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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리 마타이 - 아프리카에 3천만 그루의 나무를 심은 노벨 평화상 수상자 ㅣ 문학동네 세계 인물 그림책 8
프랑크 프레보 글, 오렐리아 프롱티 그림, 정지현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4월
평점 :
수능이 100일도 채 남지 않았다. 아이들은 저마다의 꿈을 꾸고 있다. 그런데 아이들의 꿈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아이들이 말하는 꿈이 부모의 꿈인지, 사회가 어느 정도 선에서 안정을 기준지은 꿈인지 알 수가 없다. 일단 수능을 치고 원서를 쓰고 대학에 입학한 뒤에는 더 이상의 꿈이 이어지지 않는다. 활어와 같이 팔딱팔딱 살아 숨 쉬어야 할 아이들의 입에서는 ‘안정된’이라는 형용사가 바로 나온다. ‘안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말하고 있는 것인지조차 모르겠다.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아이들의 입에서 ‘안정’, ‘안정된’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게 만든 것은 누구의 책임일까? 그 아이들의 부모? 학교? 사회? TV? 하나의 대상으로 특정할 수 없는 복잡한 문제다. 어쩌면 그 아이들이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한 후 직장 생활을 하고 배우자를 만나 결혼한 후에도 딱 떨어지는 해답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안정’과 ‘안정된’것을 추구한다. 직장도, 가정도, 대인관계도, 종교도……. 위험하지는 않지만 뭔가를 바꿀 수 있는 동력은 상실 된다.
이 책 「왕가리 마타이」의 주인공 왕가리 마타이는 ‘안정’과 ‘안정된’것을 추구하기보다 ‘변화’와 ‘모험’을 추구했다. 그래서 보다 나은 삶과 사회, 공동체를 만든 사람이다. 아프리카의 어린 소녀들의 대다수가 그런 것처럼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엄마의 일을 돕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면 결코 그녀를 통해 만들어진 변화와 발전은 꿈꿀 수도 없었을 것이다.
‘왜 나는 학교에 가지 않고 집안일을 해야 하지?’ 라는 물음에서 ‘변화’와 ‘모험’이 출발된 것이다.
“무화과나무 그늘에서 엄마는 ‘한 그루 나무가 숲보다 귀하단다.’ 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왕가리는 이 말을 평생 동안 마음속에 간직했습니다.” (p.11)
“영국인들 좋은 땅을 차지하고는 이름을 마음대로 바꾸어 버렸다는 것을요. 또 차를 재배하려고 수많은 나무를 베어 버렸다는 것도요.” (p.13)
엄마를 통해 알게 된 무화과나무와 그 나무의 그늘이 주는 따뜻함과 포근함을 기억 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주는 유익에 감사 했다. 학교에 가서 교육을 받고 책을 읽으면서 어떤 사람들이 숲에서 나무를 베어 가는지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무를 심는 ‘단 한 사람’이 되기로 결심 한다.
얼마나 무모하고 어이없으며 콧방귀 뀔 결심인가?
‘뭐!! 나무를 심는 다고? 나무를 베야 커피도 심고 다른 작물도 재배해서 돈을 벌지?’
‘쳇!! 니까짓 게 뭐? 나무를 심는 다고? 몇 그루나 심는 지 보자!!’
“나무의 소중함을 모르는 새로운 지도자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케냐 사람들은 스스로 숲을 파괴하기 시작했습니다. 케냐를 지배하던 영국인이 그랬던 것처럼 나무를 베어서 팔았습니다. 그다음엔 숲을 없앤 땅에 차나 커피, 담배처럼 부유한 나라에서 원하는 작물을 재배해 돈을 벌었습니다.” (p.19)
그녀는 나무를 심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여자의 몸으로 말이다. 케냐를 식민 지배하던 영국인들이 물러간 후에도 숲을 파괴하고 나무를 베어가는 일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는 케냐인들 스스로 그들의 숲을 도려내고 나무를 뽑아냈다. 그렇게 하면 영국인들이 식민 지배하면서 돈을 벌어간 것처럼 그들도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왕가리는 케냐땅 곳곳에 묘목장을 세워 사람들에게 나눠 줄 묘목을 키우고, 사람들이 나무 한 그루를 제대로 키워 낼 때마다 보상금을 주기로 합니다.” (p.24)
“왕가리는 나무를 심는 일에 힘쓰면서도, 한편으로 케냐에 민주주의를 자라게 하고 싶습니다. 민주주의는 이 나라의 법을 모두가 함께 자유롭게 결정하는 방식입니다.” (p.31)
왕가리 마타이는 그녀의 조국 케냐가 여전히 궁핍한 형편을 벗어날 수 없었던 시절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미국 유학은 출셋길이 열리고 안정되고 탄탄한 인생을 설계할 수 있는 비밀 도면을 얻은 것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케냐인들을 압제하던 영국인들도 몰려갔고, 미국 유학도 갔다 온 엘리트. 그녀는 새롭게 힘을 가진 지도자들과 함께 ‘잘 먹고 잘 살 수’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세계 최고의 학구열로 교육되어 온 한국의 고3들이 기계처럼 엄마의 꿈을 자신의 꿈인 것처럼 말하듯이, 왕가리 마타이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고 엘리트들이 살아가는 코스로 갈 수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자신의 삶을 선택했더라도 아무도 그녀를 비난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모두들 그렇게 살아가니까.
그런데 그녀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바보같이.
“왕가리는 그녀를 지지하는 수많은 사람과 함께 3천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지금도 매일 새로운 나무를 심고 있습니다.”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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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케냐에서 그녀는 두 가지에 매진했다. 조국 케냐의 민주화와 나무 심기. 두 가지 모두 무모하고 어리석고 쉽게 결론이 나지 않는 재미없고 지루한 주제다. 베어내기에 급급했던 벌거숭이 땅에 3천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3만 그루도 아니고 3천만 그루. 영국으로부터 독립된 후 기형적으로 탄생된 독재정부가 물러난 후 그녀는 정부 요직에 진출했다. 환경부 차관일을 하면서도 그녀는 케냐의 숲과 나무를 살리는 일에 온 힘을 쏟았다고 한다.
혀를 차고, 콧방귀를 뀌고, 모두들 불가능하고 어리석다고 생각하던 일이 그녀 한 사람의 결심과 용기 있는 한 걸음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우공이산(愚公移山)’
이 고사상어를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신영복 선생은 이 고사성어를 이렇게 풀었다.
‘어리석은 자의 우직함이 세상을 조금씩 바꾸어 갑니다.’
똑똑한 사람이,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모두들 가는 성공코스로 가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정말 좋아하고 잘할 수 있으며 포기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에 매진하고 용기 있게 한 걸음씩 내딛는 사람으로 인해 세상이 바뀌어 간다는 것이다. 결코 ‘안정’과 ‘안정된’것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이미애씨가 쓴「사막에 숲이 있다」라는 책이 생각났다. 중국 내륙 마오우쑤 사막에 나무를 심어 숲을 만든 ‘인위쩐’이라는 여성에 대한 내용이 담긴 책이다. 황량하고 모든 것이 포기된 것 같은 사막 한 가운데서 희망의 끈을 결코 포기하지 않은 한 여성 ‘인위쩐’의 이야기는 그대로 책이 되고 드라마가 되었다. 당국에서도 포기해버린 곳에 그녀의 남편과 내던져 졌지만 그녀는 그녀의 삶을 내팽개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도저히 뿌리를 내릴 수 없을 것만 같은 사막에 어리고 여린 묘목을 심었다. 수많은 실패와 착오와 자연재해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사막 한가운데 버려진 인위쩐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살고자 하는 의지와 ‘내가 처한 환경을 바꿀 수 없다면 내가 만들자’라는 말도 안 되는 다짐과 의지로 사막에 나무 묘목을 심었다.
그녀는 7년 만에 제대로 된 나무군락을 만들어 낼 수 있었고 기적을 만들어냈다. 80만 그루의 나무. 1400만 평의 숲. 1400만 평은 여의도공원의 200배 정도 되는 크기이다.(여의도 공원은 약 6만9천 평) 일부러 국가정책으로 특정한 산에 나무를 심는다 해도 여의도 공원의 200배나 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숲을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어리석은 자의 우직함이 세상을 바꾼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심은 수많은 희망의 씨앗 덕분에 왕가리 마타이는 2004년 10월 8일 노벨 평화상을 받습니다. 그녀는 이 영예를 안은 첫 번째 아프리카 여성입니다.” (p.37)
왕가리 마타이는 아프리카 여성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인위쩐은 불모지 사막 숲을 이루어 내는 기적을 만들었다.
그들은 ‘어리석어 보였지만’ 결코 어리석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우직함’이 세상을 바꾸었다. 모두가 가는 ‘편한 길’, ‘안정적인 자리’에 연연했다면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실패가 뻔히 보이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았다. 벌거숭이가 된 땅에 묘목을 심었다. 저주의 땅으로 보이던 사막 한 가운데 묘목을 심었다.
꿈을 꾸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공무원 시험과 각종 임용 시험에 매달리는 한국이라는 곳은 분명 기형적인 곳이다. 가장 활발하게 꿈을 이야기 하고 이것저것 실패와 몸부림 쳐보고 우왕좌왕 하며 꿈을 설계해야 할 젊은이, 청소년들이 다들 ‘안정’과 ‘안정된’것만을 찾는다. 꿈꾸는 사람들이 없다면 사회는 바뀌지 않는다. 우직하게 자신의 꿈과 길을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을 내딛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없다면 사회는 결코 발전하지 않는다.
왕가리 마타이처럼 인위쩐처럼 꼭 그렇게 살라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내가’ 생각하는 ‘나’의 길과 ‘나’의 꿈은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주변 사람들이 나의 인생을 책임질 수 없다.
수능을 치고 대학에 입학하기 전 아이들에게 꼭 왕가리 마타이의 인생을 소개해야겠다.
‘어리석은 자의 우직함’이 결코 허황된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왕가리 마타이처럼 3천만 그루의 나무를 심지 못하더라도, 인위쩐처럼 여의도 200배 크기의 숲을 만들지 못하더라도 자신만의 나무를 심는 신실함과 용기를 꼭 가져주기를 부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