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미래
스코트 A. 헌트 지음, 김문호 옮김 / 아름다운사람들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평화로운 곳인가? 내가 살고 있는 나라는? 내가 살고 있는 도시는? 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TV를 24시간 쉬지 않고 본다면 그 사람은 분명 폭력적인 성향을 보일 것이 뻔하다. 하루 종일 쏟아지는 뉴스는 갈등, 폭력, 사건, 싸움이 전부다. 싸울 일이 얼마나 많고 다퉈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 그리고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 것 같다. 예전에는 노년층에서나 일어나던 탈모현상이 20.30대는 물론 10대 학생들에게까지 보이고 있다고 한다. 이유는 과도한 스트레스. 깨어진 가정은 또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 단절된 관계 또한 마찬가지다. 많은 방송국에서 앞 다투어 부부간, 부모·자식 간 갈등을 소개하고 그것을 풀어내는 과정을 담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다. 영화가 시대상을 그대로 반영하듯이 TV프로그램도 그렇다. 그런 프로그램을 보면서 ‘저런 가정이 있을까? 저런 사람들이 있을까?’ 싶지만 등장하는 사람들이 연출된 사람들이 아닌 이상 현 시대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묻지 마 폭행, 살인이 횡행하고 세대 간 지역 간 갈등의 골을 깊어진다.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를 해칠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 살아간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는 분쟁과 갈등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평화’라는 개념은 ‘자유’가 답보되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다. 자유롭지 않은 데 평화로울 수 있다는 것은 종교적 현자들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일 것이다.

물질문명은 첨단화 되었고 전 세계가 하나의 통로로 만나기도 하고 소통하기도 하는 이때 여전히 폭력과 압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기적과 같은 일이다.

사회를 지탱하는 구조적인 한계를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은 그냥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 책 「평화의 미래」는 스코트 A.헌트 라는 저널리스트에 의해 쓰여진 책이다. 아무리 구조적인 한계가 명백하고 견고하지만 나름대로 평화의 미래를 모색해 보고 이런 한계 속에서도 자신의 영역에서 평화를 실천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평화실천가들을 만난 르포이다. 어수선하고 내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들고 스트레스 받는 세상이지만 공공의 선과 대의를 위해서 헌신하는 평화실천가들이 있다는 것만으로 힘을 얻기도 한다.

 

“우리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텔레비전을 통해서 끔찍한 사건들을 보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방방곡곡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절제와 친절과 선한 행동들이 실천되고 있다.” (p.13)

 

실제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직접 체험해 보지 못해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저자의 말대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실제적 행동들이 실천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가슴속에, 누군가의 마음속에 감동의 파문을 일으키고 삶에의 의지를 북돋우는 계기가 되기도 할 것이다. 책이나 TV를 통해서 알고 있었던 세계적인 평화실천가들을 한 권의 책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도 흔치 않은 점을 생각하면 꽤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버마의 아웅산 수치 여사

“기억하면서도 용서하는 것, 나는 그것이 진정한 용서라고 생각합니다.” (p.72)

 

버마의 아웅산 수치 여사만큼 힘든 삶의 궤적을 산 여인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물론, 버마의 힘없고 돈 없는, 그래서 하루 밥벌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민중들의 삶과 비교할 수 없지만 아버지로 인해 해외로 망명을 가고 제대로 된 진실을 밝히기 위해 가택연금과 갖은 수모를 당할 것을 알면서도 버마로 되돌아 온 그녀의 삶은 파란만장 했다. 정치적 정적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탄압을 여전히 일삼고 있는 버마 정부는 백인 남성인 미국 저널리스트의 일거수일투족까지 샅샅이 감시하고 지켜봤다고 한다. 아버지의 피와 땀이 그대로 녹아 있는 고국에 돌아왔지만 자신의 집에 갇혀서 오랜 시간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아웅 산 수치 여사를 인터뷰 한다. 절제되고 품위 있고 기품 있는 그녀의 모습과 미소와 평화와 자유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저자의 마음을 움직이고 왜 가택에 연금되어 있지만 버마 민중과 전 세계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는 지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자신의 아버지와 자신의 가족에 대해 일삼은 폭력과 공격을 있는 그대로 기억하면서 용서해야 함을 피력한다.

누구나 기억하기 싫은 경험이 있다. 애써 잊어버리든지 의도치 않게 잊혀졌다든지 하는 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니라고 한다. 여전히 자신을 공격하고 자신을 못 살게 한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그래서 그 기억으로 오늘도 매 순간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용서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나에게 적용해 보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쉽게 알 수 있다. 내가 받은 수모와 피해, 상처가 여전한데 그것을 그대로 기억하면서 용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달라이 라마

“우리가 상호의존적인 존재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겁니다.” (p.129)

 

달라이 라마 만큼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달라이 라마 만큼 중국이 싫어하는 인물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달라이 라마 만큼 제자가 많은 인물은 단연코 없을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자신의 조국 티베트를 대표하는 사람이다. 너무나도 유명한 종교 지도자이며 정치가이기도 하다. 중국에 의해서 나라를 빼앗기고 그들에게는 전부와 다름없는 종교까지 탄압받게 되었다. 티베트 고원 지대에 있는 엄청난 양의 지하자원 확보가 주된 이유였다. 언어, 종교, 인종적으로 완전히 다른 나라임에도 무력으로 굴복시켜 속국으로 삼아버린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망명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오히려 중국의 티베트에 대한 잘못된 정책과 무수한 탄압과 폭력을 전 세계에 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달라이 라마는 그가 가는 곳마다 티베트의 현재를 이야기 했다. 하지만 결코 보복이나 국제적 조치를 주문한 것이 아니라 평화적 메시지를 던졌다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으로 대변되던 서양사상의 한계가 극에 달해 다른 어떤 곳으로 정신적 궁핍을 해소하고자 했던 그들의 필요와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달라이 라마는 비록 조국을 빼앗기고 탄압으로 인해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신세였지만 누구보다 전 세계 사람들에게 평화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감동을 주는 평화 실천가가 되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실천가들

“망각은 대안이 되지 못한다. 화해를 위해서는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의 양보가 필요할 것이다.” (p.255)

 

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화약고 중 하나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다. 이들의 갈등은 너무나도 많이 알려져 있다. 한 쪽이 공격하면 보복하고 그 보복이 또 다른 보복을 낳는 일을 수십 년째 반복해 오고 있다. 극렬한 보복과 복수를 결의하는 사람과 단체들도 있지만 이름 없이 화약고 안에서 평화를 위해 안간힘을 쏟는 평화실천가들이 있다. ‘니가 우리 편을 죽였으니 나도 너희 편을 죽인다.’라는 마음으로는 결코 평화를 얻어낼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어쨌든 현재를 살아가는 서로가 마음의 벽을 허물고 과거의 단절을 극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단순히 망각으로 인해 눈감아 주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양보해서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베트남의 희망의 투사 ‘틱 캉 도’ 스님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p.292)

“내 정신은 아무도 가둘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행복하지요.” (p.300)

 

베트남은 미국과의 전쟁 이후 급격히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 유일하게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자신감은 그들의 정치체제까지도 공고하게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굳어진 체제는 반드시 균열을 낳는 법. 공산주의자들은 어김없이 잔인한 숙청과 탄압을 자행했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아침에는 국군, 저녁에는 인민군 깃발을 들었다는 얘기처럼 베트남 사람들도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전쟁 후 자신들과 반대편에 섰거나 잠시라도 발을 담갔던 모든 사람들은 없애버렸다. 종교·교육은 말살 할 대상에 불과했다. 수많은 학교와 지식인들에 의해 시위가 일어나고 부패한 공산정권을 갈아 엎기 위해 힘썼다. 베트남 불교의 가장 큰 스승이기도 한 틱 캉 도 스님은 그 속에서도 평화의 메시지를 설파했다. 거의 모든 베트남인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틱 캉 도 스님은 정부의 입장에서는 가장 악질적인 반동분자일 뿐이었다. 그래서 구속해 수년을 독방에 가두었고 석방되고 난 후에도 집에서 제대로 나올 수조차 없게끔 만들어 버렸다.

베트남 하면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경제성장이 가장 잘 이루어지고 여러 가지 사정이 가장 좋은 나라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저자도 틱 캉 도 스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전히 탄압적이고 억압적인 정권으로 인해 베트남 국민들의 자유가 엄청나게 침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중앙아메리카의 평화의 대사 오스카 아리아스

“평화는 국가주의적인 태도나 군비경쟁으로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인 필요들을 보살핌으로써 얻어질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p.369)

“각국의 예산안에서 군사비가 우선으로 되어있는 비뚤어진 순서를 변경시키는 것이 우리의 도덕적인 지상과제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p.378)

 

중앙아메리카의 평화의 대사. 오스카 아리아스는 코스타리카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의 비호와 협박, 회유 아래 미국의 필요와 이익에 따라 움직인 중·남미 여러 국가들의 암담한 현실에 처음으로 정면 대결한 사람이다. 당시만 해도 중·남미는 개발도상국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빈국이었고 미국의 원조가 절실하게 필요하던 시기였다.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고 미국이 하라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리아스는 다르게 생각했다. 오히려 바로 옆에 있는 나라들과 손을 잡고 대항하면 미국과 맞설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미국 정부와 다국적 기업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중·남미 국가 정부 하나쯤은 간단하게 쿠데타로 엎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에 딴지를 건다는 것은 목숨을 내 놓는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리아스는 그것을 해냈다. 쭈뼛하며 망설이던 주변 국가들을 설득해 한 목소릴 낸 것이다. 근래 남미에게 여전히 불고 있는 우고 차베스, 룰라 대통령의 인기와 바람은 이미 코스타리카의 아리아스에 의해 시작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정한 평화를 위해 대통령 재임 시절 코스타리가 정규군을 해산시킨 것은 놀라웠다. 세상에 어떤 대통령이 군대를 해산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저자가 아리아스를 인터뷰 하며 그가 운전하는 차에 타고 함께 거리로 나간 적이 있는데 그들의 전직 대통령을 보고 환호하고 반가워하며 사진을 찍는 코스타리카 국민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내용이 있다.

평화를 위해 헌신한 정치인은 국민들이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다.

 

 

 

캄보디아의 간디 마하 고사난다

“미국이 캄보디아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일에서 한 몫을 했다는 잘못과 그 학살을 막지 못한 잘못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p.385)

“닉슨과 키신저가 시작한 것을 폴 포트가 완성했다.” (p.403)

“‘미움은 미움으로 평정될 수 없다. 사랑을 통해서만 미움은 평정될 수 있다.’ 그것은 영원한 진리입니다. 나는 또 사람들에게 마음의 전쟁이 총으로 하는 전쟁보다 끝내려면 더 시간이 많이 걸리는 법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p.427)

 

캄보디아의 간디로 불리는 ‘마하 고사난다’ 스님은 킬링필드의 상처가 아직 채 치유되지 않은 캄보디아에서 평화의 메시지를 전한다. 킬링필드 이후 집권자가 바뀌고 전 세계적인 관심으로 상황은 어느 정도 호전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지뢰로 인한 장애율이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캄보디아에는 수십 년의 시간만으로 치유할 수 없는 고통과 상처가 상존하고 있다. 결코 그들이 바라지 않았고 원하지 않았던 잔혹하고 무서운 일이 자신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미국의 동조와 방관에 의해 저질러졌고 극악한 폴 포트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감당할 수 있을까.

 

나는 정말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책에 소개된 세계적인 평화실천가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이해되지 않고 해소되지 않는 울분이 캄보디아의 ‘마하 고사난다’ 스님 이야기를 들으며 폭발했다. 총으로 하는 전쟁은 이미 끝났지만 마음의 전쟁은 진행 중이고 그것의 방법이 보복이나 복수가 아닌 사랑이라니. 쉽게 이해되지 않는 메시지가 머리를 맴돌았다.

폴 포트에 의한 학살이 한 창 진행 중이던 한 수용소에 스님이 갇히게 되었을 때 노란 법복을 입은 스님 곁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미 수 년 간 끔찍한 지옥을 경험하고 바로 옆에서 가족과 친구가 죽어가는 것을 본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 마음속에 스님의 노란색 법복은 인간성의 회복이었다. 스님의 입에서 전해지는 메시지와 나누어 준 경전을 받고 수많은 사람들이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일종의 카타르시스가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지옥과 같은 현실에서도 아주 작은 평화의 메시지를 붙잡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성의 근본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세계적인 평화실천가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고역이었다. 왜 여전히 세상에는 악이 가득하고 해결되지 않은 상처가 많은 지 이해되지 않았다. 새로운 가르침과 평화의 메시지 보다 여전한 현실에 치가 떨렸다.

 

“우리가 결국 해야만 하는 것은 지속적인 평화의 약속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일이다.” (p.533)

“이 책에 등장하는 위대한 평화실천가들이 이룩해놓은 것을 이룩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사소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무언가를 할 수 있다.” (p.544)

 

실제로 책에 등장하는 평화실천가들을 여러 가지 위험을 무릅쓰고 만난 저자에게는 더욱 이해되지 않는 현실일 것이다. 그래서 책의 말미에도 뭐 커다란 제안을 하지 않는다. 아니, 하지 못한다. 현실의 무저갱에서도 여전히 평화의 꽃을 피우고 있는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내가 일상에서 부딪히는 많은 상황 속에서 갈등의 칼을 세우기보다 어떻게 해서든지 평화적인 방법을 모색하고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깨닫는다.

 

실제적인 행동은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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