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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역 - 제5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김혜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다음 내리실 곳은 중앙역, 중앙역.
중앙역입니다
“가끔 살아 있다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
“여자가 하는 말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우리는 얇은 이불 아래 몸을
옹송그리고 눕는다.”
늙고 병든 여자와 젊은 남자는 서로의 몸을 탐닉한다.
생각만 해도 처절하고 지저분하게 서로의 몸을 타고 넘는다. 애면글면 서로를 파고들지만 그것은 에로스가 아니다.
늙고 병든 여자와 젊은 남자에게 미래는 없다. 그래서
과거도 없다.
가끔이 아니다. 중앙역 광장에서, 모퉁이를 돌아 한참을
걸어 간 공사장에서, 기차의 헤드라이트가 비루한 두 몸뚱어리를 비추는 땅바닥에서, 후줄근한 굴다리 밑에서 고통스러운 서로를
확인한다.
끊임없이 사정(射精)하지만 사정(事情)은 나아지지
않는다.
“살아 있었다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 라고 과거형으로
말했다면 좀 더 나았을까?
저자인 김혜진은 무서운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다. 김혜진의
손끝에서 시제는 무의미해진다. 늙고 병든 여자와 젊은 남자는 오늘에만 존재하는 고통 하는 몸뚱어리다. 흔하디흔한 문장부호, 따옴표 하나 없이
장편을 펼쳐내는 과감함에 혀를 내둘렀다. 빙빙 돌리지 않고 직격탄을 날리는 작가의 솔직함이 따옴표라는 흔하디흔한 문장부호 따위를 망각하게 한다.
늙고 병든 여자와 젊은 남자의 과거를 들추었다면, 미래를
장밋빛으로 그려냈다면 이 소설은 현실성을 담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하 수십 미터를 파내려 간 지하철을 타고 중앙역에
내려야 한다. 다음 역이 ‘중앙역’이라는 안내 방송이 나오지만 일어서지 못한다. 내가 타고 있는 무덤덤하게 그려지는 비참한 현실은 수십 미터가
아니라 무저갱이다. 무저갱. 밑으로, 땅 끝으로 끝없이 추락한다. 작가는 무서우리만치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이들의 추락을 펼쳐낸다.
그 중앙역은 늙고 병든 여자와 젊은
남자만의 것이 아니다
“밤에는 훔친 물건들을 머리맡에 두고 눕는다. 불빛을 막으려고 모자로 얼굴을 덮는다.
그래도 쉽사리 잡이 오지 않는다. 살대가 부러진 우산, 슬리퍼 따위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살의를 굴린다.”
캐리어 하나를 끌고 광장으로 들어 온 젊은 남자는 늙고
병든 여자에게 캐리어를 뺏긴다. 별스러울 것도 없었을 캐리어를 훔쳐갔다는 이유로 늙고 병든 여자를 취한다. 갖으려 했지만 철저하게 늙고 병든
여자에게 수동적이다. 별스러울 것도 없었을 캐리어 보다 더 추레한 살대가 부러진 우산과 슬리퍼 따위에 자신을 구겨 넣는다. 그리고 점점 늙고
병든 여자의 처진 가슴과 비루한 다리 사이를 파고든다.
“나는 그들과 점점 닮아가고 있다. 그런 예감은 나를 불안하게 한다. 불안의 강도는 점점
커진다. 누구나 그들이 될 수 있다. 나 역시 그들 중 하나가 되고 말 것이다. 그건 짐작보다 훨씬 빠를 수도 있다.”
충분히 자립하고 자활할 수 있을 것 같은 젊은 남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센터의 팀장이 고군분투하며 돕지만 젊은 남자는 역 광장에 남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수도 없이 반문한다.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저 늙고 병든 여자에게 왜 나는 집착하고 있나?
애초에 꿈이 없고 기대가 없는 젊은 남자에게 주어지는
호의는 오롯이 늙고 병든 여자를 향한 집착으로 내닫는다.
어차피 영원할 수 없는 일생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나? 무슨 일을 하고 살아야 하나? 나는 아직 젊지만 더 어렸던 시절 ‘나의 화두는 무슨 일을 하고 살아야 하나?’였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것이었다. 어떤 직장에서 어떤 일을 하며, 남들 다 하는 결혼하고 애 낳아서 그렇게 사는 것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닐 거라 나는 아직 생각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는 방향성이다. 그 끝에 단번에 닿을 수 없고 한 번에 전체를 훑을 수 없지만 그곳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참 힘들다. 고되다. 남들은 다 이렇게 저렇게 살고 최소한 나보다는 더 성공한 사회인이 되어 있는 것 같고, 나만
뒤쳐져 있는 것은 아닌 가 두렵다.
세상은 방향성을 반기지 않는다. 얼른 분투의 현장으로
뛰어 들어와 일원이 되고 장렬히 전사하기를 기대한다. 그런 단계를 밟지 않으면 낙오자로 낙인찍는다.
‘최소한 나는 저기 저렇게 비참하게 나자빠진
노숙자들보다는 낫다.’
라고 자위하는 위안에 이단옆차기를 날린다.
연봉이 얼마나 되고, 가정이 얼마나 화목하고, 나보다
나를 더 위하는 친구가 얼마나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솔직하게 생각해 보자. 나는 사는 것이 좋다. 재밌다. 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다들 힘들단다. 다들 어렵단다. 그런데 모여 앉아서 ‘우리는 저 사람들 보다는 낫잖아.’라고 집단 자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그렇다. 인생은 처절하게 고되고 아픈 것이다.
“괜찮습니다.”
“그래요. 그래도 혹시 문제가 생기면 저희를 찾아와야 합니다.”
“사람들은 매일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돌아가며 술을 산다.
대개는 국가나 시로부터 지원금이나 보조금을 받는 사람들이다. 자립을 약속하고 받은 그 돈을 그들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데 다 써버린다.”
아무도 늙고 병든 여자와 젊은 남자, 나와 당신을
지켜주지 않는다. ‘가만히 있으라.’ 도 ‘가만히 있지 마라.’도 선동이다. 지켜주지 않는다. ‘가만히 있지 않으면’ 뭐! 어떻게 할
건데!
광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컨테이너 센터는 마지막 보루라
착시되어 있다. 센터를 유지하려면 일정 수준의 노숙인이 확보되어야 한다. 그래야 예산을 지원받을 수 있다. 광장의 사람들이 그 푼돈을 가지고
다시 술에 절어들 것을 뻔히 알지만 그들도 그들의 시스템을 지켜야 한다. 다들 그렇게 이기적으로 사는 것이다. 욕할 수 없다. 그렇게 사는 것이
삶이다.
중앙역은
아비규환이다
“이런 식이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나는 빼앗으려는 사람들보다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의 무능함에 분노를 느낀다.”
젊은 남자는 무모하게 미래를 꿈꾼다. 아무도, 아무것도
그들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무모하게. 그렇게 젊은 남자는 아비규환의 한 가운데로 뛰어든다. 타 죽을 것을 모른 채 타는
불빛으로 뛰어 들어가는 불나방처럼.
그리고 그 아비규환에서조차 타들어 가는 몸뚱어리를 그대로
놓아 둔 바보들을 마주한다.
작가가 얼마만큼의 리얼리티를 담보하고자 했는지 가늠할 수
없지만 나는 젊은 남자가 마지막으로 늙고 병든 여자를 응급실에 버려두고 오는 결말이 차라리 나았을 것 같다.
“끝없이 이어지는 밤 속에서 아침을 기다린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시린 눈을 깜빡인다.
누군가 뒤쪽에서 얼어붙은 담벼락을 탕탕 때린다. 줄지어 선 사람들이 한꺼번에 벽을 치면서 고함을 지른다. 나는 젖혔던 캡을 닫고 새벽이 오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것은 너무 잔인하다. 무모하지만 미래를 꿈꾸려 했던
젊은 남자의 날갯짓은 모조리 타 없어져 버렸다. 응급실을 뛰쳐나오며 “모르는 사람입니다. 정말 모른다고요!” 라고 외쳤던 것은 마지막 남은
인간성의 발로다.
하지만 진짜 마지막 장면에서 젊은 남자에게 먼지만큼 남아
있던 그것조차 모조리 타 버렸다. 마지막 남은 철거민들을 박멸하기 위해
“젖혔던 캡을 닫는다”
젖힌 캡 위로 어스름하게 다가오는 새벽은 절망이다.
일말의 희망도 없는 아득한 절망.
"다음 내리실 역은 중앙역, 중앙역. 중앙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없습니다.
가만히 계시든지, 계속 타고 가시든지 마음대로들
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