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편 섬
이경자 지음 / 자음과모음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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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니 이상한 일이 참 많다. 살아온 날보다 아직 살 날이 더 많은 내게 하수상한 요즘은 버겁다. 세월호 참사로 자녀를 잃은 아버지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자기 목숨을 걸고 단식을 하는 데, 그 앞에서는 그 목숨을 건 행위를 조롱하고 놀리는 작태가 벌어진다. 아무리 실명제가 도입되고 문화가 성숙했다 하더라도 인터넷은 점점 천박해져 간다. 키보드 몇 번 두드리는 것으로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무서운 도구로 변해가면서 말이다. 며칠 전 코레일과 관련된 비리로 체포직전에 있었던 국회의원은 동료 국회의원들에 의해 구제되었다. 세월호나 다른 거의 모든 사안에 대해서는 각을 세우는 여당과 야당도 언젠가는 자신의 처지가 될지도 모르는 체포동의안에 대해서는 한 목소리를 내는 세상이다. 정말 이상하고 골치 아프고 답답한 나날이다.

한 번씩 투표를 할 때마다 이런 이상하고 괴이하고 소름끼치게 골 때리는 세상을 경험한다. 도무지 아무런 도움이나 혜택이나 서비스를 제대로 받지 못했음에도 또다시 그 사람과 그 정당에 투표를 하는 사람들. 방송 같지도 않은 방송을 하루 종일 보며 그들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에 어김없이 갇혀 세상을 반쪽으로 보는 사람들.

여권 성향이 강하고 보수적인 지역에 살다보니 가끔씩 ‘섬’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이가 많은 기성세대나 노인들은 물론이고 내 나이 또래나 나보다 더 어린 사람들에게서도 나는 멀다. 그들에게 어떤 특정한 DNA가 전해지는 것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대학 이후로 이 지역에서 잘 모르는 사람과 정치 얘기를 한다는 것은 단번에 빨갱이 내지는 친노종북 세력으로 몰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은 도박이어야 했다. 운 좋게도 내 염려가 현실이 된 적은 없었지만 느닷없이 튀어 나온 일장 연설로 술자리 분위기가 냉랭해진다거나 그전까지 존경하고 신뢰한다던 후배 놈의 눈빛이 달라지는 경우는 있었다.

모르겠다. 세상의 이치 자체가 이런 것이라면 차라리 받아들이기 편할 것 같다. 외떨어진 섬들이 각자 일정한 위치를 점하고,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다름’을 인정하고 공존하는 것. 하지만 그렇게 평화롭게 세상이 돌아가고 이치가 형성되는 것을 바라는 것은 공염불일 때가 많다. 그것이 요점이다.

 

이경자의 소설 「건너편 섬」은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각각의 ‘섬’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8편의 단편소설은 읽기 쉽다. 언젠가 한번은 매체를 통해, 책을 통해,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 듣거나 본 장면들이다. 몇 다리만 건너면 실제로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과 거의 똑같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작품 <언니를 놓치다>는 이산가족을 그렸다. 분단이 된지 60년이 넘은 현재보다 몇 해 전이 소설의 배경이 된다. 그나마 지금과 바로 이전 정권보다는 훨씬 남북관계가 우호적이었던 정권이 배경이다. 북으로 넘어간 세희언니를 만난 남쪽의 동생 명희는 언니와 헤어진 54년 속에 갇혀 살았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었고, 웃어도 웃는 것이 아닌 것.

 

“....위대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장군님의 은혜로 나는 이렇게 잘 살았다. 이 훈장들을 봐라.” (p.77)

“언니를 비웃고, 찰나에 버렸다. 마치 54년을 게워내듯 해일처럼 솟구치던 지독한 환멸의 감정도, 지금은 얼핏 우스울 지경이었다. 모두 거짓말 같았다.” (p.87)

 

명희는 언니를 만나 비로소 54년을 게워낸다. 게워낸 토사물이 슬픔인지, 기쁨인지, 아픔인지, 그리움인지, 분노인지, 억울함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54년이 흘러 머리가 희끗해진 노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54년 전 소녀의 모습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명희는 언니를 통해 자유를 얻는다. 54년 전 작은 소녀의 눈 속에 머물던 언니의 모습도 내버릴 수 있었다. 생물학적 자매를 발견한 다음, 물리적 이별을 통해서야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언니는 상봉이 끝난 후 북으로 가고 자신은 남으로 간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지만 55년, 56년이 흘러도 언니를 놓친 채 자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 자체가 슬픔이다. 혈육이 수십 년이 지나도록 만나지 못한 채 산다는 것. 분단의 상황. 이산의 아픔. 며칠 후 추석을 맞아 경색된 남과 북의 관계를 탓하며 남쪽의 이산가족들은 또다시 판문점으로, 통일전망대로 향할 것이다. 침침한 눈을 비벼 뜨며 북쪽 땅을 바라본 채 하염없는 눈물을 흘릴 것이다.

 

작품 <박제된 슬픔>은 이 책 전체에서 가장 인상 깊었다. <언니를 놓치다>보다 더 기이한 ‘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연좌제로 인해 한 사람과 그 가정이 얼마나 참혹하게 파괴되고 불행해 질 수 있는지를 다룬다. 장편이 아닌 만큼 인물의 심리와 가정사, 개인사가 자세하게 묘사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오히려 단편이라 독자로 하여금 상상케 한다. 책에서 그려진 것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살았던 수많은 연좌제의 피해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석은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현실이 비현실 같고 비현실이 현실 같은 이 혼란을 감당할 수 없었다.” (p.114)

 

석은 갑자기 내려온 외삼촌 용립으로 인해 출셋길이 막힌다. 사랑하는 여인, 순옥과 결혼해 시험을 합격하고 농협에 취직하게 되지만 거기까지 였다. 시대를 잘못 만났다는 지점장의 위로는 위로가 아니라 총알이었다. 별다를 것도 없었다. 북으로 넘어간 가족들의 생사여부와 소식을 듣고 용립 삼촌이 잘 지키라고 한 물건을 땅에 묻은 것뿐이었다. 다만, 북에서 내려왔으니 간첩인데, 신고하지 않고 모른 척 한 것이 죄가 될 뿐이었다. 어린 석에게, 결혼을 앞둔 석에게 이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별다른 소식이 없었기에 당연히 용립 삼촌이 북으로 잘 돌아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내려올 때 그랬듯이 갑자기 체포된 채로 다시 찾아온 용립 삼촌으로 인해 할머니가 목을 매고, 석의 삶은 깡그리 부서진다. 그의 절규 같은 신음대로, ‘현실이 비현실 같고 비현실이 현실 같은 이 혼란을 감당’하기에 개인은 너무 불쌍하다.

이 ‘현실이 비현실 같고 비현실이 현실 같은 이 혼란’은 2014년 현재도 유효하다. 서두에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처럼, 잠시만 생각해보면 머리가 아찔하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어떻게 사람들이 저럴 수가 있지?’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비참하고 서글픈 현실에는 차라리 눈을 감고 싶다. 류현진 경기나 기다렸다가 챙겨 보거나, 매일 펼쳐지는 프로야구에 집중하고, 시답잖은 잡담과 공상들로 머리와 시간을 채우고 싶다. 찾아듣던 팟캐스트 방송이나 챙겨보던 인터넷 기사들도 멀리하고 싶다. 모른 체하면 잠시나마 잊어버릴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비현실로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모른 체한다고 해서 현실이 비현실이 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을 ‘박제’할 수 없다면 마주해야 하는데, 일상이 버겁다. 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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