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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창원, 보수의 품격
표창원.구영식 지음 / 비아북 / 2013년 2월
평점 :
아내는 미드(미국드라마) 마니아다. 미드 중에서도 범죄·수사물 마니아다. SVU, CSI, NCIS, 멘탈리스트, 캐슬, 본즈, 크리미널 마인드 시리즈는 결혼 후에도 놓치지 않고 보는 마니아 중의 마니아다. 요즘에는 수요가 많아서인지 케이블에서도 자주 이런 미드를 시리즈로 방송한다. 대부분 종료된 시즌의 에피소드이기 때문에 아내는 케이블에서 방송되는 에피소드 몇 장면만 보면 무슨 내용인지 단번에 알아맞힐 정도다. 저렇게 많은 종류가 있고 이 미드들은 자체적으로 시즌이 10이 넘어가는 것도 있는데 얼마나 좋아하고 마니아인지 내용에 더해 정확한 범인과 결과까지 알아맞힌다. 기가 막히다.
나는 전혀 관심이 없는 장르라 처음에는 보기 싫지만 아내 기분 맞춰 주느라 앉아서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이게 보면 볼수록 빠져 들었다. 재미있었다. 쪽대본이 판치는 한국의 드라마와는 많은 차이가 나는 것이 사실이었다. 물론 연기나 구성은 한국 드라마가 낫다고 생각하지만 기술적인 부분은 차이가 많이 난다. 나는 미드 중에서도 SVU을 가장 좋아한다. 다혈질이지만 인간적인 형사 엘리엇(크리스토퍼 멜로니)을 좋아했는데 지금은 출연하지 않아 아쉽다.
미드 마니아인 아내를 통해 첨단 수사 기법과 이미 외국에서는 보편화되었고 국내에서도 발전이 많이 된 프로파일링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표창원 교수도 알게 되었다. 아내가 호들갑을 떠시며 ‘저 사람 정말 좋아~!! 멋있지? 말도 너무 잘하시고~! 저 분이 국내 프로파일링의 선구자야~’ 라며 TV를 향해 하트를 뿅뿅~ 날리는 것이 아닌가. 나는 참았다. TV에 나오는 늘씬하고 예쁜 연예인을 보며 입을 헤벌레 해서 있다가는 아내에게 등짝을 맞을 수 있지만 아내는 연예인의 복근과 수현이와 중기, 인성이를 보고 ‘멋있다~’를 남발해도 아무 상관은 없다ㅡ.ㅡ
‘표창원? 누군데 그래?’라며 봤다. 너무 말을 잘 해서 정이 가지 않았다.(아내가 좋아해서 질투 따위 하는 건 절대로 아니다) 외모도 너무 차갑게 생겼고 눈매도 과도하게 매서워 정이 가지 않았다.(아내가 좋아해서 질투 따위 하는 건 절대로 아니다) 그런데 이 사람, TV에 너무 많이 나왔다. 뉴스에도 나오고, 시사 프로그램에도 나오고, 범죄와 관련된 프로그램에는 모조리 나오는 것 같아 정이 가지 않았다.(아내가 좋아해서 질투 따위 하는 건 절대로 아니다)
뭐, 내가 아무리 정이 가지 않더라도 인정할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말을 너무 잘했다. 조리 있고 이해하기 쉽게, 그리고 자신이 하는 말에 힘을 더하는 톤과 특유의 어조가 있었다. 이 사람이 다단계 사장이라면 나를 30분 만에 열혈 다단계 투사로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TV에 많이 나오는 것을 보면 그 분야에 있어서 권위자임은 틀림없어 보여 보였다.(아내가 좋아해서 질투 따위 하는 건 절대로 아니다. 흠…….;;)
표창원이라는 사람이 갑자기 뜨거워 졌다. 작년 말 대선 기간 중 폭발했다. 국정원 불법 댓글 사건에 대해 소신을 밝히며 글을 올리고 그 과정에서 경찰대 교수라는 직을 던졌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보수를 비판하는 보수주의자로 대선 판의 마지막을 뒤흔들었다. 사람들, 그 중에서도 젊은 사람들은 표창원 교수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미적지근하던 야권의 단일화 과정에 염증이 더해지던 찰나에 표창원의 등장은 새 시대를 향한 투신으로 비쳤다. 하지만 대선은 그와 그를 지지하고 응원한 이들의 염원대로 향하지 않았다. 대선 전과 이후 표창원 교수를 향해서 지지도 폭발했지만 비판과 곱지 않은 시선도 폭발했었다. ‘정치를 하려는 것이 아니냐? 다된 밥에 돼 재를 뿌리냐? 도대체 무슨 의도냐?’ 등등.
대선 후 그는 계속해서 사람들은 만나고 있다고 한다. 그가 생각하는 한국의 보수와 한국사회에 필요한 정의에 대한 담론을 나누고 있다고 한다.
이 책 「표창원, 보수의 품격」은 궁금했던 표창원 교수의 지난 대선 과정의 행보와 그의 생각 전반을 전해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인터뷰를 엮은 형식이라 대화하는 것 같았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아주, 아주, 아주 조금 가지고 있었던 질투가 완전히 없어진 계기도 되었다. 흠…….^^;;
“나는 보수주의자다. 보수가 제대로 형성되고 구축되고 자리 잡기를 원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진보를 인정하고 보수와 진보가 건전하게 경쟁하는 사회가 됐으면 한다.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보수의 본래 모습을 왜곡시킨 그들은 빨리 현실을 인정하고, 반성하고, 가지고 있는 것 중에 내놓을 것은 내놓고, 사회할 것을 사죄해야 한다.” (p.119)
사실 한국 사회에는 제대로 된 보수와 제대로 된 진보가 없다. 내 평소 생각이다. 이 책에서 표창원 교수도 동일한 시각을 보인다. 왜곡되고 굴곡진 한국의 현대사로 인해 보수와 진보 진영이 이상하게 뒤섞이고 무한 재편되면서 진영의 토양 자체가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다. 그래서 보수는 보수대로 진보는 진보대로 자신들의 진영에서 토대를 다지고 발전시키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단지 선거를 위해 당선을 위해 합치고 나뉘는 일만 반복했을 뿐이다. 더군다나 친일과 독재를 거치며 제대로 된 역사 청산을 하지 못한 것이 더해져 수구와 종복 빨갱이만 존재하는 기상천외한 진영 스탠스가 짜여졌다.
“왜 대한민국의 보수는 이 지경이 되었을까? 당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리고 싶은 치부가 많아 과거를 조작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들을 비판하면 먼저 입을 막으려 한다.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위협한다. 그렇게 이 땅의 자칭 보수주의자들은 권력을 연명했다.” (p.10)
표창원 교수는 자신이 보수주의자라고 하면서 먼저 자신이 속한 한국의 보수 진영에 대해 비판한다. 인터뷰를 진행한 구영식씨가 진보 진영에 대한 비판을 주문하자 그는 ‘내가 보수주의자이기 때문에 먼저 보수주의를 비판하는 것이 옳다. 그것이 순서다.’라는 말하는데 맞는 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실 한국의 현실에서는 제대로 되지 않았던 부분이다.
그를 통해 한국의 보수가 왜 수구꼴통으로 전락했는지 명확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그간 나는 이른바 진보 진영에 속한 사람들의 시각에서만 한국의 보수를 인식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제대로 된 보수주의자의 눈에 비친 한국의 보수의 속살이 더욱 설득력이 있었다.
당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한국의 보수가 수구가 되었다는 표창원 교수의 지적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가리고 싶은 치부가 많고 그것을 자꾸만 들먹이는 진영을 빨갱이로 덮어버린다. 빨갱이는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의 지적대로 여전히 한국 사회에는 한국 전쟁을 겪거나 그것의 직·간접적 공포를 체험하거나 전해들은 사람들이 많다. 그들에게 빨갱이는 절대악일 수밖에 없다. 한국의 보수는 자신들이 쌓아 온 기득권의 뿌리가 정당하거나 가치판단에 있어 대부분 옳지 않기 때문에 두렵다는 것이다. 격하게 공감했다.
한국전쟁 이후 6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러한 공식이 먹히는 곳이 한국이기 때문에 한국의 보수는 옳은 것을 지키고 수호하는 진정한 보수의 모습을 가지지 않고 수구로 살아도 그들의 기득권을 연명할 수 있었다. 굳이 들먹여서 좋을 것 없는 데 나서서 ‘내가, 우리 진영이 이런 거 그리고 저런 거 잘못했소.’ 이실직고 할 보수를 찾기는 어렵다.
“보수의 품격으로 평화, 신사 등을 꼽았는데 한국의 보수는 어떤가?” (p.103)
“국민 세금으로 대학 4년을 공짜로 다녔고, 경찰 간부라는 혜택도 누렸고, 유학도 다녀왔다. 그래서 나는 당연히 국가와 국민들로부터 받은 혜택에 보상해야 한다는 대단히 엄중한 채무 의식에 시달리고 있었다.” (p.43)
책의 제목대로 표창원 교수는 한국의 보수가 품격을 갖출 것을 주문한다. 케케묵은 반공 논리와 떳떳하지 못한 과거를 덮어두는 것에만 급급한 비겁한 모습이 아니라 인정할 것은 인정할 줄 알고 잘못한 것은 사과할 줄 아는 보수가 되기를 주장한다.
80년대 국립대학인 경찰대를 나오고 경찰 간부로 생활하고 국비로 영국 유학을 다녀 온 그의 삶에 대해, 그는 당연히 돌려줘야 할 혜택이고 채무의식이라고 한다. 그 타이밍이 지난 대선 정국에서 국정원 여직원 댓글 사건에 의해서 터진 것이다. 분명 아닌 일이고, 잘못된 법 집행임에도 불구하고 사정기관과 사법기관은 물론 언론이 합심해 입 다물고 있는 상황이 그에게는 견디기 힘들고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고 한다.
조금만 제대로 살펴보면 할 말이 많을 텐데 모두가 가만히 입 다물고 있는 상황. 그는 제대로 된 보수주의자의 목소리를 내고 싶었던 것 같다. 이후에 있을 온갖 비난과 비아냥거림, 오해와 왜곡에도 불구하고 가장 극적인 타이밍에 말이다. 어떻게 보면 참 대책 없는 사람 같기도 하다. 가만히 입 다물고 있으면 그가 가진 권위자로서의 지위와 명예, 학자로서의 대우, 안정을 확보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참 바보 같기도 하다. 나 같으면 인터넷도 안 하고 SNS도 안 하고 입 다물고 얼른 선거가 끝나기만을 기다렸을 텐데…….
“우리가 정말 자유민주주의국가고 보수라고 얘기한다면 그 본질이고 근간인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는 절대적으로 지켜내야 한다.” (p.141)
“제대로 된 보수, 진정한 보수, 합리적 보수가 갖추어야 할 핵심 역량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이 역시 소통능력, 즉 대화와 설득이다. 지금 한국 보수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그거다.” (p.223)
표현의 자유, 소통, 대화와 설득. 사실 이러한 것들은 보수뿐만 아니라 진보라 자칭하는 사람·조직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이제껏 이런 개념들에 소홀했기 때문에 한국에 제대로 된 보수도, 진보도 없는 것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저 선거에 반짝 등장해서 당선만을 위해 판을 짜고 야합하고 쪼개지는 통에 소통하고 대화하고 설득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이 사실 아닌가. 표현의 자유?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이제는 정권에 조금 비판적인 말을 하거나 글을 쓰려 해도 스스로 ‘이러다가 잡혀가는 거 아냐? 고발이나 고소 당하는 거 아냐?’ 라고 자기검열을 한다.
표창원 교수는 한국의 보수가 먼저 이러한 일에 앞장서야 한다고 말한다. 분명 잘못된 것은 사과하고 묵은 반공 논리를 집어 던지고 다른 진영, 다른 의견일지라도 경청하고 소통하려는 노력. 진보 진영도 마찬가지다.
원론적인 얘기지만 새롭게 들리는 건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멋있고 어려운 말이나 글을 쏟아내는 것보다 원론적이지만 반드시 이러한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무슨 보수가 어떻고 진보가 어떻고……. 공염불 일 뿐이다.
“제3의 길을 실제 만들려고 했던 것이 안철수 교수였다면, 나에게 제3의 길은 새로운 세력의 등장이 아니라 기존의 진보와 보수가 반칙하지 않도록 하는 감시자 역할이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조정 역할, 협력 역할을 함께하는 거다.” (p.210)
대선 전과 이후 상황이 표창원 교수에게는 무척 힘들었을 거라 짐작된다. 책에서는 그런 넋두리는 전혀 없다. 단순히 이슈가 되기 위해서나 정치를 하기 위해 퍼포먼스를 한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해 보인다. 특히, 대선 이후 그가 보여 준 행보 그의 대선 전 행보에 대한 진정성이 담보된다.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그들과 이야기하고 논의하고 토론하며 감시자의 역할, 조정·협력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래서 앞으로 보여 줄 그의 행보와 입장이 어떠하든지 나는 표창원 교수를 지지하고 응원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겨레신문에 실린 표창원 교수의 광고다.
노회찬 의원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지면 광고다. 이것이 표창원 교수가 말한 보수의 품격이 아닐까 싶다. 수구세력이 빨갱이 종북세력으로 여기는 노회찬 의원에 대한 지지를 이렇게 공공연하게 밝힌 보수가 있었나?
나는 이런 보수주의자를 계속해서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