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유감 - 현직 부장판사가 말하는 법과 사람 그리고 정의
문유석 지음 / 21세기북스 / 201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린 시절 부모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경찰서, 법원, 병원은 가지 말아야 한다.”

경찰서는 몇 번 갔다. 병원은 경찰서보다는 훨씬 많이 갔다. 유일하게 법원은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사실 경찰서와 법원은 뭔가 잘못한 것이 있어서 가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피해자라 할지라도 경찰서나 법원에 가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경찰서보다 더 문턱이 높고 꺼려지는 곳은 법원이다. 법원이라는 곳을 잘 모를뿐더러 만약 소송의 당사자나 범죄 피해자 혹은 가해자가 되어 가게 되는 것 자체가 머리 아프고 시간과 돈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정말 어른들의 말씀은 새겨들어야 한다.

앞으로도 저 3곳은 굳이 가지 않아도 될 곳이다. 점점 나이가 들어가니 3곳 중 병원에 갈 가능성이 가장 크겠지만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일. 혹시라도 경찰서나, 특히 법원에 가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이 책 「판사유감」은 현직 판사가 썼다. 이제껏 수많은 책을 읽어 오면서 현직 판사가 쓴 책을 읽는 것은 처음이었다. 전직 판사, 전직 법률가가 쓴 책은 많았는데, 현직 판사는 처음이었다. 이 책을 읽으니 왜 현직 판사가 책을 쓰기 어려운지 이해할 수 있었다. 너무 바쁘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판사는 판결을 내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원고와 피고, 검사와 변호사가 제출하는 증거와 자료를 검토한 후 판결만 내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는 것이었다. 시커먼 법복 입고 높은 법대 위에서 근엄하게 판결만 내리는 것이 판사로 생각되었는데, 하나의 사건에 대한 증거자료가 수천페이지에 달한다는 저자의 언급을 보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런 자료들을 야근을 하며 꼼꼼하게 검토하고 최종 판결을 내리기까지 엄청난 수고와 고민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오만으로 누군가의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 죄는 무간지옥에서 영원히 속죄할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늘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임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p.90)

그래서 저자의 이런 고백에 더 진정성이 느껴진다. 주위에 알고 있는 판사나 검사 변호사가 없으니 법을 다루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생활과 애환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상대하기 싫은 사람, 굳이 만나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들 정도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사람과 사건을 대하는 저자의 자세와 마음에 진정성이 느껴졌다. 하나의 사건을 대할 때마다 두려워하는 그의 판사로서의 자세에도 진정성이 담겨 있다. 판사라는 직업은 명예와 보수, 존경을 한 데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되기도 어려울뿐더러 일반 사람들이 사회의 마지막 보루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사법부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현직 판사로서 저자가 가진 마음의 부담과 판사로서의 소회에 담긴 진정성이 느껴지는데, 흔히 언론에서 다루어지는 판사는 이상한 판사들일 경우가 더 많다.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피고인을 향해 막말을 퍼붓는 상스러운 판사도 있다. 물론, 법정에서는 판사가 가장 큰 권위를 가져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기본적인 예의와 상식을 벗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론에 노출되는 그런 판사들에 대해 비판을 한다. 심할 경우 신상까지 털어내기도 한다. 그리고 소수일거라 믿고 싶지만 정치검사와 같은 정치판사들도 있어서 민심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정치적 판결을 내리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점점 사법부 전체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정치적인 사건에 대해 판결이 나기도 전에 미리 판결을 예측하고 그것이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봐 왔다. 그래서 재미있는 패러디를 많이 만들어 내기도 했다. “술을 먹고 운전을 했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 바람은 폈지만 불륜을 아니다.” 등등. 우리나라의 법률체계라는 것이 독일과 일본의 것을 그대로 가져와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낡은 성문법 체계를 가졌다. 헌법이 만들어 진 후 수십 년이 지났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고 발전되어야 할 법체계가 그대로 굳어진 채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아직도 사문화된 일부 법률들(명예훼손이나 집시법, 통신법 등)로 사회적 갈등이 일어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법체계가 가진 구조적인 문제와 일부 정치판사들로 인해서 사법부에 대한 민심은 좋지 않다. 이 책의 저자와 같은 판사, 그리고 책에서도 소개되는 김귀옥판사와 천종호판사와 같은 사람들도 사법부에 존재한다. 이런 판사들이 일반인들에게 제대로 알려질 기회가 없어서 그렇다고 믿고 싶다.

 

 

“도대체 국민들이 고마워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국민들이 힘들게 벌어서 내는 세금으로 월급 받고 편안하게 사는 저 같은 자들은, 원래 직업이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라고 월급 받고 사는 겁니다.” (p.244)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판사라는 직업이다. 나는 몰랐다. 당연히 그런데도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다. 판사는 공공 서비스의 제공자라고 말하는 판사도 없었고 이런 내용을 담은 책도 보지 못했다. “판사” 하면 높은 사람, 무서운 사람, 대단한 사람 정도로 생각하지, 내가 낸 세금으로 먹고 사는 공무원이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동사무소 직원에게는 버럭 하지만 법정에서 판사에게 버럭 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저자의 이런 싸가지가 대단하다. 나보다 나이도 많고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적 위치도 높은 사람이지만 저자는 정말 “싸가지가 있는 사람”이다. 이 말이 내 마음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이런 “싸가지 있는 사람”들이 너무 드물다. 앞서 말한 가지 말아야 할 3곳 중 하나인 병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싸가지 있는 사람”들이 너무 드물다. 환자는 내 돈 내고 치료받으러 갔는데, “싸가지 없는 의사들”을 만나는 경우가 아주 많다. 서울을 제외한 지역의 병원에서는 이런 의사들이 더 많다. 목을 꼿꼿하게 세우고 환자 눈도 쳐다보지 않은 채 3분도 되지 않는 진료 시간을 명령조가 끝내 버린다. 아버지가 병환 중에 계셔서 최근 수년간 정말 분노하며 경험한 일이다. 의사들은 환자가 내는 돈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인데,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그따위인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소수일거라고 믿고 싶은 판사들 중에서도 “싸가지 없는 판사들”이 많을 것이다. 개인적인 경험이 없어서 언급할 수는 없지만 저자와 책에 소개된 몇몇 판사들과 같은 “싸가지 있는 판사들”은 드물 것이다.

 

 

“피고인, 재판을 시작하기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난번 재판에서 제가 했던 말은 해서는 안 될 잘못된 말이었습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p.27)

법정에서 판사는 1인자다. 최종 판결의 권한을 가진 이가 판사이기 때문이다. 그런 판사가 피고인에게 사과를 한다는 것이 낯설었다. 의사가 환자에게 사과를 하는 경우를 나는 보지 못했다. 판사가 피고인에게 사과를 하는 경우도 나는 보지 못했다. 들어본 적도 없다. 이 책에서 저자가 밝힌 개인 경험이 처음이다. 정말 “싸가지 있는 사람”이다. 법정에서 선 피고인도 무죄추정원칙 하에서는 무고한 사람이다. 최종판결이 나게 되어 피고인으로 확정이 되기 전까지는 무고한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저자와 같은 용기와 양심, “싸가지”를 가진 판사는 정말 드물 것 같다.

 

 

“그래도 최대한하고 싶은 말씀을 마음껏 하도록 했습니다. 진실은 어느 한쪽에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p.62)

사람과 사건을 대하는 저자의 자세가 가장 잘 표현된 부분이다. 시어머니의 밥에 소량의 쥐약을 섞은 베트남 이주 여성에 대한 재판을 소개하며 언급한 부분이다.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대로 베트남 출신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고부 관계와 언어의 문제로 소통하지 못한 채 쌓여 온 불신과 오해와 갈등이 재판을 통해 해소되지는 않았지만 저자는 판사로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최대한 들어주고자 했다. 사건 이전에 사람에게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사람 이전에 사건에만 관심이 있는 판사라면 쉽게 판결을 내릴 것이다. 그게 쉬운 일이니까. 절차도 간단하고 시간도 많이 걸리지 않으니까. 하지만 저자는 듣는 판사였다.

 

 

판사, 세상을 배우다.”

책의 2부 제목이기도 한 짧은 문장은 많은 것을 이야기 한다. 저자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자세로 공직에 임하고 있는지 가장 잘 표현된 문장이다. 초임 판사의 나이가 굉장히 어리다. 20대 중·후반 30대 초반 정도다. 대학을 졸업하고 고시 공부를 하다 판사로 임용된 것이다. 사회 경험이라는 것이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상을 배우고자 하는 노력과 마음의 자세가 없는 판사는 법리적 접근에만 몰두할 수밖에 없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세상 사이에서 벌어지는 온갖 굴곡과 요철을 경험해보지 않은 판사들은 판결은 잘 내릴 수 있지만 판결에 세상을 담을 수는 없다. 저자처럼 판사로 임용되어 일을 시작하면서 “세상을 배우겠다.”라고 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진 판사가 몇이나 될까. 이 책을 읽으며 ‘이런 판사가 있었네. 참 좋은 판사네.’ 생각을 하다가 ‘이런 판사가 한국의 법원에 몇이나 될까?’라는 물음에 이르게 되면 한숨부터 나온다.

 

 

“CEO 범죄 등 화이트칼라 범죄에서의 일반 범죄와 균형을 잃은 양형 역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인식을 낳고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신뢰야말로 사회를 지켜내는 중요한 버팀목인 것입니다.” (p.82)

그래도 이런 판사들이 드물게 나마 아직(?) 존재한다는 것에 위로를 받고 싶다. 법원과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많이 무너졌지만 그래도 아직은 사법부는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판사들이 이런 책을 많이 출간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언론에서도 비리와 정치판사들 얘기만 늘어놓지 말고 좋은 판사들에 대한 얘기도 많이 보도했으면 한다. 그래서 판사와 법원,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다시 회복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