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환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남자들이 가장 재미있어 하는 이야기는 군대이야기다. 전역 직후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같은 이야기를 아무리 반복해도 지루하지 않다. 했던 이야기 또 하고, 또 해도 도대체 소재가 떨어지지 않는다. 남자들의 군대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책이나 영화에서조차 한 번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일들이 엄청나게 많이 일어나는 곳이 군대다. 그리고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군부대는 왜 그렇게 힘든 곳만 있는지, “나는 군생활 참 편하게 했어.”라고 하는 남자는 적어도 나는 단 한명도 만나보지 못했다. 함께 군대이야기를 나누는 상대가 자신의 군생활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야기를 하면 본인은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도 내가 더 힘들었거든~!’ 군대이야기만을 놓고 보면 대한민국에서 갈만한 군부대는 없다. 모조리 힘드니까.

사단장 차량을 운전하는 운전병이든, 군생활 내내 밥하고 반찬 만드는 조리병이든, 철책 경계 근무를 서는 경계병이든 결국 자기 군생활이 가장 힘든 것이다. 사람은 특별히 자신의 주관적 경험을 극도로 신뢰하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나의 군생활 중 겪었던 수많은 사람과 사건과 환경은 고스란히 아로 새겨진다. 공을 들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박히는 것이다.

군대뿐만 아니라 모든 일이 그렇다. 누구나 나름의 짐이 있다. 그 짐의 크기와 무게가 천양지차가 난다 하더라도 짐을 지고 있다는 것 자체로 삶은 어려운 것이다. 정도의 차이를 무색케 할 만큼 삶에 지워진 짐은 무겁고 힘들며 거추장스럽다.

내 아버지는 7년째 암투병 중이시다. 3번의 수술과 4번의 항암치료, 2번의 방사선 치료를 받으셨다. 최근에 원래 암이 발견되었던 부위에서 뼈쪽으로 암세포가 전이되어 다시 수술을 받으시고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양성자치료를 받으셨다. ‘긴병에 효자 없다.’라는 옛말을 나는 완벽하게 이해한다. 돈도 돈이지만 집안 식구 중 환자가 있으면 다른 가족들의 삶도 너무 힘들어 진다. 암 진단을 받기 직전 아버지와의 관계가 최악이었다. 아버지와의 갈등 직후 암 진단을 받으셔서 나는 죄책감이 많았다. 나로 인한 스트레스가 가장 큰 요인이 되지는 않았을까? 하는 죄책감이었다. 재발이 되고 간병하시는 어머니의 건강도 나빠지셨을 때는 자식으로서 할 수 없는 생각도 많이 했다. 아주 나쁜 아들인 셈이다.


이 책 「몽환화」를 읽으며 뜬금없이 투병 중이신 내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다. 아버지는 내게 어떤 존재인가? 아버지는 내 인생에 짐인가? 내가 아버지의 인생에 짐인가? 하는 생각들로 머리가 아팠다.

“훔치지 않았습니다. 나팔꽃을... 맡은 겁니다.” (p.329)

몽환화... 노란 나팔꽃을 피운 아키야마 슈지의 전 직장 동료 히노 가즈오의 고백이다. 아키야마 슈지의 유력한 살인 용의자로 조사를 받던 가즈오는 나팔꽃을 맡았다고 자백한다. 몽환화를 보고도 차마 외면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떠안은 것이었다.

이런 일이 너무 많다. 내 인생에서도, 주위 사람들의 인생 속에서도 이런 일들은 많다. 모든 사람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을 찾아 할 수 없고 하기 싫은 일은 찾아내서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떠안아야 하는 경우도 분명히 있다. 물론, 반대로 외면하고 짐을 지지 않으려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 이것은 도덕적인 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는 문제다. 어쩌면 지극히 사회적이면서 개인적인 문제일 수 있다.


“전에도 얘기했듯 우리는 네가 행복하길 바란다. 아버지도 요스케 형도 그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 네게 했던 모든 행동은 그런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그것이 너를 힘들게 했다면 역시 우리 방식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르겠구나.” (p.341)

소타에게 가족은 먼 존재였다. 어려서부터 이복형제인 요스케와는 친하지 않았다. 단순히 나이차가 많이 나는 이유는 아니었다. 실제로 자신을 낳은 엄마조차도 소타 자신보다는 형인 요스케를 더 챙기거나 형의 눈치를 더 많이 보는 것 같았다. 유독 나팔꽃을 많이 보러 다니는 것도 이상했다. 소타에게는 너무나 지루하고 재미없는 구경거리인데, 불만 없이 엄마 아빠를 따라 나서는 형도 이상했다.

몽환화에 얽힌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소타의 가문은 짐을 졌다.

어린 소타에게는 차마 이야기 하지 못하고, 막내 소타에게만은 짐의 무게를 나누고 싶지 않았던 것이 있었다.


“노란나팔꽃은 막부의 관리 아래에서 계속해서 은밀히 재배되었거든. 그 강력한 환각 작용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자는 제안이 있었기 때문이야.” (p.391)

에도막부 시절 노란 나팔꽃의 비밀스러운 효과를 이용하는 일부 그룹이 있었다. 몽환화는 노란 나팔꽃을 지칭하는 그들만의 은어였다. 환각작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던 막부는 그로 인한 부작용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이후 메이지 새 정부에서도 은밀히 새로운 방안이 제안되었다. 내무성 윗선에서 경찰 수사에서 자백제로 몽환화를 사용해보자는 제안이었다. 그 제안에 깊숙이 관여했던 사람이 소타 가문의 선조였다. 하지만 막부 시대와 마찬가지로 정신착란과 자살을 불러일으키는 몽환화의 부작용으로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특정한 목적으로 사용되던 노란 나팔꽃을 전량 폐기하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후 ‘MM사건’이 일어나고 여러 사회적 부작용과 폐해가 있었기 때문에 몽환화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소타가문과 이후에 소타가 조우하게 되는 첫사랑의 그녀, 다카미의 가문은 비슷한 이유로 몽환화에 대한 비밀을 지키는 짐을 지게 된다. 극비리에 추진되던 몽환화의 활용에 두 가문의 선조들이 손을 담갔기 때문에 후예들도 그 짐을 질 수밖에 없다.


“무슨 일에나 완전함이란 없지. 엄중이 관리되었던 노란 나팔꽃의 씨앗이 다양한 이유로 외부에 유출되었어. 대량의 씨앗이 사라진 거야. 하지만 노란 나팔꽃이 완전히 자취를 감춤으로써 씨앗도 소실되었을 거라 생각했어. 그런데...”

“MM사건이 일어난 거로군.” (p.392)

하지만 “무슨 일에나 완전함이란 있을 수 없다.” 잘못 유출되면 엄청나게 큰 사회적 파장을 가져올 수 있는 노란 나팔꽃이 다양한 이유로 유출된 것이다. MM살인 사건의 범인도 노란 나팔꽃 씨앗을 복용한 후 정신 착란을 일으킨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다. 나는 여기서 “다양한 이유”에 주목한다. 가릴 수 없다. 모든 것은 철저하게 감출 수 없다. 모든 짐을 다 질 수도 없고 다 피할 수도 없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이것은 염세주의도 패배주의도 이기주의도 아니다. 나에게 지워진 짐을 취사선택 할 수 없다. 최대한 피하고 마주하고 싶지 않지만 피할 수 없는 것도 분명히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천륜의 관계에서도 나는 내 아버지를 짐으로 여길 때가 있었다. 천하에 패륜아라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이 혹시 있을까? 나는 내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더 고통하지 않으시고 돌아가셨으면 좋겠다. 라고도 생각했었다. 좋다. 패륜아라고 해도 좋다.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이 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투병 중이신 아버지를 짐으로 여기는 생각자체가 패륜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만큼 내게 주어진 짐은 고달프고 무거웠다.



“설마, 환각제 대신 사용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것 때문에 내게 씨앗을 더 만들어달라고 한 거 아니냐?” (p.380)

“어디에 전화하십니까?”

“당연히 경찰이지. 꽃의 씨앗을 먹는 게 뭐가 나쁘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사람이 생명을 잃어다. 그냥 놔둘 순 없지.” (p.381)

밴드 활동을 하면서 우연히 노란 나팔꽃의 씨앗을 복용하고 환각을 경험한 나오토와 오스키는 나오토의 할아버지이자 식물연구 전문가인 아키야마 슈지에게 씨앗을 부탁한다. 몽환화의 존재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던 슈지는 자신의 손으로 노란 나팔꽃을 피워 낸다. 그것이 파국의 원인이 될 줄 그 자신조차 몰랐다.

자신의 나오토의 자살을 일으킨 것이 몽환화의 씨앗이라는 것을 알게 된 슈지는 더 많은 몽환화의 씨앗을 찾으러 온 손자의 친구 오스키의 속내를 간파한다. 속내를 들켜버린 오스키는 슈지를 죽인다.

아키야마 슈지의 죽음과 관련된 몽환화의 탄생 비화와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이 치밀하고 재미있게 전개되지만 나는 여전히 ‘내 아버지와 나, 인생에게 지워진 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는 소타의 이야기에 주목했다.


“세상에는 빚이라는 유산도 있어. 그냥 내버려둬서 사라진다면 그대로 두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는 받아들여야 해. 그게 나라도 괜찮지 않겠어?” (p.420)

동일본대지진 이후 완전히 찬밥 신세가 된 원자력공학을 전공하는 소타가 평생 원자력을 연구할 거라는 다짐을 하게 된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친구가 걱정스런 말을 건네자 하게 되는 말이다.

“빚이라는 유산”, “운명이라는 짐” 같은 말이라고 생각된다.

소타는 기꺼이 자신의 가문이 가진 짐 혹은 유산을 떠안는다. 평생 원자력을 연구해서 밥벌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미지수지만 그것에 자신의 삶을 내던진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로 결론날 수 없는 문제다. 오랜 시간 고달프고 힘든 시간을 보내기로 작정한 것이다.

사실, 나는 아직도 내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있다. 뉘우치고 회개하고(나는 개신교인이다) 돌이켜도 문득 나를 사로잡는 원망과 부담은 쉽게 이겨낼 수 없다. 하지만 내게 이것은 “운명이라는 짐”이다.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다. 내 삶에 주어진 짐이자 유산이다. 아버지의 치료가 잘 돼서 완치를 하시더라도, 최악의 결과가 나온다 하더라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후의 삶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다. 내가 어떤 자세로, 어떤 마음으로 이것을 받아들이냐의 문제다.


“몽환(夢幻)의 꽃이라는 의미일세. 그 뒤를 쫓으면 자기가 멸하고 만다고, 그렇게 얘기했어.” (p.220)

몽환화... 다급하고 짧은 시간 안에 즐거움과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아키야마 슈지의 손자 나오토와 오스키는 환각 상태에서 놀랄 만큼 엄청난 음악적 능력이 표출되는 것을 경험한 후 몽환화에 빠져 들었다. 오랜 시간 머리를 싸매고 공부하고 연구하고 노력하지 않아도 씨앗 몇 알이면 해결되었다. 하지만 인생은 그렇지 않다. 삶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 “한 방에 만사 오케이” 되는 일은 거의 없다. 있어도 그것이 결국에는 독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네 인생과 삶에 주어진 유산과 짐이라면 단번에 들어 올려 옮기고 종착지에 가져다 놓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끊임없이 나와 당신의 발목을 붙들고 늘어질 것이다. 소타의 가문과 다카미의 가문은 대를 이어 이 짐을 지고 있다. 소타의 부모와 형은 소타에게만은 이 짐을 지우려 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소타는 이 짐을 자진해서 지게 된 것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이 짐은 지워졌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어떻게 대하고 지금 어떻게 지고 있느냐가 관건이다.

짧은 시간에, 단 번에 해결하려고 조바심 내지 않아야 한다. 긴 호흡으로 멀리까지 내다보는 삶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나는 내 짐을 기꺼이 지려 한다. 줄곧 고달프고 아프겠지만 단 번에 해결하고자 몽환화를 찾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내 삶이다. 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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