겁해 지는 거래. 그러니까 상상을 하지 말아 봐. X나
용감해 질 수 있어.
영화 <올드보이>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사다. 오달수가 최민식에게 린치를
가하면서 하는 대사인데,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삶이 힘들고 현실이 고달플 때마다 저 대사를 되뇌게 된다. 어느새 습관처럼 돼 버린 대사를 이
책을 읽으면서도 계속해서 반복해서 뇌까렸다.
책은 속도감 있게 진행된다. 태인이 들어간 비밀스러운 클럽, 이니그마가 학교의 비밀 속으로
점점 들어갈수록 예의 긴장감도 감돌았다.
그. 런. 데!
“뭐라고 불러도 좋아.
하지만 곧 우리 식구가 될 거니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게 더 좋겠지. 우린 여우의 후손들이야.”
(p.268)
학교의 비밀이 여우의 후손들이라니?
좀
황당했다. 좀 더 현실적인 소재를 차용했더라면 미스터리로 분류할 수 있었겠지만 느닷없이 여유가 나오고 여우의 정령이 나오고 태인이 처음 전학오던
날부터 숲속에서 지켜보던 괴물의 정체가 마녀 학주의 아들이라니... 갑자기 B급 만화가 되어버렸다.
“인간 세상은 이미 썩어
있어. 우리들이 그나마 정화시키고 변화시키고 있다고. 그 과정에서 약간의 희생은 있었지만 불가피했어. 희생 없는 변화나 발전은 있을 수
없으니까.” (p.273)
썩어 문드러져 희망이 없어진 인간 세상을 완전히 갈아엎기 위해 여우의 후손들은 그들
나름대로 주요한 전략을 만들었다. 학교를 만들어 아이들을 세뇌시키고 더 나아가서 여우의 후손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명문 사립고이니 만큼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직장에 취업하거나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큰 전문가가 되어 사회 곳곳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겉으로 볼 때는 사람과 전혀 다를 바
없지만 그렇게 조금씩 사회를 정복해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네 아버지도 우리와
같은 종족이기 때문이야!” (p.275)
태인의 아버지도 여우의 후손이라 한다. 태인은 믿을 수 없었다. 사건이 모두 끝난 후,
병실에 입원한 태인을 아버지가 찾아온다. 태인은 아버지에게 여우의 후손이냐고 묻는다. 아버지는 황당해하며 아니라고 말하고, 엄마의 투신을
방조하거나 적극적으로 구하지 않았다는 의심을 가지고 있던 태인에게 당시의 정황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이
책은 한낱 낮잠의 꿈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마지막 기회를 얻은 태인이 낯선 환경에서 적응하느라 힘든 과정에서 꾼 거대한 악몽 같기도
하고, 아들에게까지 자신의 정체를 숨긴 태인 아버지의 시치미가 가증스럽기도 하고 뭐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