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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블로이드 전쟁 - 황색 언론을 탄생시킨 세기의 살인 사건
폴 콜린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양철북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며칠 전 주진우 시사IN기자의 구속영장청구에 대한 기사를 봤다. 주요 외신들이 이 사건을 기사화하며 코미디 같은 한국의 상황을 비꼬기도 한 모양이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권장하는 사회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싫어하고 마음대로 떠드는 것에는 발작을 일으킨다. 지난 5년 동안 이명박 정권에서 한 일 중 지금 가장 큰 성과를 나타내고 있는 것은 언론정책이다. 방통위와 주요 방송의 요직에 낙하산으로 인사를 집어넣어 장악했다. 이미 틀어진 언론의 환경에 기름을 들이부었다. 효과는 지난 대선에서 그대로 나타났고 이제는 TV만 틀면 지겹게 뉴스를 볼 수 있고 넘쳐나는 신문들로 숨이 막힐 지경이다. 언론의 사명 같은 것은 사장된 지 오래다. 돈줄을 쥐고 있는 기업에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는 해결될 리 만무하고 MBC조합원들은 아직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
요 며칠 핫이슈가 되고 있는 윤창중씨 사건도 그렇다. 정확한 팩트에 기반한 뉴스를 전달하고 수사를 촉구하는 것으로 갈무리하면 될 일을 이리 볶고 저리 볶아 뉴스 피로도를 높인다. 그러면 듣기만 해도 짜증나는 이런 뉴스를 계속 내보내는 이유는 뭘까? 전적으로 개인적인 생각임을 먼저 밝히고, 다른 뉴스를 묻어버리기 위함이다. 남양사태, 국정원 댓글부대 수사 등 산적한 사안을 일거에 덮어 버릴 수 있는 호재다. 어느 쪽에는 분명히 그렇다.
결국 우리는 미디어가 만들어 내는 2차정보를 접하게 된다. 바쁜 출근 시간에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뉴스를 검색하면서 그 기사 전체를 읽을 여유가 없다. 한 줄의 기사 제목만 보는 것이다. 말도 그렇지만 글을 더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단어 하나, 단어의 위치 하나에 따라 내용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런데 한국에서 생산되는 뉴스의 제목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이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제목만 보고 클릭을 해 들어가면 전혀 엉뚱한 내용의 기사인 경우도 있고 제목은 부정적인 듯 하지만 기사 내용은 긍정적인 경우도 있고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뉴스를 생산하고 가공하는 일을 하는 미디어 종사들에게는 특별한 사명감을 요구한다. 공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의 미디어 종사자 대부분에게 이런 사명감은 아웃 오브 안중!!
조중동은 뭐 말할 것도 없고 지상파 TV매체는 완전히 언론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봐야 한다. 정치와 경제 권력에 완전하게 유착된 언론은 이미 언론이 아니다.
그런 언론이 할 수 있는 일은 선정성이다. 보다 더 자극적이고 강렬한 것을 찾는다. 언론이 자신들만의 고유한 가치를 가지고 자신들만의 색으로 뉴스를 전달해야 하는데 다들 비슷하다보니 다들 질적으로 하향평준화가 되는 것이다.
한국의 언론환경에서는 어떤 매체가 ‘옐로 저널리즘’이라고 특정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매체가 그쪽으로 가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이 책 「타블로이드 전쟁」은 이런 ‘옐로 페이퍼’들이 난립했던 20세기 초 뉴욕을 배경으로 한다. 소설이지만 르포르타주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500달러 포상
<월드>는 토요일과 일요일 이스트 강과 할렘 강 근처에서 발견된 남자 시체 토막에 관한 미스터리를 정확히 푸는 사람에게 500달러를 금화로 지급할 것입니다. 사건에 대한 가설이나 추측을 봉투에 “살인 사건 미스터리”라고 표시해서 <월드> 사회부 편집장 앞으로 보내십시오. 반드시 <월드>에만 보내야 합니다. 다른 신문에 같은 해법이 게재된다면 포상금 지급이 취소됩니다. (p.56)
<월드>, <헤럴드>, <이브닝 텔리그램>, <프레스>, <이브닝저널>, <브루클린 이글> 등 뉴욕을 배경으로 한 수많은 신문사들은 난립하는 그들의 숫자만큼 고약한 싸움을 이어갔다. 굴든수프라는 남자의 시체가 토막 난 채 강에 버려진 사건을 두고 이들이 벌인 악취 나는 경쟁에 속이 더부룩해 진다.
“경찰은 아직 이 사건에 착수하기 전이지만, 다른 누군가는 이미 뛰어 들었다는 것을 캐리는 알게 되었다. 기자들이었다.” (p.31)
“죽은 사람 손이 신문 지면에서 튀어나와 독자들의 멱살을 잡을 것 같았다.” (p.44)
이들에게는 토막 난 시체 사건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다른 신문사보다 더 빠르게 더 자극적이게 기사를 내보내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당시 퓰리처의 명성을 뛰어 넘으려 발버둥을 치던 <월드>의 허스트로 인해 이러한 진흙탕 싸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경찰보다 더 빨리 정보를 캐내고 급기야 수사본부 까지 만들어 직접 정보원을 고용하거나 증인을 찾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서로를 이기려 안간힘을 썼다.
온갖 불확실한 정보와 제보가 난무했고 이들 ‘옐로 페이퍼’들은 그것을 이용했다. 상대 신문사보다 좀 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제목만 달아버리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 정보와 제보가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는 중요한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만약 전혀 확인되지 않은 정보라고 한다면 간단하게 정정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니 냄비에 물을 붓고 멈추지 않고 물을 끓이는 것처럼 가열에 가열을 거듭했다. 브레이크가 파열된 폭주기관차처럼.
책에서 굴든수프를 살해한 피의자를 잡아 놓고 벌인 법정다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도 이들 ‘옐로 페이퍼’들은 굿판을 벌인다. 증언한 내용 한마디 한마디 표정 하나 하나 놓치지 않고 기사화 한다. 기사라고도 할 수 없는 것들을 신문에 실었다.
오리 발자국으로 추적한 살인이라고 <헤럴드>는 외쳤다.
죽음의 집! <월드>가 소리 높였다.
무시무시한 남녀! <프레스>가 덧붙였다. 뉴욕 신문들의 주 메뉴는 여전 했다.
100년 전 뉴욕의 상황이나 지금 한국의 상황이 크게 다른 것 같지 않아 씁쓸한 마음 감출 길이 없다. 오늘 아침 이 서평을 쓰기 전(새벽6시 경) 오늘자 뉴스의 헤드라인을 훑어봤다. <헤럴드>와 <월드>와 <프레스>의 그 헤드라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제목으로 가득했다. 기사거리가 되지도 않는 것에 지면을 낭비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여론을 주도하고 있다고 하는 착각이다. 그들 스스로는 그런 생각을 하고도 남는 것이 당연하다. 작년 대선 시즌 SNS에서의 여론과 실제 여론에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SNS라는 것이 결국 그들만의 리그에 불과하다는 것을 한 번 경험한 ‘예로 미디어’들은 이제 더 이상 겁먹을 대상이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뉴스를 쏟아낼수가 있다. 그렇게 마음대로 휘갈겨도 착하디착한 국민들은 ‘그런가 보다~’하고 넘어가니까.
“허먼 낵은 이름이 알려져서 배달 일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1903년, 굴든수프가 살해되고 거의 6년이 지난 뒤에, 허먼 낵은 조용히 배달마차를 커낼 가에 버려두고 허드슨 강에 몸을 던졌다.” (p.369)
굴든수프 사건은 사람들에게서 잊혔다. 그렇게 난리를 치던 신문들은 굴든수프 사건보다 더 자극적이고 선정적이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것으로 눈을 돌렸다. 이제는 ‘우리가 그런 기사를 쓴 적이 있었나?’ 잊어 버렸다. 하지만 그런 기사들로 인해 실제적인 고통을 받았던 사람은 시간이 지나도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요즘 한국의 언론, 미디어 환경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워낙 발달한 인터넷 환경과 굴절된 정치적 환경은 특정 기사에 등장하는 한 사람의 신상을 단 몇 시간 만에 만천하에 까발릴 수 있는 지경이다. 인격을 말살시키고 사회에서 매장시키는 데 손가락 몇 번 클릭하면 된다. 무섭고 저급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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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사망한 뒤에 퓰리처는 역사적 기억 속에서 새롭게 탄생했다. 황색 언론 전쟁은 잊히고, 컬럼비아 대학에 재산을 기부하고 작가와 기자들에게 주는, 그의 이름이 들어간 상이 제정되어 장밋빛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허스트는 반성할 줄 몰랐다. 허스트는 황색 혁명이 길러 낸 블록버스터 일요판 신문에서 늘 희열을 느꼈다.” (p.391)
퓰리처상으로 유명한 그 퓰리처가 황색 미디어 전쟁의 당사자였던 그 퓰리처라는 것을 몰랐다. 그의 사망 후 퓰리처상이 제정되고 수상되면서 지금의 퓰리처는 전혀 다른 언론인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 한국의 언론 환경에서 한창 옐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언론인들이 100년 뒤 어떤 역사로 기록될 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