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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지메이커 혁명
베벌리 슈왈츠 지음, 전해자 옮김 / 에이지21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신영복 선생의 책에서『어리석은 자의 우직함이 세상을 조금씩 바꿔간다』라는 문장을 봤을 때 ‘이거구나~!’했다. 이후 좌우명처럼 삼고 20대를 보냈다. 신영복 선생과 비슷한 말을 하는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는 걸 보며 ‘뭔가 되겠구나~!’ 싶었다. 그렇게 바보 같고 우직한 사람들이 여전히 이 세상에 있고 그들로 인해서 더디지만 이 세상이 조금씩 바뀌어 갈 거라 기대했었다. 하지만 허망했던 지난 십여 년을 지내며 신영복 선생의 저 말이 희망고문에 불과하다고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세상은 변하지 않았고 우직하고 바보 같은 사람들은 그냥 그렇게 사라져 갔다. 여전히 이 세상은 어리석지 않고 우직하지도 않고 바보 같지도 않은 사람들이 꽉 쥐고 있을 뿐이었다. 그 어떤 것으로도 깨뜨릴 수도 부숴버릴 수도 없는 강철 같은 저 사람들에 의해 이 세상은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많은 말과 책과 권면과 힐링이 쏟아지는 데도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결국 세상을 주무르고 만들어가고 계획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렇게 어리석고 우직하게 바보같이 살려고 하는 사람들의 기록이 담긴 책을 만났다. 처음에는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넘쳐나는 처세술 따위를 기술하거나 어디서 짜깁기 한 듯한 내용의 경영계발서인 줄로만 알았다.
이 책 「체인지 메이커 혁명」은 종종 책의 제목만 보고 책의 내용을 판단하려고 했던 나의 아둔함에 뒤통수를 후려친 책이다.
“빈곤, 불평등, 부당함이라는 연못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는 변화의 물결” (p.42)
변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여전히 이 시대에도 이 세상에도 세계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 위로를 받았다. 존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속한 조직과 공동체, 국가를 그 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바꾸고 있는 실례를 책에서 접하고 놀라웠다.
전 세계적인 문제인 빈곤과 불평등, 부당함이라는 도저히 바꿀 수 없고 바꿀 엄두조차 나지 않는 잘못된 시스템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소개 받는 것이 여전한 멘붕 상태에서 허우적거리는 내게 힘이 되었다.
끝이 보이지 않고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큰 연못을 마주하면 두렵다. 시커먼 물속을 들여다보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 가만히 두면 그 두려움은 실체가 되기 마련이다. 작은 돌 하나라도 던져야 연못에 파문이 인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내가 사는 이 사회가, 이 세상이 조금 더 평화롭고 조화로우며 정의로웠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은 누구나 한다. 하지만 실제로 행동하고 작은 돌이 되어 거대한 연못에 파문을 일으키는 데까지 이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이 책에 소개된 18명의 체인지 메이커들은 진짜 대단한 사람들임에 틀림 없다.
“이 책은 특정 사회문제에 있어서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해결 방법을 제시한 우리 시대의 뛰어난 사회혁신가 18명에 관한 기록이다.” (p.11)
독일, 우르술라 슬라덴
“주택 단지 난방 발전소와 태양열판 설치를 시작으로 EWS는 자체 에너지의 일부를 생산하기 시작한다. 백 년간 지속되어온 독일 거대 전력회사들의 독점이 깨진 것이다.” (P.55)
지난 해 연말 전기요금과 가스요금이 갑자기 인상됐다. 그렇게 747을 외치던 지난 정권은 거듭된 정책 실패와 능력 부족을 만회하기 위해 공공요금만큼은 인상을 많이 하지 않았는데 정권 말기에 도둑질 하듯 5년 동안 묵혀두었던 것을 터뜨려 버렸다. 실제로 엄청나게 인상된 요금 명세서를 인터넷에 올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고 내려갈 때는 2원씩 많으면 5원씩 내려가는 기름 값은 올라갈 때는 10원씩 20원씩 올라간다. 모두가 독점적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늘 국외 경기를 들먹거리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독·과점적 구조이다.
백 년간 지속된 독일 거대 전력회사의 독점 구조를 깨뜨린 사람은 평범한 가정주부 우르술라 였다. ‘자체적으로 에너지를 생산하고 공동으로 소유해 공급할 수 없을까?’라는 그녀의 생각 하나로 EWS 라는 전력 회사를 만들었고 지금은 여러 국가에서 기술을 배워가고 벤치마킹하는 미래지향적 회사로 입지를 굳혔다.
‘국가가 요금을 올리는 데 뭘 할 수 있겠어?’가 아니라 ‘바꿔보자~!’라는 생각이 변화를 가져 온 것이다.
인도, 프라딥 쿠마르 시마 박사
“왜 인력거꾼은 자기 인력거를 갖지 못하는 걸까? 한번 떠오른 질문은 그 후로도 계속해서 프라딥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p.77)
나는 인력거를 타지 못했지만 인도에 사는 프라딥 박사는 인력거를 많이 탔다. 교통체증이 서울의 그것보다 심했으면 더 심한 인도의 거리에서 인력거는 꼭 필요한 교통수단이라고 한다. 인도에서 인력거를 이용하는 사람은 무수히 많은 것이다. 하지만 프라딥 박사처럼 저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몇 이나 될까? 그는 우연히 인력거꾼과 나눈 대화 이후 계속해서 이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분명 수많은 사람들이 인력거를 이용하고 인력거꾼은 그들의 정당한 노동을 수행하고 있는데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
“인도 가우하티에 본부가 있는 농촌진흥센터(CRD)의 사무총장인 프라딥 쿠마르 시마 박사는 전직 수의사이다. 그는 인도의 인력거꾼들이 대물림되는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그들이 끄는 인력거의 소유주가 되도록 은행 대출과 보험 보증을 이용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수천만 인력거꾼의 지위를 향상시켜 놓았다.” (p.75)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편하게 인력거를 이용하고 나서 다음에 또 이용하면 그만이다.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인력거를 타고 내리고 인력거를 대량으로 소유한 채 인력거꾼에게 부당한 처우를 하는 인도 마피아들에게 작은 돌을 던지려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없다. 하지만 프라딥 박사는 그렇게 했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고 시도하지 않았던 것을. 끄는 사람도 불편하고 타는 사람도 불편하기만 한 인력거를 인체공학적으로 개발해 보급하고 회사와 금융당국에 직접 보증을 서기도 하고 오랜 시간 설득하고 토론해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변화를 이끌어 냈다.
페루, 알비나 루이즈
“많은 사람들이 쓰레기를 문제로 보는 것과는 달리, 그녀는 기회로 보았다. 일자리를 창출하는 기회, 환경을 향상시키는 기회, 공중위생을 향상시키는 기회, 더 많은 사회 혁신가들과 정치 및 사업적 기업가들을 창출하는 기회” (p.164)
페루의 알비나 루이즈는 청운의 꿈을 안고 시골에서 도시로 상경한 아가씨였다. 잔뜩 기대를 갖고 시작한 도시의 생활은 며칠 만에 산산조각 났다. 그녀가 사는 곳이 너무 더러웠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내는 쓰레기가 제대로 처리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예전 상황처럼 시골에서 도시로 몰려온 엄청난 사람들은 제대로 된 도시계획 하에서 정착하지 못했다. 그래서 상·하수도는 물론 쓰레기 처리에 대한 시스템도 미비했다. 그리고 그녀는 발견했다. 자신이 사는 곳의 주요 골목이 쓰레기 수거 차량이 다니기에 너무 좁았던 것이다. 아주 간단한 문제지만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부분이다. 그래서 그녀는 기관과 행정 당국에 건의하고 아이디어를 제공해 도시의 골목골목을 누빌 수 있는 쓰레기 차량을 만들었다. 이후 남미의 많은 국가들에 이러한 기술과 아이디어를 제공했다고 한다. 처리되지 않은 넘쳐 나는 쓰레기들을 보고 ‘왜 이렇게 더러워~! 아이~ 냄새야~’라며 코를 잡은 채 인상 쓰고 지나가면 아무런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
독일, 안드레아스 하이네케
“‘다른 쪽으로 능력을 지는 사람들’을 ‘할 수 없게 된 사람들’로 만드는 것은 바깥세상이지 그들 자신은 아닌 듯하다. ‘정상적인’사람들은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힘을 빼왔다.” (p.243)
‘다른 쪽으로 능력을 지닌 사람들(the differently abled)’
이렇게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장애인을 보는 우리의 관점과 인식이 얼마나 폭력적이었나 돌아보게 되었다. 독일의 안드레아스는 그들을 보는 우리의 눈부터 바꾸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것도 하지 못하고 저것도 하지 못해 일일이 따라 다니며 도와줘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분명 ‘다른 쪽의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보는 전환이 필요하다.
“시력을 아주 잃은 이들과 약시인 이들로 구성된 안내자들은 어둠 속에서 방문객들의 눈을 뜨게 해줍니다. 그때 방문객들이 비로소 보게 되는 것은 시력을 잃은 이들의 세상이 자신들의 세상에 비해 그저 다를 뿐! 더 나쁠 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p.246)
“1988년 이래 35개국에서 열린 160회의 전시와 이벤트에 700만 명이상의 체험객이 다녀갔다.” (p.249)
그는 우리의 관점뿐만 아니라 ‘다른 쪽으로 능력을 지닌 사람들’의 관점도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의 입장에서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 불행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의 관점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기 위해 새로운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앞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깜깜한 건물 내부를 체험하는 프로젝트다. 이 체험은 앞을 볼 수 있는 사람들과 앞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이 가진 기존의 생각을 180도로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암흑에서 시력을 잃거나 약시인 사람들은 그들이 지닌 다른 감각 능력으로 방문객들을 안내하고 방문객들의 또 다른 눈을 뜨게 해주었다고 한다. 이 프로젝트는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이미 7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프로젝트를 체험했다고 한다.
안드레아스의 작은 인식의 전환으로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덴마크, 토킬 손
“대부분의 자폐치료법이 역점을 두는 것은 그 사람을 기존의 사회 환경에 딱 맞도록 말 그대로 주조하는 데 있다. 그 반대의 상황은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p.259)
“그들은 낡은 사고방식의 틀을 바꾸는 데 아주 탁월하다. 그들이 자폐증을 바라보는 시각을 예로 들어보자. 그들은 ‘긍정적인 산만함’으로 새롭게 정의한다.” (p.29)
앞서 안드레아스의 경우처럼 덴마크의 토킬 손은 자폐를 바라보는 인식을 전환하는 것에서 변화를 시작했다. 자신의 아들이 자폐 진단을 받고 나서 유럽에서 장애인 복지 제도가 가장 잘 되어 있다는 덴마크에서 누릴 수 있는 혜택과 권리는 모두 찾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다른 유럽의 나라들은?’, ‘다른 국가들은?’ 그는 자폐를 가진 이들에게 우리의 몸과 마음을 맞출 것을 주문한다. 억지로 그들을 우리의 것에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에게 맞추는 것이다.
“리플링(rippling) : 사회 변화의 연못에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키는 것. 빈곤, 불평등, 부당함과 같은 사회문제를 야기하는 근본 원인에 문제 제기를 하고, 이를 위한 지속적인 해결책으로써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행동, 그리고 그 행동의 영향력이 파문처럼 바깥세상으로 널리 멀리 퍼지게 하는 것.” (p.331)
내가 소개한 5명의 체인지 메이커들 말고도 이 책에서는 13명의 체인지 메이커들의 신나는 변화를 소개하고 있다. 책을 읽으며 그들이 일으킨 잔잔한 파문으로 공동체가 변화하고 구조가 개선되는 기적과 같은 일을 함께 처험한다. 재미있는 소설을 읽는 것처럼 재미있다. ‘한국의 체인지 메이커의 사례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쉬운 마음 감출 수 없었지만 이러한 체인지 메이커들의 네트워크인 ‘아쇼카’라는 그룹이 얼마 전 한국에도 생겼다고 하니, 혹시 다음에 2권이 출간된다면 한국에서도 파문을 일으키는 체인지 메이커가 소개되기를 희망한다.
“공동체의 근간은 자신의 역할을 다하면서 이웃에게 투자하는 사람들이다.” (p.3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