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선의 탐식가들
김정호 지음 / 따비 / 2012년 2월
평점 :
식당에서 같이 밥 먹기가 부끄러운 친구가 있다. 대형마트나 백화점의 푸드 코트에서는 덜한데 백반집이나 국밥집 같은 곳에서 그 부끄러움의 정도는 배가 된다. 일단 이 친구는 식사가 나오기 전 반찬을 다 먹는다. 보통 백반집이나 국밥집에 가면 반찬이 먼저 나오는데 그걸 다 먹는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반찬을 달라고 한다. 최대 세 번까지 반찬을 풀 세팅해 리필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음식을 너무 짜게 먹는다. 국밥집에 가서 조그만 간장종지 같은 곳에 새우젓을 주는 데 그걸 통째로 다 넣고 다시 달라고 해서 추가로 새우젓을 또 넣는다. 워낙 친한 친구라 면전에서 나무라기도 수십 번 했으나 뭐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터라 바뀌지 않는다. 이 친구가 전형적인 탐식가다. 20대 어린 시절에는 먹는 양 자체도 어마어마했다. 돼지국밥에 공깃밥 2-3공기는 당연한 정도였다.
조선 시대에도 탐식가가 있었던 가 보다. 탐식가도 있고 미식가도 있었던 가 보다. 탐식가도 있고 미식가도 있고 악식가도 있었던 가 보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은 천재로 불린 뛰어난 시인이었고, 사대부들이 식탐을 경계했던 것과 달리 탐식가였다. 자신을 ‘먹을 것만 탐한 사람’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했다.” (p.195)
“<도문대작>은 허균이 조선 팔도의 명물 토산품과 별미 음식을 소개한 책이다. 책 제목은 ‘푸줏간 앞에서 입을 크게 벌려 고기 씹는 시늉을 해 본다’는 뜻이다.” (p.205)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은 조선시대 ‘식식로드’ 내지는 ‘맛지도’를 그린 식객이었다. 인터넷 블로그 중 대다수가 맛집 블로그인 점을 감안하면 허균은 수백 년을 앞선 파워블로그였던 셈이다. 그는 스스로 ‘나는 음식을 탐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유명한 탐식가였다고 한다. 책에 소개된 바로는 지방의 수령직을 요청하면서도 풍미가 있고 유명한 맛을 경험할 수 있는 지역을 직접 말했다고 할 정도니 그의 음식 사랑을 엿볼 수 있다.
당시만 해도 양반과 사대부는 표면적으로는 음식을 탐하는 것을 죄로 여기고 체통이 없는 것으로 여겼다. 당연히 허균의 이러한 음식에 대한 탐함은 다른 사대부들과 양반들에게는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더군다나 관직에 진출하기 전부터 자유롭고 호방한 기개와 가치관을 지녀 조선의 성리학과 유교정책과는 조금 다른 기이한 행동과 말을 일삼은 허균이었기에 여러 차례 파직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허균은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고 마음껏 먹고 싶은 음식을 먹는 탐식가로서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허균은 완고한 유교질서와 도덕규범을 억압으로 느꼈고, 현실로부터 도피하려 했다. 도가의 신선사상과 불교가 바로 그의 피난처였다. 그는 신선처럼 살고 싶어 했고, 실제로 은둔생활을 꿈꿨으며, 방에 불상을 들여놓고 불경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리기도 했다.” (p.203)
허균의 이러한 탐식가로서의 모습에 대해서 저자는 완고한 지배이념과 가치체계에 대한 반감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일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허균이 직접 그가 가고 싶은 곳에 관직 자리를 요청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는 음식 자체를 사랑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가 맛의 세계에 탐닉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히 사대부 양반이라는 신분적 특권 때문이기도 했지만 기성 지배체제와는 다른 아웃사이더의 모습으로 일생을 살았기에 자유로운 맛기행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허균의 탐식에 대해서 기성 사대부와 양반은 비판하고 비난했다고 이미 언급했다. 사극이나 영화를 보면 잘 알 수 있듯이 당시 사대부와 양반들은 빳빳하게 세운 옷을 입고 갓을 쓰고 정좌한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당시 그들의 절개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1392년, 새 나라 조선이 들어섰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변화는, 아주 미미했지만 밥상에 찾아왔다. ‘육식 금지’가 풀린 것이다.” (p.13)
숭불정책을 쓰던 고려가 망하고 새 왕국 조선이 들어서 숭유정책을 썼다. 불교에서는 살생을 금지하기 때문에 고기도 먹을 수 없었는데 이제 마음껏 고기를 먹게 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성리학과 유교의 영향으로 너저분하게 음식에 집착하고 먹는 것에 탐닉하는 것을 금기시 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 숭불정책을 쓰던 고려시대에, 성리학과 유교의 교리에 천착한 조선시대에 고기를 먹지 않았을까? 먹는 것을 금기시하기만 했을까?
이 책 「조선의 탐식가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혀 아니었다. 고려시대에도 조선시대에도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일반 백성들이야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생활이 몇 백 년을 이어왔는데 고기를 먹으라고 해서 당장 장에 나가 소고기 한 근 떼어 올 수 없는 처지였다. 어차피 양반과 사대부에게 적용되는 것이었을 뿐이다. 그들은 겉으로는 에헴~ 하면서 뒤로는 온갖 맛있는 것들을 다 쳐드셨다.
“탐식은 소수 권세가들이 누린 특권이었고, 인구의 다수는 기아에 항구적으로 시달렸다. 따라서 정부가 틀어쥐려 한 것은 일반 민중이 아닌 특권층의 목구멍이었다. 특권층의 식욕을 적절히 통제하지 않으면 하층민의 분노가 폭발하여 사회가 붕괴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성리학의 청빈과 근검 정신은 그런 현실이 낳은 고육지책이었던 것이다.” (p.328)
고려후기 권문세족과 지방토후들의 비리와 폭정이 극에 달했다. 결국 그것이 고려의 멸망을 가져온 가장 큰 요인이기도 했다. 어차피 백성들이야 왕이 바뀌든 나라가 바뀌든 그들의 처지는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한 치도 나아지지 않았을 것임이 자명하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기념으로 백성들에게 떡 한 덩이 돌렸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우심적은 선비들끼리만 통하는 꽤나 진중한 음식이었다. 그리고 우심적은 고기를 먹었다는 사실보다, 상대방으로부터 존경과 인정을 받았다는 기쁨 때문에 절로 배가 불러지는 음식이었다.” (p.31)
“가장 이란 여름에 개고기를 삶아 먹는 풍속, 또는 개고기 요리를 가리킨다.” (p.95)
우심적은 물론 사슴의 태, 곰발바닥, 표범, 사슴 꼬리 등 들어보지도 못한 음식에 대해 많은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단순히 그런 음식을 소개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요리법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록된 책이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여러 가지 진귀한 음식들 중에서도 우심적이 놀라웠다. 우심적은 소심장 요리다. 소심장을 구워 먹기도 하고 전을 부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심적이 조선의 사대부와 양반 사이에서 유명해진 계기가 더 어처구니없었다. 중국의 유명한 시인이자 문인이 자신의 시에서 우심적을 언급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니 자기 집에서 온갖 수발을 들고 자기 땅뙈기에 소작하며 허리가 굽은 백성들은 낱알 하나 긁어 가며 목숨을 연명하는 데 이 사대부 양반 놈들은 중국의 시인이 먹은 음식이 멋있어 보여 따라한 것이다. 유행처럼 사대부와 양반들 사이에서 우심적이 번져 나가 ‘우심적쯤 먹어줘야’ 사대부, 양반 소리 좀 들어보는 정도였다 하니 기가 막히다.
“다산은 ‘음식이란 목숨만 이어 가면 되는 것’이라며 음식이 지닌 맛을 이성적으로 아예 무시했다. ‘아무리 맛있는 고기나 생선이라도 입 안으로 들어가면 이미 더러운 물건이 되어 버린다.’라는 게 다산의 음식철학이었다. 다산은 어떤 음식을 먹든 포만감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심지어 그는 가난을 이기려면 자신의 입과 입술을 속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p.236)
반대로 다산 정약용의 예는 ‘악식가’라 표현한다. ‘악’이 즐겁다는 뜻이 아니라 어렵다는 뜻에 가까운 ‘악식가’다. 다산은 책에 소개된 대로 먹는 것에 대해서 지나칠 만큼 조심스럽고 자제를 한 측면이 있는 듯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청렴결백했던 목민관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의 성장환경도 있고 관직에 나섰지만 모략에 의해 긴 유배 생활을 했던 터라 청렴과 근검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먼 유배생활 중에도 아들들에게 편지를 썼는데 늘 근검을 강조하고 탐식을 경계하라 했다 하니 그의 ‘악식가’로서의 면모를 그대로 들여다 볼 수 있다. 지금에야 강진에 위치한 다산초당에 올라가는 길이 잘 닦여 있지만 예전에는 산골 오지 중 오지였을 것이다. 찾아오는 관광객을 위함인지 다산의 업적 때문인지 현대에 들어와 원래 초가집이 아닌 기와집을 지어 올려 유배지 같지 않은 유배지로 만들어 놓았지만 유배 당시에는 섬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산에서 나는 나물을 주로 먹었다고 알려진 다산은 상추쌈을 한 움큼 먹으며 포만감을 느꼈다고 한다. 실제로 상추쌈을 얼마만큼 먹어야 포만감이 생길까. 다산의 말대로 입과 입술을 속이는 것일 터. 마음으로 포만감을 느끼고 먹는 것에는 크게 개의치 않겠다는 결기로 해석할 수 있다.
조선의 수많았던 반정과 반란, 붕당과 정쟁으로 인해 유배와 하옥과 처형이 반복되었지만 제 몸 하나 잘 건사해 살다 간 많은 사대부와 양반들도 있다. 그들은 누릴 부귀와 영화를 생전에 다 했다. 소심장을 요리하고 사슴의 태를 요리해 먹고 귀하디귀한 표범을 잡아다 요리해 먹었다. 곡식 낱알 하나 긁어모아 나무껍질과 함께 죽을 쑤어 먹은 백성들의 삶과는 천양지차다. 또한 사대부와 양반들이 누릴 탐식을 위해 고통 받았을 그들의 노비들과 백성들의 삶을 생각하니 열불이 올라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