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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사회 - 쉴 새 없이 접속하고 끊임없이 차단한다
엄기호 지음 / 창비 / 2014년 3월
평점 :
나는 교회에서 고등부 교사를 맡고 있다. 6년째 되었다. 교회에는 주일학교라는 제도가 있다. 교회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대부분 영유아부서에서부터 청년부까지 학교가 있어서 담당 교역자(목사,전도사)가 있고 담당 부장·부감집사가 있고 반을 맡고 있는 선생님들이 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분들은 부장·부감 집사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시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다. 학교의 교장·교감 역할과는 다르고 반을 맡고 있는 선생님들과도 하는 역할이 다르기 때문이다. 부서의 예산이나 집행, 각종 행사의 기획에서부터 사후평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부서 활동에 관여하고 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부서의 담당 교역자를 지지하고 부서 안에서 수고하는 반 선생님들에게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도 정치화되고 속물화되다 보니 이런 부장·부감 자리가 차후에 있을 선거(장로, 장립집사, 권사를 뽑는 교회 내 선거)를 위한 사전 활동이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극소수겠지만 말이다. 적어도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는 그렇다. 다음 달에 교회 내 선거가 있는데, 뜬금없이 교회의 청년들에게 페이스북 친구요청이 온다거나 누군지 알 수 없는 번호로 좋은 성경구절이 갑자기 문자메시지로 도착하기도 한다. 그리고 해당 부서의 담당 교역자를 지지하고 그(그녀)의 리더십을 세워주기 보다 컨트롤 하고 반 선생님들을 마치 회사 부하 직원 대하듯이 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겪었던 일이기 때문에 일반화 할 수는 없지만 그런 부장·부감 집사를 겪으며 정말 교회도 갈 데까지 갔구나 하는 참담한 심정을 느꼈었다. 이런 내 경험을 일반화 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예전의 부장·부감이 임기를 마치고 새로운 부장·부감 집사가 온 이후로는 부서 전체의 분위기가 또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대로 담당 교역자를 잘 도와주고 반 선생님들에게 아낌없는 지원과 지지를 해주고 있다. 교회가 세속·속물화 되는 와중에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드물게나마 아직 교회에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이전 부장·부감에게 있어 가장 문제라고 생각했던 부분은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었다. 특히 부장집사는 현역교사인데, 이분은 말하는 것을 너무 좋아했다. 그리고 회의를 굉장히 좋아했다. 회의에서 자기가 말하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단지 말하는 것만 좋아하면 그나마 다행인데, 자신이 말하는 의견이 관철되지 않으면 공적인 회의 자리에서 싫은 내색을 하고 회의 중에 바쁘다며 나가버리기도 했다. 자신의 의견에 반대되는 의견을 개진하면 엉뚱한 소리로 회의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분과 3년을 같은 부서에 있었는데, 3년 동안 변함이 없었다. 물론, 담당 교역자와 반 선생님들이 자신보다 나이가 적지만 각자의 역할이 있고 한 부서 내에서도 담당하는 역할이 다른 것인데, 도통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경청이란 남의 이야기를 듣는 행위다. 그것도 건성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듣는 것이며 자신이 모르는 것,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듣는 것을 말한다. 타자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을 넘어서 타자의 말이 아닌 ‘타자성’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p.269)
개인적인 경험에서 이야기를 풀어내려다 보니 벌써 책의 결론을 언급할 수밖에 없다. 이 책 「단속사회」는 그의 전작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의 확장판으로 생각되었다.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에서는 학교라는 하나의 사회를 둘러싼 관계간의 이해와 대립, 갈등과 소외를 담아낸 책이라면 「단속사회」는 분석의 틀을 학교에서 한국사회 전체로 옮긴 것이다. 끊임없이 ‘단(斷)’ 차단하고, ‘속(續)’ 연결하고 접속하는 현대 한국사회를 냉철하게 분석하고 있다. 저자는 남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것에 주목한다. 흔히 경청이라고 하는 단어로 표현되는 ‘남의 말 듣기’는 한국사회에서 병적으로 결여된 사회현상이다. 어제 하루 동안 내가 만나서 이야기 한 사람을 생각해 보면 저자의 말이 그대로 맞아 들어갔다. 주로 내게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사무적으로나 개인적 대화 모두 마찬가지였다. 나 또한 그랬다. 퇴근 후 집에 와서 아내에게 이런 저런 말을 쏟아냈던 것이다. 집에만 오면 꿀 먹은 벙어리 같은 남편보다야 훨씬 낫겠다고 생각하는 여성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으나 먼저 “오늘 하루 어땠어?”라고 아내에게 먼저 묻기 전에 내 얘기부터 쏟아 냈다. 모두가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사회다. 하지만 책의 서두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쏟아 내고 싶은 ‘말’을 정제된 언어와 상대방의 알아들을 수 있는 문장으로 만들어 내는 능력이 거의 없다고 한다. 동의한다. 모두들 자기 얘기를 자기 방식과 언어로 쏟아내기만 할뿐, 상대방이 어떻게 이해해줬음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없는 것이다. ‘일단 쏟아냈으니, 속은 시원하네~’라는 생각뿐인 것 같다.
“내가 글과 말을 팔아먹고 살면서 중요하게 여기게 된 것은 ‘곁’과 ‘이야기’다. ‘곁’은 말하는 자리가 아니라 ‘듣는’ 자리에 가깝다.” (p.6)
“곁은 파괴하고 편을 강요하는 것, 이는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곁은 파괴되고 편으로 몰아가는 사회” (p.7)
‘곁’이 파괴된 사회. ‘곁’은 파괴되고 ‘편’만 강조하는 사회라는 구조의 틀은 2014년 한국사회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좋은 도구이다. IMF이후 경제적 상황과 요구만이 개인의 사회적 활동과 역량, 가족 구성원의 관계구도를 결정하게 되면서 우리의 ‘곁’은 급속하게 파괴되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취직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정규직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아이의 성적을 높일 수 있을까? 하는 것 말고는 중요한 화두는 모두 사라졌다. 저자가 책에서 줄곧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힐링’의 대두와 범람은 이러한 ‘곁’의 파괴가 단지 개인적 욕망과 소비의 결과라는 것을 내면화하고 개인화 하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하지만 정작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는 가장 큰 단위의 사회인 국가가 구조적으로 ‘곁’을 파괴하고 ‘편’을 조장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내편’이 아니면 ‘남’이 아니라 ‘적’이 되어버리는 기구한 굴레를 벗어날 수 없도록 국가와 사회 각 기능이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총체적 난국>으로 표현되는 두 단어가 주는 유의미함은 이 사회의 각 개인들에게는 가혹하다. 총체적 난국이기 때문에 사회의 거대 단위에서 구조적 모순과 한계, 문제를 해결하고 봉합하기보다 손 놓고 ‘개인이 알아서’라며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파편처럼 흩어져 부유하는 개인은 기댈 곳이 없다. ‘곁’이 없는 것이다. 가족 단위에서도 돈을 벌어오지 못하는 가장은 무의미한 대상일 뿐이고, 일정 수준의 학업성취를 보이지 못하는 학생은 교실 내에서 문맹이 되어 버린다. 비단 가정과 학교만의 문제는 아니다.
“국가폭력이 행사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 국민들의 광범위한 동의다. 그런 자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가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확산되지 않는다면 불안을 통한 통치는 성공할 수 없다.” (p.223)
지난 이명박 정권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어져 오고 있는 국가폭력의 가시적 대두는 가장 자유롭고 활발해야 할 인터넷이라는 공론장에서조차 ‘내가 쓰는 글이 어떤 이나 세력으로부터 고소당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부터 하게 되는 개인적 검열에 이르게 되었다. 국가기관에서 민간인을 사찰하고, 참혹한 용산참사와 쌍용자동차 문제 등에 있어서도 대다수의 국민들은 쉽게 타올랐다가 한순간에 사그라진다. 얼마 전 국가 전체를 떠들썩하게 했던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광풍도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히 사라졌다. 모두가 한날한시에 입을 다물고 포털 검색창에서 그런 단어를 일체 입력하지 않기로 합의한 것처럼 그렇게 사라졌다. ‘내 문제’가 아니면 괜히 나서서 긁어 부스럼 만들기 싫은 것이다. 책에서도 언급하듯이 이런 개인적 냉소는 이미 학교에서부터 학습된 것이다. 아는 형님의 첫아이가 올 초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입학한 지 3일째 아침부터 갑자기 학교에 가기 싫다며 떼를 썼다는 것이다. 앉혀 놓고 얘기를 들어보니, 담임선생님이 왼손잡이인 아이에게 “왼손으로 쓰는 것은 잘못된 것이니, 오른손으로 쓰라.”고 했다는 것이다. 쌍팔년도 초등학교도 아니고 2014년 초등학교 교사가 왼손잡이인 아이에게 오른손으로 쓸 것을 훈계했다니 형님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학교에서부터 국가나 거대 단위 사회가 원하는 데로 학습되고 교육받는다. 일렬로 서야하고 질문은 가급적 하지 않아야 하며, 선생님의 말은 무조건 들어야 하는 것이 옳은 학생, 모범 학생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착하게 자라난 학생은 사회인이 되어 국가가 주입하고 가르치는 프로파간다에 그대로 동조한다. 동의하지 않더라도 ‘모난 놈 정 맞는다.’라는 구언을 철석같이 믿고 따른다. 하기야 ‘모난 놈이 잘 되는’ 꼴을 본 적이 없으니 ‘모나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이렇게 파편적으로 일상이 채워지다 보니 ‘곁’은 파괴되고 ‘편’을 찾게 된다. ‘내편’끼리만 모여 있으면 편하고 ‘내편’만은 내 얘기를 들어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 직장, 여타 관계에서는 말이 없는 사람이 자신의 페이스북과 트위터에서는 누구보다 활발하게 자신의 일상을 고백하고 토로한다. 끊임없이 단절되면서도 연결되는 현대한국인의 자화상이다.
“다름과 차이를 차단하게 되면서, 서로의 경험을 참조하며 나누는 배움과 성장은 불가능해진 ‘사회’. 곁을 만드는 언어는 소멸해 버리고 편만 강요하는 ‘사회’. 책임은 오롯이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사회’.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사회’. 이 세계를 과연 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까?” (p.10)
그나마 교회를 다니고 있는 나는 교회에서 만난 여러 사람들과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속내를 드러내 놓고 대화를 한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나누는 이야기들이 피상적이고 수동적이며 뭔가 더 깊은 속내는 감추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책에서 소개된 일선 교사는 부당한 학교장의 지시와 요구에 대해 동료 교사와 이야기할 수 없어 철학관을 찾아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냈다고 한다. 그렇게 이 사회를 사는 우리 개인은 소외되고 격리된다. 모두가 할 말은 많지만 제대로 전하지도, 전할 방법을 알고 있지도 못하다. 그래서 나이의 많음과 직급의 높음을 이용해 자기 혼자만의 이야기를 쏟아낸다. 다름과 차이를 학습하고 경험했더라면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총체적인 난국에 빠진 각종 사안에 대해 적어도 공감하고 참조하며 배우고 더불어 성장하는 참조점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나와 다르면 나와의 차이가 아니라 ‘틀린 것’으로 생각한다. 정부에서 이야기하는 것에 반대하면 나는 종북 세력이 되어 버린다. 직장 내 문제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면 동료들로부터 싸늘한 시선을 받는다. 그저 니 자신이 못나고 더 노력하지 않아서 지금 그 모양 그 꼴이라는 힐링과 자기계발의 최면에 빠져 끝도 없이 자괴감의 나락으로 추락한다.
「88만원 세대」를 읽으며 짱돌을 들고자 마음을 먹기도 했고, 이명박 시절 광우병 소고기 파동으로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가보기도 했지만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들고 있던 짱돌과 촛불은 거리에서 내팽개쳐 진 채 또 다시 고시원으로, 자취방으로, 직장에서든 가정에서든 그저 ‘내방’으로 기어들어가고 말았다. 지난 철도노조 파업 당시 정부와 사측, 보수언론에서는 어김없이 <귀족노조> 프레임을 주입했다. 한해 육천만원이 넘는 연봉을 받는 사람이 더 돈을 받으려고 파업을 하고 있다는 프레임이 기성세대는 물론 젊은 세대, 특히 취준생(취업준비생)에게까지 먹혀 들어갔다는 것에 나는 충격을 받았었다. 그런 인터뷰를 하거나 댓글을 단 취준생이 고시의 문턱을 넘어 코레일에 들어간다면 귀족노조라는 프레임으로 공격했던 사람이 본인이 되는 것임에도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일단 나보다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쉽게 공기업에 취업해 많은 연봉을 받으며 아직도 자리를 보전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개인적 박탈감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경청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되는가? 그것은 자기도 모르던 자기의 삶, 즉 자기 삶에 내재되어 있는 타자성이다. 그 타자성을 깨달음으로써 나와 너는 그 타자성을 공유한 사람으로서 공통의 운명이 된다.” (p.271)
저자는 책의 결론을 명확히 하지 않는다. 이 사회에서 어느 누가 명확한 결론과 대책을 낼 수 있을까 싶다. 다만, 경청하는 것. 그래서 ‘너’를 ‘편’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화’해 공감하는 것을 강조한다.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또다시 말을 쏟아내고 대책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모두가 자기가 옳다고만 생각한다. ‘나의 말’이 아닌 ‘너의 말’을 먼저 듣고 그것에 귀 기울여 배우고 성장하며 함께 공감하는 것은 개별 단위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관계에서 시작해야 한다. 내 말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고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는 사람에게는 속내를 털어놓는다. 개별 주체간 신뢰를 회복하는 길도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관심을 끄는 사건 하나 생기면 우르르 몰려갔다가 우르르 빠져 나오는 파편화의 반복은 무의미하다. 좀 더 유의미한 개인과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경청해야 한다. ‘너의 말’을 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