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처럼 단단하게
옌롄커 지음, 문현선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을 엄청 재미있게 봤다. 한국의 현대사에 대해 유독 관심이 많은 내게 이 영화는 대단한 의미였다. 임상수 감독 특유의 블랙 코미디는 10.26사건 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가진 영화를 피식피식 실소하며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철저한 역사적 고증을 바탕이 되었는데 오히려 그것이 더욱 말도 안 되는 것이 많아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난다. 18년 동안 군림해온 독재자가 하루아침에 죽었다. 영화에서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총을 발사한 다음부터 더 재미있다. 왕처럼 군림한 독재자가 죽었는데, 그 엄청난 사태를 대하는 1국의 위정자들이 보이는 태도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제 한 몸 지키려고 몸부림치는 자, 그 상황에서도 정치적 이해타산을 따지는 자, 각하의 은밀한 부분의 노출을 가리고자 모자를 벗어 덮어주는 자 등. 전시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를 대하는 그들의 꾸밈없는 속살에 피식피식 실소가 터져 나온다. 오히려 독재자 아래 신음하던 국민들은 그래도 나랏님 돌아가셨다고 대성통곡한다. 정말 슬프게 안타깝게 불쌍하게 운다. 하지만 1국을 움직이고 1국의 방향을 잡아가야 하는 자들은 국가 위기고 나발이고, 비상사태고 나발이고 바보짓만 해댄다.

 

이 책 「물처럼 단단하게」는 사실 제목만으로 충분하다. 물이 단단할 수 있나? 물론 목욕탕에 가면 사우나 앞에 폭포수가 어김없이 있다. 버튼을 꾹 누르면 정말 폭포수와 같은 높은 수압의 물이 머리 위로 쏟아지는데 그런 물을 맞으면 아플 만큼 단단하기는 하다. 하지만 ‘물처럼 단단하게’는 이율배반이다. 말이 안 되는 말이다. 그런데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이나 이 책 「물처럼 단단하게」보다 더 말이 안 되는 말이 많고 말이 안 되는 일이 많이 일어나는 곳은 우리의 일상이다. 단지 우리가 너무 바쁘고 신경 쓸 겨를이 없어서 인지하고 있지 못할 뿐이다.

 

중국 공산군의 대장정을 마친 것으로 보이는 주인공 가오아이쥔은 제대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대장정을 통해 혁명 군인이 되었고 중국 공산군의 혁명 사상에 완전히 도취되었다. 당시 중국의 젊은이들에게 마오주의는 유럽의 젊은이들을 열광시킨 맑스·레닌주의 이상이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봉건제의 사슬을 끊어낼 수 없었던 중국의 젊은이들은 자연스럽게 마오주의에 경도되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공산당에 입당하거나 공산군에 입대하였다. 가오아이쥔 마찬가지였다. 군 생활은 마쳤지만 이 젊은이에게는 고향을 혁명시키고자 하는 불꽃같은 의지가 있었다. 비록 군에 입대한 이유가 지역 유지인 장인이 ‘군에 다녀오면 진의 간부로 일하게 해주겠네’라는 말에 혹 해서 그런 것이었지만, 이유야 어쨌든 그는 이제 혁명 투사가 되었다. 애초에 자신과 같은 찢어지게 가난한 남자에게 시집 온 그의 아내 구이즈는 못생긴 외모만큼이나 성격도 그와 맞지 않았다. 세상을 뒤흔들 혁명가이기는 하지만 아내에 대한 증오는 바뀌지 않는다. 혁명 완수를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에게 훙메이가 나타난다. 우연히 철길에서 만난 가오아이쥔과 훙메이는 단번에 사랑에 빠진다. 둘은 유부남, 유부녀다. 혁명 아래서는 불륜도 혁명이 된다. 혁명을 위한 동인이 된다. 흠……. 혁명이니까…….

 

 

“맹렬한 사랑과 혁명이 그렇게 폭풍우처럼 시작되었습니다.” (p.50)

“아이쥔, 우리가 미친 걸까요?”

“훙메이, 우리는 혁명과 교제하고 혁명과 사랑하는 것이지 절대 미친 게 아니에요.” (p.166)

 

폭풍우처럼 시작된 그들의 혁명은 깊어져 갔다. 본디 혁명이란 널리 알리고 더 많은 사람에게 선전하고 선동해야 하는 것임에도 그들의 혁명은 너무 소중하고 너무 애달팠나 보다. 그들 자신조차 자신들이 미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그렇게 맹렬한 혁명에 빠져들었다.

 

 

“아내는 일어나서 짐을 받지 않았습니다.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미래의 혁명가이지 농촌 정치가라는 것을 알지 못했지요” (p.57)

“아버지는 혁명을 할 거란다. 혁명이 성공하면 매일 카스텔라를 줄게.” (p.70)

 

하긴 마오 주석의 뒤를 이어 장차 적어도 현의 성장이나 당 서기쯤은 가뿐히 될 자신에게 아내 구이즈는 진의 간부가 되기 위해 필요한 도구에 불과했다. 못생긴 것에 더해 자신의 혁명에 불타는 자유로운 성애의 표현을 벌레 보듯 본 그녀는 혁명 완수를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목숨을 건 대장정을 마치고 온 미래 혁명가에게 장인과 아들은 카스텔라를 주는 자에 불과했고 아내에게는 돈 벌어다 주는 가장에 불과했다. 어찌 이런 자들과 혁명을 논할 수 있겠으며 혁명 완수를 위해 목숨을 나눌 수 있었겠나.

 

 

“저희는 위대한 혁명을 하는 동시에 초라한 밀애를 즐겼습니다.” (p.260)

 

가오아이쥔은 훙메이에게 빠져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훙메이와는 모든 것이 통했다. 성애를 나누는 것부터 혁명 완수를 위한 방향과 방법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아내 구이즈와 달랐다. 아내 구이즈가 집에서 자살을 하게 되고 가오아이쥔은 진 간부가 되지만 훙메이와의 밀애는 끊지 못한다. 작가의 표현대로 위대하지만 초라한 밀애였다.

혁명 완수를 위해서 둘의 밀애는 절대로 들키지 않아야 했다. 블랙코미디다. 가오아이쥔은 마음 놓고 훙메이와의 일을 치르기 위해 땅굴을 판다. 자신의 집에서 훙메이의 집까지 직접 땅굴을 파서 밖으로 나갈 필요도 없이 땅굴 안에서 그들만의 혁명 신방을 차린 것이다. 낮에는 촉망받는 당의 젊은 간부로 혁명을 부르짖고 밤에는 훙메이와의 밀애를 위해 흙먼지를 뒤집어 쓴 발정 난 수캐가 되었다.

 

 

“지하 통로의 자연적인 울림 덕분에 행군 대열의 구호가 나오기만 하면, 주요 혁명 지도자의 강연이나 최신 혹은 최고 지시가 나오기만 하면, 그럴 때면 저와 훙메이 모두 참을 수 없게 되었지요.” (p.371)

 

그들의 밀애는 작가에 의해 과도하게 자세하게 묘사된다. 어릴 때 얼굴을 온통 붉히며 읽었던 「돈 쥬앙」의 그런 자세한 묘사와는 다르게 대단한 혁명적 거사를 치르는 듯한 묘사다. 쓸데없이 마오 주석의 말을 옮기기도 하고 유별나게 혁명…….혁명을 들먹인다. 초라한 밀애와 불륜을 위대한 혁명으로 포장하기 위해서 그들은 스스로 혁명에 취해야 했다. 심리적으로 취하고 나니 몸까지 그렇게 따라 갔다. 가오아이쥔은 수개월에 걸쳐 땅굴을 완성해 이제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들킬 염려도 없이 훙메이와 땅굴 신방에서 마음껏 일을 치를 수 있게 되었는데, 아뿔싸!! 훙메이의 남편 청칭둥이 평소 고생했던 ‘고개 숙인 남자 병’이 생겼다. 그런데 땅굴 신방에 마련해 둔 라디오에서 혁명 행군 대열의 구호가 나오거나 혁명에 대한 연설이나 지시가 나오면 이 병은 갑자기 씻은 듯이 낫게 되었다. 갑자기 반금련의 서문강처럼 옹녀의 변강쇠처럼 그런 엄청난(?) 남자가 되었다. 웃기는 일이다. 손으로는 온갖 지저분한 일을 하고 있으면서 얼굴은 천사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책의 저자 옌롄커는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이런 조롱과 풍자를 늘어놓는다. 이 책이 중국 내에서 과도하게 검열을 많이 받고 당국의 견제를 받기도 하고 일부 내용이 삭제가 되기도 한 것은 순전히 작가의 이런 조롱과 풍자 때문이다. 명목 상 지나친 성애의 표현이 이유가 되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혁명에 대한 조롱이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여전히 마오쩌둥은 그들에게는 영웅이고 중국 공산당은 거대 중국을 이끌어 가는 가장 큰 힘이다. 그런데 옌롄커는 가오아이쥔을 통해 대장정과 대혁명을 비꼰다. 가오아이쥔에게 혁명을 거저 자신의 출세를 위한 동아줄에 불과했고 훙메이와의 초라한 밀애를 유지하기 위한 둘만의 자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오아이쥔과 훙메이에 의해 혁명을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전락했다. 서두에 말한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을 통해 박정희라는 독재자가 사망한 10.26사건과 그 이후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블랙 코미디가 된 것처럼.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때 그 사람들』영화를 볼 때 터져 나왔던 그 조소가 여전히 튀어나왔다.

 

 

“어떤 사람은 영화를 틀다가 잘못해서 필름을 거꾸로 끼우는 바람에 주석님 머리가 바닥을 향해 유기징역 20년을 선고 받았고. 당신 딸이 목을 맸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몇 번이나 총살을 당했을 거요.” (p.242)

“그녀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허리 높이의 돌기둥에서 뛰어내렸어요. 하지만 그때 눈처럼 희고 피처럼 붉은 따귀 소리가 제 왼뺨에서 울렸습니다.”

“당장 돌아가거라! 또 소란을 피우면 이 패방에 머리를 부딪고 죽어버릴 게다!”

“········.” (p.138)

 

혁명은 때로는 아주 우스운 꼴이 되고는 하는 것 같다. 목숨을 걸고 민주화 운동, 노동자 운동을 하던 이가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욕하고 잡아 죽일 듯 덤벼들던 저쪽 패거리에 기어 들어가는 꼴이 이 땅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혹자는 박쥐라고도 하던데 최소한 박쥐는 깊은 밤에도 장애물을 멋지게 피해가며 비행할 수 있는 감각을 지녔다고 하는데 여의도 이슬람 궁전과 같이 생긴 건물에 틀어 박혀 있는 양반들은 온 몸으로 돌진하는 감각 없는 박쥐들인 가 보다.

혁명을 위해, 아니 자신의 출세를 위해 혁명을 부르짖고 핏대를 세우며 벽진 고향 마을의 봉건 잔재를 깨기 위해 나선 그에게도 어머니는 넘을 수 없는 벽이었던 가 보다. 어머니의 벼락같은 꾸지람 한 마디에 혁명이고 나발이고 눈 녹듯이 녹아내렸다. 진짜 웃기다. 이 참을 수 없는 혁명의 가벼움이란…….

 

가오아이쥔은 출세를 위해 혁명을 부르짖으면서도 훙메이와의 불륜 유지를 위해 그의 남편 청칭둥을 죽이기에 이른다.

운이 좋았던 탓인지 능력이 있었던 탓인지 훙메이를 만난 것이 복이었던 탓인지 가오아이쥔은 당과 현의 간부들에게 인정받는 젊은 혁명가로 불리게 되었다.

 

 

“왕 진장과 그의 고향인 왕자위 대대의 여자 지부 서기 자오슈위 사이에 모종의 남녀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 (p.438)

 

진의 간부로 승진하게 되고 현의 간부들에게도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가오아이쥔은 당의 중심으로 점점 들어간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젊은 당원 동지들에게 인정을 받고 전체 당에서도 주목받는 진장이 가오아이쥔과 훙메이처럼 모종의 불륜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첩보를 얻게 된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이 공식으로 가오아이쥔은 왕 진장을 밀어 낸다. 그러면서도 훙메이와의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로맨스라 포장된 불륜은 계속해서 이어 간다.

 

 

“눈물을 흘리는 훙메이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따귀를 한 대 때릴 수 없다는 게, 물어뜯을 수 없다는 게 한스러웠습니다. 그녀 때문에 저희 일이 드러난 것도 있지만 그보다 2-3일만 더 있었다면, 어쩌면 딱 하루만 더 있었다면 저는 현장으로, 그녀는 부현장급인 여성연합회 주임으로 공표되었을 게 더 큰 이유였습니다.” (p.576)

 

결국 그들만의 땅굴 신방이 당에 의해 발각이 되고 둘은 혁명의 이름으로 숙청 된다. 가오아이쥔이 그토록 외쳐대고 포장하고 불륜을 포장하기 위해 사용하던 혁명의 이름으로 말이다. 현의 현장 자리를 눈앞에 두고 숙청 당한다. 훙메이가 자신의 집 쪽으로 뚫린 땅굴의 입구를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해 발각된 것이다. 현장 자리 앞에서 훙메이는 가오아이쥔의 죽은 아내 구이즈 정도로 내동댕이쳐진다. 따귀를 한 대 때리고 물어뜯어서 되돌릴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 더 절망적이었을 거다.

 

사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독재와 유신, 운동권과 386세대 따위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저 외부 자극을 통해 얻게 된 정보와 지식이 전부다. 그래서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서 독재자의 죽음에 통곡했던 사람들의 눈물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이 책 「물처럼 단단하게」에서 가오아이쥔이 그토록 부르짖었던 혁명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우유부단하고 이리저리 휘둘렸던 그 사람들이 이해는 된다. 나였더라도 그랬을 것 같다. 비루한 혁명은 그 물살도 기운이 없기 마련이다. 단지 그들이 어떤 간판을 내걸고 뛰어들었던지 간에 혁명은 혁명대로 그것만으로 평가받고 역사의 심판대에 서야 한다. 가오아이쥔이 현장이 되고 나서도 훙메이와의 불륜을 계속했을 것인지 알수는 없지만 그렇게 자위하고 최면을 걸어 혁명을 위한 마음과 몸까지 그렇게 맞춰진 것처럼 이후의 혁명도 그렇게 혁명, 혁명 하며 맞춰갔을 것이다.

 

누구보다 단단하고 싶었지만 동네 초라한 개울물만큼도 기운차지 못했던 가오아이쥔의 모습을 보며 그저 조소를 던지며 어이없어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차라리 가오아이쥔이 솔직하다. 혁명을 완수해 가면서 출세도 하고 사랑도 하고. 뒤로는 온갖 일을 다 해대면서 앞으로는 깨끗한 척하는 무뢰배들보다 낫다.

 

 

“혁명가의 발걸음 소리에 개들이 놀라 몇 번 짖었지만 이내 조용해졌습니다.” (p.571)

 

아… 예… 어련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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