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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
조 사코 지음, 최재봉 외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이 연일 계속되고 있다.
나는 이 소식을 트위터를 통해 알게 되었다. 한국에는 TV뉴스가 쏟아진다. 그런데 이 일에 대한 뉴스는 단 한 꼭지도 보지 못했다. 단 하나도.
공중파도 있고 보도채널도 있고 종편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뉴스는 아예 자취를 감춘 듯이 없다. 트위터를 통해 알게 된 팔레스타인의 소식은
충격적이고 참혹했다. 백린탄이라는 인간이 만든 군사무기 중 가장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폭탄이 팔레스타인 상공에 쏟아지는 사진을 보게 되었다.
백린탄으로 인해 온몸이 타버린 어린아이를 안고 절규하는 사람의 사진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사진들이 보도되지 않고 있었다. 적어도 한국의
언론보다는 더 언론답다고 생각되고 기대되는 유럽 유수의 언론사들도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고 한다. 궁금했다.
이스라엘이야 미국의 가장 강력한 우방이고 미국의 대 유럽, 중동 정책의 교두보 역할을 하는 곳이기 때문에 시온주의로 포장된 그들의 제국주의적
야욕이 감춰졌었다. 또한 홀로코스트에 대한 유럽인들의 죄책감과 부채의식도 여기에 한몫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미사일이 민간인 거주 지역을
그대로 폭격하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아무도 이야기를 하지 않는 다는 것이 정말 이해되지 않는다. 트위터 상에서 거울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독일군과 이스라엘군이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사진을 발견했다. 일반인이 그린 그림인데, 독일군과 이스라엘군이 총을 겨누고 있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은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이다. 결국 이런 방식으로는 똑같다는 것이다. 이미 이스라엘로 인해 팔레스타인은 그들의 예전 거주지 대부분을
잃었고 가자 지구를 비롯한 구석까지 몰려난 상황이다. 이스라엘이 내세우는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팔레스타인의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군사공격은
비난받고 추후에 반드시 처벌받아야 할 범죄다. 나치와 히틀러에 의해 수백만 명의 조상들이 죽었다는 이유로 팔레스타인에 대한 공격이 정당화 될 수
없다. 그런데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렇게 어이없는 일이 오늘도 벌어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누구도 나서서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론
자유 지수가 세계50위권인 한국의 상황이야 이해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프랑스와 영국, 독일의 언론들조차 이 상황을 자세히 보도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말 이상하다.
이 책 「저널리즘」의 저자 조 사코는 지금 팔레스타인의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동참 저널리즘(embeded journalism)에 대한 비판은 항상 있어왔다. 나도
이 점을 잘 안다. 「안심하면 죽는다」에서 저널리스트는 해병대원들가 함께 지내며 군인의 시점으로 현장을 경험한다.”
(p.126)
이 책의 제목 자체가 의미심장하다. 저널리즘. 말 그대로
언론이다. 책 제목이 언론이다. 조 사코는 사람들, 특히 언론인들이 별로 가지 않는 지역,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주제에 뛰어든 언론인이다.
이라크에 파병된 미군들에 대한 보도는 간단하다. 유수의 통신사들이 보내준 영상과 적절한 현지 특파원의 코멘트 정도면 본토에 전달되는 보도는
충분히 현실성을 담보할 수 있다. 그런데 조 사코는 이라크에 파병된 해병대원들과 함께 험비에 올라탄다. 그들의 막사에서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동참 저널리즘>을 추구하는 기자가 얼마나 될까? 목숨 걸고 하는 취재를 하는 기자가 몇이나 될까? 이 책에
등장하는 인도, 몰타, 체첸의 이야기들은 내가 이전에 다른 어떤 책이나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내용이었다. 전적으로 저자의 관심과 열정,
용기로 인해 가능한 일이었다.

“많은 수의 이방인들을, 그것도 피부색이 다른 이들을 갑자기 받아들여야 한다는 도전을
감당할 만한 민족은 안타깝게도 많지 않다. 내 나라 사람들이라고 다른 민족보다 더 선한 것은 아니다.” (p.179) 「초대받지 않은
사람들」
이름조차 생소한 지중해의 <몰타>라는 섬나라의
상황은 꽤 흥미로웠다. 백여만 명의 인구에 불과한 이 작은 섬은 지중해의 풍요로운 나라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북아프리카에서 보트나 선박을
타고 아프리카인들이 작은 섬으로 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북아프리카에서 바로 이베리아 반도나 이탈리아 반도로 직행할 수 없으니 몰타가 그들의
중간 기착점이 된 것이다.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그들에게 난민 지위를 부여하고 그들이 원하는 나라로 갈 수 있게끔 도와주어야 하지만 이것은 쉽지
않은 문제다. 일단 아프리카에서 몰타로 몰려드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그들이 난민 지위를 받거나 몰타에서 정착한다면 그들에게 일정 정도 경제적
지원은 필수적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몰타 국민들의 몫인 것이다. 여기에서 또 다른 역차별이 생기게 된다. 만약 일정 수의 난민들만 몰타로 오게
된다면 적절하게 정책을 마련하고 대책을 세울 수 있을 텐데 그것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드니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게 된 것이다.
난민 지위가 부여되기 전 수용소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는 아프리카 인들은 그 곳에서조차 민족과 나라간 갈등이 생기고 자신들을 향해 적개심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몰타인들과도 갈등이 생기게 된다. 몰타 국민들은 그들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무분별하게 수용하게 되면서 이전까지 몰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일자리를 아프리카인들이 뺐어간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워낙 작은 나라이다 보니 이 상태로라면 그들의 자식들 세대에는
아프리카인들이 더 많이 살게 되는 몰타가 되지 않을까 라는 생존 자체의 걱정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주목한 것은 조 사코의 취재방식이다. 그림에서도
보이듯이 그는 밀착 취재한다. 한 사람의 일방적인 주장을 듣는 것이 아니다. 여러 이해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그것을 그대로 그림으로
그려 낸다. 어린 시절 흔히 보던 만화와는 다르다. 일단 대사가 너무 많다. 글이 너무 많아 사진처럼 촘촘하게 그려낸 그의 그림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다. 내용이 참 많다라고 생각하다가도 이런 취재를 하기 위해서 얼마나 그가 노력했을지 생각하게 되었다. 하루, 이틀 해서 될
취재가 아니다.
사실 몰타에 밀려오는 북아프리카인 들에 대한 문제는 내가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아마 평생토록 몰랐을 내용일 수도 있다. 한국의 어느 언론에서 몰타까지 가서 취재하는 기자가
있겠나?
“나는 지중해의 작은 섬인 몰타에서 태어났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자라 열두 살 무렵에
미국으로 이주했다. 유럽에서도 여러 번 살았다. 그래서 특정 지역에 갇히지 않는 관점을 갖는 게 내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는 내가 더
큰 세계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며, 내 감수성은 특정 민족 국가의 경계에 머물지 않는다.” (p.218)
국제분쟁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를 묻는 인터뷰에서 조
사코가 한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조 사코에게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당신은 왜 그런 인도의 불가촉인들에게까지 관심을 기울이는가? 체첸인 들은 테러리스트들이 아닌가? 왜 그들을 두둔하는가? 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몰타의 북아프리카인 들에 대한 문제를 긁어 부스럼 하느냐?
조 사코에게 국적은 무의미하다. 한 사람의 세계인인
것이다. 나도 개인적으로 가장 경계하는 것이 맹목적인 국수주의·민족주의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섬나라인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내가
조 사코만큼의 안목과 세계인적 정체성을 갖기는 힘들다. 해외여행 몇 번 했다고 해서 저절로 장착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에게 체첸인 들의
문제, 인도의 불가촉천민들의 문제, 몰타에 몰려드는 북아프리카인 들에 대한 문제는 이웃의 문제다. 바로 나와 같이 시대를 사는 동시대,
동세계인의 문제인 것이다. TV앞에서 안타까워하면서 아이구 어쩌나 팔레스타인 사람들 참 불쌍하다. 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서
인터뷰하고 취재하고 자세하게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사실 나와 같은 일반인들은 TV앞에서 안타까워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수 있다. 하지만
언론인들에게는 다른 문제다.

“한국 기자들의 ‘현장’은 브리핑룸 또는 기자실로 종종 국한된다. 간혹 격동의 현장에
찾아간다 해도 깊이 충분히 보고 듣고 겪는 일을 낯설어 한다. 그것은 기자의 이력에서 예외적이고 드문 순간으로 기억된다. 대신 경찰, 검찰,
국회, 청와대 등의 출입처 경력을 바탕으로 차장, 부장, 국장 등으로 이어지는 관료적 출세를 꿈꾼다.”
(p.227)
청와대 출입기자들을 대상으로 오프더레코드를 전제한 채
대변인이 한 말을 보도한 매체의 기자가 청와대 출입을 저지당한 일이 있었다. 어처구니없었던 것은 대변인 측에서 그 문제를 먼저 제기한 것이
아니라 다른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그것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최소한의 동업자적 정신도 기자 정신도 없는 유치하고 소아병적인 발상이다.
너는 우리 편이 아니라 나쁜 편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아니고는 가능할 수 없는 발상이다. 앞서도 여러 번 지적했지만 한국의 기자 중 조
사코처럼 전 세계를 누비며 용기 있게 취재를 하는 기자나 언론인이 있을까? 북미나 유럽에 특파원으로 전 세계를 누비는 사람들이 아니라 인도의
불가촉천민을 만나러 가고 몰타에 있는 북아프리카인 들을 만나러 갈 사람들이 있을까?
한겨레 안수찬 기자의 말은 이 책을 읽는 독자들보다 일선
기자들에게 하는 것이다. 언론인으로서의 사명을 잊은 채 관료적 출세를 꿈꾸는 언론인들이 참 많다. 그저 윗선에서 시키는 대로 딱 그만큼만 취재를
하고 보도를 하는 것에 익숙해진 공무원과 같은 직업인들이다. 그들에게서 조 사코의 모습을 일말이라도 찾아볼 수 없다. 너무나도 비극적이고
참담했던 세월호 참사를 통해 우리는 한국 언론의 민낯을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언론이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엉망진창인 그들은 차라리 없는
편이 더 나을 지경이다. 차라리 없는 채로 아무 말 하지 않으면 최소한 혼란이라도 주지 않을 텐데, 난립하다 보니 사실관계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자질도 되지 않는 사람들을 앉혀 놓고 평론이라는 것을 하니 이것은 언론이 아닌 것이다. 저널리즘이 아니다.
청와대에 출입하고 국회에 출입하는 것이 벼슬이 아닌데,
그들에게는 벼슬자리가 되어 버렸다. 그런 자들에게서 저널리즘을 기대하는 것인 수탉에게 끊임없이 달걀을 낳으라고 하는 것과 다름없다.
“저널리즘의 최고의 목표는 돈, 정부, 힘 센 자들의 이해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정치인이 하는 말을 충실하게 받아 적고 보도하는 것은 저널리즘이 아니다. 그 정치인의 말을 현실과
비교하는 것이 저널리즘이다.” (p.219)
조 사코가 인터뷰에서 저널리즘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피력한 부분이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저널리즘이다. 우리는 세상을 제대로,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것일까? 매일 TV를
통해 전해지는 뉴스와 보도와 취재가 정말 사실일까? 나는 이 물음이 저널리즘으로 향하는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보도를 전해 듣고 보는 시민들은
이것을 의심해야 한다. 저들이 말하는 보도하는 저 보도와 취재가 정말 사실일까?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참 피곤하다. 적어도 공중파
공영방송에서만큼은 사실을 보도하고 그것을 시청자들에게 그대로 보여주어야 하는데, 한국에서 공영방송이 제 역할을 못한지는 벌써 수년이 지났다.
진실을 알고 싶은 사람들은 찾아봐야 한다. 인터넷을 찾아보고 책을 찾아보고 SNS를 크로스 체크해야만 어렵게 진실에 근접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들이 만들어 내는 세상밖에 볼 수 없다. 그게 편하다. 보도하는 대로 믿고 살면 되니까. 하지만 진실과는 점점 멀어진다.
조 사코와 같은 용기 있고 성실한 언론인들이 많아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진실과 더 크게 괴리되지 않는다. 조 사코와 같은 언론인들은 마지막까지 이 세상이 썩어 문드러지지 않을 만큼 허락된
방부제다.
만약 지금 조 사코가 이스라엘군에 의한 공격이 계속되고
있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취재 중이라면 그의 안전을 위해 신께 기도한다. 지금 팔레스타인에 있지 않더라도 그는 또 다른 팔레스타인을 찾아 나서고
있는 중일 것이다. 그의 건강과 안전을 지켜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