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풍경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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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나에게 기묘한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기도 한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짜릿해지는 경험을 바라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그런 일이 한 번쯤은 있었다. 평소에는 잊고 살지만 뒤척이는 잠자리에서 문득 생각날 때가 있다. 혼자만의 경험, 지극히 비밀스럽고 은밀한 그 기억이 그렇지 않아도 뒤척이던 몸을 더 안달 나게 만들기도 한다. 그냥 그 기억과 경험 그것 자체로 좋은 것이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고 시중에 떠도는 도덕이나 상식의 기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철저하게 비밀스럽고 은밀한 것이기 때문에 들킬까 염려할 필요도 없다. 이념이나 가치 판단의 여지 또한 필요 없다. 그저 속으로 키득거리거나 살포시 입 꼬리를 올리기만 해도 된다. 톺아가며 따질 필요도 없고 애면글면 몸부림 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좋다. 편하다. 철저하게 나만의 것이다. 대단할 것도 저장해 둘 필요도 없다. 가만히 뒤척이며 입 꼬리를 올리면 그만이다.

그런데! 그 사람도 그럴까? 뭐?

그 사람이라……. 맞다. 그 사람도 그럴까?

 

홍상수 감독의 영화 <오! 수정>은 충무로에 리얼리티를 이식한 홍 감독의 연출력만큼이나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너무 솔직하고 너무 리얼해 충격적이었다. 남녀가 함께 있지만 전혀 다른 생각을 한다는 명제는 너무 흔하고 당연한 듯 보이는 것이지만 잊고 지낼 때가 많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확증편향의 최면에 빠지지 않았더라도 저 여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착각을 하는 남자는 전체 남자들 중 대다수이고 저 남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착각을 하는 여자도 전체 여자들 중 꽤나 많을 것이다. 사람은 그런 것이다. 영화 <오! 수정>에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연인의 몸을 더듬는 것이 어떤 그(그녀)에게는 사랑의 행위가 될 수도 있고 어떤 그(그녀)에게는 폭력일 수 있다는 내밀한 비밀을 대형 스크린을 통해 확인하니 옷을 벗고 있는 것 같이 화끈했다. 그렇게 다른 것일 테다. 그렇다. 사람, 사람과의 관계는 그렇다.

 

 

 

ㄱ - 밝을 소(昭昭)

 

구 소소(昭昭)는 충분히 음울하고 슬픈 곳이다. 개발의 반대편에서 사위어 가는 소소의 풍경은 이 소설 전체의 메타포다.

 

 

“혼자 사니 참 좋아!”

“둘이 사니 그것도 좋네!”

 

ㄱ은 주인공이다. 중심이다. ㄴ과 ㄷ과 있을 때도 주인공이었다. ㄴ의 죽음 이후 경찰서에서 형사에서 조사를 받을 때도 줄곧 주도권은 그녀에게 있었다. 불가항력으로 혼자 남게 되었지만 분해되어 가는 소소(昭昭)에서도 그녀는 밝다. 객관적으로 그녀는 밝을 수 없다. 부모님을 잃고 오빠도 잃었다. “나는 여전히 죽음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죽음이 지우개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지워지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누구에게는 가시처럼 박히는 것이 죽음이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선인장은 그녀 자신이다. 극한의 환경일수록 강한 가시를 드러내는 선인장처럼 그렇게 존재한다. 갑자기 ㄴ과 함께 살게 되고 갑자기 ㄷ과도 함께 살게 된 ㄱ이지만 소소(昭昭)하게 “혼자 사니 참 좋아!, 둘이 사니 그것도 좋네!” 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정상적이지 않다. 분명하다.

 

 

“희로애락이 완전히 거세된.” (p.34)

 

ㄴ과 함께 파묻힌 시멘트 데스마스크를 보고 ㄱ은 희로애락을 떠올린다. 말도 안 되는 레토릭이다. ㄱ에게서 찾을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ㄱ은 친오빠의 죽음과 ㄴ의 죽음을 동일시해야만 한다. 그래야 자신에게 닥치는 죽음의 그림자를 걷어낼 수 있다. 갑자기 찾아온 ㄴ과의 섹스에서 환희를 경험하고 한 번도 그런 적 없는 ㄴ의 과거까지 찾아다니며 마음속 깊이 묻으려 하지만 벗어날 수 없다.

ㄴ이 죽은 뒤에야 그가 밴드의 베이스주자였으며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조지 해리슨을 꿈꾸던 뮤지션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희로애락이라는 감정이 모두 메말라 선인장의 가시처럼 거칠게 존재할 뿐인 자신에게도 소유욕의 발로라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키게 한 ㄴ을 찾아 나서지만, 그것 또한 ㄱ자신을 위한 자위다.

 

 

“나-ㄴ-ㄷ은 서로에게 어떤 요구도 하지 않는다.”

 

결국 ㄱ에게 ㄴ과 ㄷ은 소소한 풍경일 뿐이다. 정말 풍경이었던 것이다. <오! 수정>에서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던 연인의 각자 생각의 차이가 하늘과 땅 정도였던 것처럼 ㄱ과 ㄴ과 ㄷ은 함께 살면서 한 덩어리가 되었지만 ㄴ의 죽음 이전부터 ㄱ에게는 그저 풍경인 것이었다. 그녀를 살게 하는 선인장과 같이 끈질기게 삶을 이어가는 매개일 뿐이다. ㄱ에게 기억되는 ㄴ과 ㄷ은 서로 아무런 요구조차 하지 않고 통성명조차 하지 않으면서도 언제든 한 덩어리가 될 수 있는 모순된 연결이다.

ㄱ에게 있어서 ㄴ과 ㄷ은 작은, 소소(小小)한 풍경이었다. 그래서 밝을(昭昭) 수 있다. 그 밝음(昭)이 모순적이라 해도 말이다.

 

 

 

ㄴ - 근심스러울 소(騷)

 

“셋째 날은 부서진 헛간의 문과 지붕을 고쳤고 넷째 날은 물이 새는 주방 수도꼭지를.. 다섯째 날엔...”

“나는 우물을 파면서 자주 2층의 당신을 올려다보지요.”

 

ㄴ은 존댓말부터 시작한다. ㄱ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그렇다. ㄱ이 조그마한 귀퉁이에라도 걸쳐진 장면을 모조리 기억해내는 ㄴ에게 ㄱ은 존재의 이유다. 어찌할 수 없는 존재적 무력 앞에 시위하듯 한 물구나무서기를 ㄱ은 가볍게 웃어 넘겼다. ㄴ의 근심은-소(騷)- ㄱ의 밝음-소昭-로 잠시 동안 잊을 수 있었다. 그것이 결국 ㄴ을 파멸케 했지만 ㄴ의 죽음 이후의 독백에서는 후회나 원망 따위는 없다. 둘째 날, 셋째 날, 넷째 날, 다섯째 날……. 거듭해서 ㄱ을 기억해낼 뿐이다. ㄱ에게는 그저 풍경 같을 뿐이었으나 ㄴ에게는 존재였다. 준비된 죽음을 마무리하기 위해 우물을 파내려가는 ㄴ에게 ㄱ은 동경의 대상이다. 우물을 파면서도 2층을 기웃거린다. ㄱ에게 ㄴ은 그저 포크레인이었다. 그렇게 줄곧, 끊임없이, 쉴 새 없이 삽질을 할 수 있는지 모르는 수수께끼였을 뿐인데, ㄴ에게 ㄱ은 달랐다. 그때부터였다. 처음 ㄱ과 몸을 섞게 된 그 밤. 2층에서부터 걸어 내려오는 ㄱ의 발소리는 죽음을 예비한 ㄴ을 흔들었다. 가만히 뒤에서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을 안아주는 ㄱ의 몸에서부터 파장이 일었다. 자신을 껴안은 채 눈물을 흘리는 ㄱ으로 인해 ㄴ의 존재 전체가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ㄱ의 기억 속에서는 줄곧 무미건조하고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으려 했던 ㄴ이었는데, ㄴ에게 ㄱ은 달랐다. 소중한 존재였다. 함부로 할 수 없고 쉽게 다가갈 수도 없는 선인장 같은.

 

 

“나의 멸진(滅盡)을 눈물로 배웅해준 당신.”

“사멸로 가는 듯 한 구소소의 분위기가 좋았어요.”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ㄱ은 성가시지 않았다. 혹시라도 죽음의 과정을 완성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었던 방해꾼이었다. 먼지가 사라지는 것으로 자신의 죽음을 비유한 ㄴ의 지고지순함, 그 사멸해 가는 순간마저도 ㄱ을 귀퉁이에 넣으려는 한결같음에 박수를 보내야 하나? 나는 잘 모르겠다. 이런 게 사랑이라면 너무 애달프고 어렵다.

어쨌든 ㄱ과 몸을 섞은 후 단 한번이라도 조지 해리슨 이야기를 꺼냈다면 발그레 흥분하는 ㄱ과 함께 밤새도록 조지 해리슨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처음부터 사멸의 구렁텅이로 향한 ㄴ에게 어쩌면 결과는 정해져 있는 것이었다.

 

 

“그게 전부예요. 당신이 몸을 구부려 세탁기 버튼을 누른 것과 내 몸의 우물 속으로 투하된 것은 동시였을 거예요. 나는 그렇게 믿어요. 당신-나, 혹은 나-그녀, 혹은 당신-나-그녀가 완벽하게 덩어리진 순간이었다고요.”

 

우물로 떨어지면서도 ㄴ은 ㄱ을, ㄷ마저도 끌어들인다. 너무 착한 사람인지, 너무 바보 같은 사람인지 나는 단정할 수 없다. ㄴ의 말처럼 우물 속으로 투하된 것인지, 투하한 것인지도 무의미 하다. 그래서 ㄱ이 경찰로부터 조사를 받고 ㄷ이 ㄴ을 밀었다는 행위 자체로 ㄱ으로부터 받는 의심도 무의미 하다. 처음부터 ㄴ은 죽음을 위해 소소(騷)했다. 그의 근심스러운 ㄱ과의 동거가 해피엔딩이 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뭔 놈의 사랑이 이런 가 모르겠다.

 

 

“단지 소소한 풍경이었다고 나는 생각해요.”

 

ㄴ에게도 단지 소소한 풍경이었을까? ㄴ은 죽음 이후에도 그렇게 기억하고 싶어 한다. 언젠가 한번은 겪었을지 모를 짜릿했던 그 기억을 간직한 채 부유하던 먼지가 완전히 없어지듯이 그렇게 사라졌다.

 

 

 

ㄷ - 하소연할 소(訴)

 

“우리, 도자기 마을에 가서 사기그릇 깰 때, 내가 울었잖아!”

 

ㄷ에게 ㄱ과 ㄷ은 하소연이다. 목숨을 걸고 탈출한 뒤에도 끔찍한 일을 겪었다. 신고하지 않고 돌봐준다는 것으로 엄마가 있는 옆방에서 짐승에게 몸을 내줘야했다. ㄴ이 우물로 투하된 후 떠나온 곳에서도 몸을 내주고 삶을 이어간다. 그 돈을 중국에 있는 짐승에게 보낼 수밖에 없다. 엄마가 그곳에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ㄷ은 하소연하고 싶은 것이다. 문득 찾아간 소소(昭)에 위치한 ㄱ의 집에서 ㄷ은 ㄱ의 밝음과 ㄴ의 근심은 안중에 없었다. 일단 그들에게 하소연(訴)하고 싶었다. 몸을 섞는 ㄱ와 ㄴ을 찾아간 그 방안에서도 바보같이 밝게 웃는 ㄱ의 눈길을 피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황망함, 놀람 따위는 안중에 둘 수도 없었던 기가 막힌 참담한 과거를 건너 온 ㄷ의 존재방식이다. 야동에 등장하는 쓰리썸은 지극히 음란하고 자극적이지만 그들의 쓰리썸은 섹스가 아니라 덩어리다. 감정과 느낌이 배제된 덩어리. 책에서 여러 번 표현되는 덩어리 그 자체다. 그냥 덩어리. 셋이서 삼각형이 아니라 둥근 덩어리가 된 것은 ㄱ,ㄴ,ㄷ 모두에게 이유가 있다. ㄱ에게는 놀이였고 ㄴ에게는 위로였고 ㄷ에게는 절박함이었다. ㄱ에게 있어 그들의 쓰리썸은 하나가 되는 착각이었고 ㄴ에게 그들의 쓰리썸은 ㄱ을 확인하는 순간이었고 ㄷ에게 그들의 쓰리썸은 생존의 확인이었다. 한 방에서, 한 침대위에서 덩어리졌지만 ㄷ에게는 여전히 결핍이다. 질펀한 쓰리썸 이후에도 ㄷ은 혼자서 또다시 자위를 해야 했다. ㄷ에게 쓰리썸이나 덩어리짐은 의미 있는 듯 무의미한 일이었다. 어쩌면 ㄷ도 그녀만의 우물을 파고 있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ㄴ의 죽음 이후 바다에 연한 작은 도시에서 여전히 자신의 몸으로 생존을 확인할 수밖에 없는 간절한 하소연이다.

자신을 찾아 온 ㄱ에게 또 몸을 들이밀었지만 ㄱ은 거부했다. ㄴ이 부재한 현재에는 덩어리짐마저 할 방법이 없다. ㄱ에게는 지나치는 풍경이었고 ㄴ에게는 ㄱ만이 존재하는 도자기 마을에서의 기억도 ㄷ에게는 절실한 존재확인이다. 거푸 물어본다.

 

 

언니~! 그때 말이야~! 도자기 마을에 갔을 때 있지? 알지 언니? 그때 내가 도자기 깼잖아~! 그 도자기 마을에서 언니~! 언니 기억나지? 어? 기억나지? 어?

목구멍까지 올라온 절실함이 하소연이 되어 흩어진다. ㄴ이 먼지처럼 부유하다 떨어진 것처럼 ㄷ또한 여전히 부유한다. ㄴ처럼 떨어질 지, 언제까지 부유할 지 알 수 없지만 가쁘게 매달린다.

ㄱ과 ㄴ과 ㄷ은 함께 소소(昭昭)에서 살았지만 누군가는 웃고(笑昭), 누군가는 근심했으며(騷), 누군가는 하소연을(訴) 하고 싶었다. 그들이 한 덩어리가 되었어도 그렇게 다르게 소소소(昭騷訴)한 풍경으로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첫 번째 계약은 우물이 완성되면 흩어져 각각의 길을 따라 떠난다는 것, 두 번째 계약은 그러므로 우리에겐 과거도 미래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게 사랑이라면 나는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

잠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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