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실내인간
이석원 지음 / 달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어디에선가 여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남자가 허풍이 심한 사람이라나. 잘난 척, 잘하는 척 하는 것도 그만큼 싫어하나 보다. 사실 그런 사람은 남자들도 싫어한다. 술자리에서 군대 얘기하고 소싯적 놀아 봤던 얘기하면 누구나 군대 영웅으로 변신하고 누구나 학창시절 안 놀아본 사람들이 없을 정도니 말이다. 나는 말 많은 사람이 싫다. 더 적확하게 말하자면 말만 많은 사람을 싫어한다. 말하는 걸 좋아하고 나서기를 좋아하지만 늘 그 끝은 흐지부지 되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그리고 또 하나.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싫어한다. 이제껏 내가 겪은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매번 약속에 늦는 사람들이다. 갑자기 길이 엄청나게 막히거나, 사고가 나거나, 부득의한 사정이 있어서 늦는 경우는 거의 없다. 5분 늦는 사람은 매번 5분 늦고 30분 늦는 사람은 매번 30분씩 늦는다. 일로 만나거나 사적 친분이 있는 사람이거나 상관없이 이 두 가지를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을 싫어한다. 그런데 이것이 나와 아주 친한 친구라면 예외일 때도 있다. 아니, 있었다. 내 친한 친구 중 하나는 늘 말하기를 좋아한다. 언변이 있다. 그리고 유머도 있다. 십 수 년을 곁에서 있다 보면 레퍼토리를 모조리 파악하고 있지만 그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배꼽을 잡는다. 귀가 얇아 어떤 것이 좋다. 어떤 길이 좋다라고 하면 어김없이 내게 와 주저리 말한다. 누구를 만났는데 이런 길이 있어서 이렇게 하기로 했다고. 나는 그냥 흘려듣는다. 며칠 안에 다른 사람을 만나 다른 이야기를 들으면 또 그쪽으로 쏠려 갈 것이 뻔 하니까. 일 벌이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일 맡는 것도 좋아한다. 그런데 단 한 번도 한 가지 일을 끝까지 해내는 것을 보지 못했다. 늘 용두사미로 끝난다. 나를 비롯한 그 친구를 잘 아는 사람들은 또 새로운 일을 맡아 열변을 토하는 그 친구를 보며 비슷한 생각을 한다. ‘저러다 또 말텐데’ 약속시간에는 늘 늦는 편이다. 시간을 지킬 때도 있지만 지키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많다. 어릴 때부터 봐오던 친구라 그냥 그렇게 인정하고 살았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모습 두 가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두 가지를 상쇄하고도 남을 또 다른 모습이 있었다. 어릴 때, 30대 이진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런데 점점 그 친구의 그 모습이 내가 평소 싫어하고, 직장 후배라면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호통을 칠 그 모습에 오버랩 되고 있었다.
지난 해 중반부터 친구의 고질병이 심화되었다. 외국을 나가겠다. 지금 사귀는 여자와 결혼하겠다(이 친구는 여자 친구가 없었던 적이 없었다) 대학원에 들어가 새로운 공부를 하겠다. 연말이 되어서 보니 또 하나도 말한 대로 된 게 없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던 ‘또 저러다 말겠지’가 현실이 되었다. 그런데 안타깝지 않았다. 속상하지도 않았다. 고소했다. 여자 친구와 헤어져 괴로워하고 못 마시는 술을 퍼 마시고 하는 일들을 보며 고소해 하고 있었다. 몇 안 되는 정말 친한 친구인데 말이다. 며칠 후 나는 깨달았다. 이 친구를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친구라는 허울로 덮어버리려 했지만 나는 줄곧 이 친구를 좋아하지 않고 있었다.
“결국 용휘는 처음부터 사람들한테 해명할 일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난 말로만 그를 친구라고 하면서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한 번도 그를 조건 없이 믿어준 적이 없었던 것이고, 단지 두둔했을 뿐. 단지 이해하는 척했을 뿐.” (p.223)
이 책 「실내인간」의 용휘, 방세옥은 처음으로 자신의 아지트 주변에 겁도 없이(?) 찾아 온 용우와 친구가 되었다.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 방세옥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숨기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자신의 작업 공간을 성처럼 만들어 놓고 그 주변의 주택과 빌라를 모조리 사들여 성채를 만들었다. 자신이 아니면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접근금지 구역을 만든 것이다. 단골로 드나들던 대형서점에서 우연히 만난 여인에게 한 눈에 반해 버리고 그녀에게 느닷없는 거짓말을 해버렸다. 그녀를 웃게 하고 그녀를 만족시키기 위해 그는 평생 단 한권도 소설을 읽지 않은 소설가가 되었다.
대단한 소설가가 되고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그럴수록 그는 자신에게 더 천착해 들어갔고 반드시 베스트셀러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게 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작품이 반드시 그녀를 처음 만난 그 대형서점 베스트셀러 코너에 올라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성을 만들고 그 안에 스스로를 유폐시켰다.
용우는 우연히 만난 용휘와 친구가 되었다. 진짜 어른으로 대했고 배웠다. 불평과 불만과 의심 투성이인 룸메이트 제롬의 반복되는 비아냥거림에도 용우는 용휘를 두둔했다. 싫어하는 내색이 노골적인 제롬을 설득해 용휘를 초대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얼굴없는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 방세옥에게 강박적이리만큼 열등감과 열패감을 가지고 있는 이름 없는 무명작가가 기자로 행세하며 결국 방세옥의 실체를 세상에 폭로한다. 이상한 동네에 이상한 집들이 모인 그곳에 이상한 행색과 정체를 의심하기 딱 좋은 용휘와 기꺼이 친구가 된 용우는 용휘를 향한 배신감에 치를 떤다.
“근데 말야, 만약…… 언젠가 내가 너한테 한 가지쯤 무례를 범한다고 해도 용서해줄 수 있겠냐?” (p.59)
“암흑이 되어버린 사각의 브라운관 안에 소파에 누워 웃고 있는 용휘의 모습이 무슨 액자 속 흑백사진처럼 담겨졌다. 순간 난, 왠지 그를 거기서 꺼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친구를. 그 정체 모를 사각의 틀 안에서.” (p.143)
하지만 용우는 용휘를 결국 이해한다. 이해하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한다.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진심으로 이해하려 한다. 실내인간은 잘못 된 것이니 실외인간이 되어야 한다며 굳이 설득을 하거나 물리력으로 끌어내려 하지 않는다. 다만 방세옥을, 용휘를 스스로 유폐할 수밖에 없었던 그간의 사정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자신 또한 시련의 상처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상한 동네로 들어온 것처럼, 용휘에게도 말할 수 없는 상처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가식적이고 위선적이었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다. 말로만 그를 친구라고 하면서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한 번도 용휘를 조건 없이 믿어준 적이 없었다는 것, 그리고 그를 단지 두둔하기만 했을 뿐, 이해하는 척만 했을 뿐임을 알게 된다.
나 또한 그렇다. 십 수 년 동안 친하게 잘 지내오던 친구 놈이 갑자기 싫어질 리가 없다. 그 친구가 갑자기 그 전보다 더 귀가 얇아지고, 말이 많아지고, 우유부단해지고, 시간 약속을 더 지키지 않은 것이 아니다. 용휘가 용우가 친구가 되기 전 망설이며 건넨 이야기처럼. 그렇게 내게 미리 메시지를 보낸 것이 아닌 가 싶다. ‘언젠가 니가 내 모습이 싫어질 때 나를 이해해줄 수 있겠냐?’ 그 친구 놈이 변한 게 아니라 내가 변한 것이 아닐까? 유독 힘이 든 한해였다 작년은. 바쁘기도 하고 힘든 일도 겹쳤다. 11월 달쯤 되니 정신이 나가 멍한 채로 연말까지 지냈던 것 같다. 당연히 예민해지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그것은 곧 주변에도 스트레스를 많이 분출했다는 말이 된다. 결국 내가 그 친구를 이해하고 받아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솔직하게 그것을 직시하면 내가 비겁하고 속 좁은 놈이 될까봐 미리 친구에게 책임을 전가한 것이다.
“얼굴이 맑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눈코입이 흐릿하게 생겼다는 거지?”
“아니, 너무 진하게 생기지 않았으면서도 예쁘다는 뜻이야. 난 그런 게 좋은데.”
“난 싫어.” (p.118)
애인과 8년을 연애한 용우는 느닷없이 헤어졌다. 헤어진 충격과 이별의 쓸쓸함에서 서서히 벗어나갈 무렵 느닷없이 헤어진 것이 아님을 알아가게 된다. 용우와 전 애인은 처음부터 맞지 않았다. 여자 친구의 얼굴이 맑아서 좋은 용우에게 여자 친구는 타박한다. 얼굴이 맑다는 표현이 그녀에게는 이목구비가 뚜렷하지 않은 뭉뚱그려진 얼굴이라고 받아들여졌나 보다. 용우는 처음부터 진하게 생기지 않은 그녀를 좋아 했다. 그리고 그런 얼굴을 좋아했다. 그런데 여자 친구는 그렇게 생긴 자신의 얼굴을 싫어한다. 또 그렇게 표현하는 남자친구의 표현도 싫어한다. 이런 사람들이 결혼하면 어떻게 될까? 결혼한 지 30년이 지나도 그걸로 싸운다. 100% 확실하다.
오랜만에 동창회에 나가려 멋진 옷을 빼입고 옷에 맞는 악세사리를 이리 끼고 저리 끼고 걸고 하며 바쁘게 왔다 갔다 하며 남편에게 묻는다.
“여보~ 이게 더 어울려? 저게 더 어울려?”
“둘 다”
쨍그랑.
“여보~ 이게 더 어울려? 저게 더 어울려?”
“둘 다 이뻐.”
우장창.
남편은 도무지 두 개의 악세사리를 구분해 낼 수 없다. 최선을 다해 이쁘다고 해주는 데도 불구하고 아내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아내는
“왼쪽 것은 보석 자체가 커서 밝은 톤의 투피스에 어울리지 않는다. 오른쪽 것은 은은한 진주라 당신의 투피스에 딱 어울려”
라고 말해주기를 원한다. 쨍그랑~ 우장창~ 하고 나면 동창회에 나가는 아내 마음도 당연히 좋지 않고 집에 있는 남편의 마음도 좋지 않을 것이다.
다른 것은 다른 것대로 인정해야 한다. 용휘가 방세옥이 되어 왜 그렇게 베스트셀러에 집착했는지, 방세옥의 정체를 밝혀내려 그 무명의 작가는 기자로 사칭하면서 왜 그렇게 집착했는지 그것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늘 투정과 불만 싸움이다. 나도 내 친구 놈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그 친구가 달라진 것이 아니다.
어느 누구는 실내인간에 가까울 것이고 어느 누구는 실외인간에 가까울 것이다. 서로 나와라, 들어가라 해서는 안 된다. 실내와 실외를 서로 인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