헉~! 내가 예상하고 있었던 것보다 오키나와는 일본 본도(本島)와 훨씬 멀리 떨어져 있었고, 만약 일본에 속한 영토가 아니라면 차라리 대만에 가까운 지리적 위치였다.
지도를 보고 나서 왜 오키나와 출신 일본인 여성은 내가 흔히 알고 있던 일본인 여성의 외모와 그렇게 다른 것인지, 오키나와는 일본 본도(本島)와 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여러 책을 찾아보다 구입한 책이 바로 이 책.
「오키나와의 역사와 문화」이다. 이 책의 저자 호카마 슈젠씨는 오키나와 출신으로 일본 내에서도 오키나와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섬나라 일본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오키나와’는 여러 섬이 모여 한 나라를 이루었던 옛 류큐 왕국이었다.” (p.5)
책을 읽기 전 나는 오키나와가 하나의 섬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다. 많은 섬들이 있다고 한다. 오키나와는 그 섬들 중 하나이고 지금은 통칭해서 오키나와라고 부르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4백37건이나 기록하고 있다.” (p.5)
조선왕조실록에는 류큐 왕국에 대한 기록이 굉장히 많다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다. 당시 동아시아의 패권국이었던 명나라에 대해 조선과 류큐 왕국은 확고한 조공정책을 해야 했기 때문에 긴밀한 협조와 교역이 이루어졌었다고 한다.
또한 지도상으로 보아도 당시 류큐 왕국과 탐라국(현재 제주도)과의 빈번한 교역과 통상, 왕래를 짐작해 볼 수 있는데 이것에 대한 무수한 자료와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오키나와는 섬을 통치하기 위한 경제적 기초가 해상 무역에 있었다. 섬 통일(1492년)을 이룩한 츄우산 세력은 명나라는 물론 멀리 샴, 말라카, 수마투라, 팔레반, 자바에까지 배를 보내 교역하며 국가 경제의 기초를 다졌다.” (p.77)
9세기 이전 족장 중심의 부족문화를 형성해 오다가 15세기 섬을 통일해 왕국에 이르는데, 책의 저자는 9-15세기 사이 5-6세기 간 오키나와 역사에 대한 자료나 기록이 거의 없다는 것에 의문을 둔다.
어쨌든 왕국을 이루고 섬 왕국의 경제발흥을 위해 남중국해는 물론 멀리 인도네시아 지역까지 배를 보내 교역하고 명나라와 조선, 일본 본도(本島)까지 연결하는 해상 중계무역의 거점이 되었다고 한다.
흔히 무역의 거점이 되는 지역이나 나라의 특징은 개방성·혼합성으로 볼 수 있다. 책에서 설명한 오키나와의 전통 문화(언어, 도자기, 공예, 건축 등)는 오키나와 고유의 것이라기보다는 빈번한 왕래가 오갔던 많은 나라의 문화들과의 혼합이라 봐야 한다.
“지금껏 오키나와 문화를 일본문화와 상대화시키는 것으로 동질성과 이질성을 찾아내려는 시점이 주목을 끌어왔지만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나아가 태평양문화권이라는 광대한 범주 안에서 오키나와를 개방해 보는 비교문화적인 견해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p.31)
그런 측면에서 저자의 제안은 설득력이 있고 공감이 된다. 이전까지 오키나와에 대한 일본 내 연구는 대부분 중세 일본의 문화가 오키나와를 위시한 남방으로부터 북방으로의 전파였는지 북해도 지역인 북방으로부터 남방으로의 전파였는지에 대한 갑론을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까지 소모적인 과정에 불과했었고, 좀 더 큰 틀에서 오키나와의 역사와 문화를 일본의 그것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나아가 태평양문화권이라는 범주에 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10여 년 전, 시마오 도시오라는 학자에 의해 제시된 야포네시아(일본 열도의 활 모양의 연결을 오키나와까지 포함하여 야포네시아라 부르고, 인도네시아·멜라네시아·미크로네시아·폴리네시아 등 태평양을 둘러싼 도서군과의 연쇄로서 일본문화의 심층을 생각하고자 하는 구상)구상에 저자는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지지한다.
그러나 나는 좀 아쉬운 것이 있었다.
애초에 오키나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이 책을 찾아 읽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왜 오키나와와 일본 본도(本島) 사람의 외모가 다른가? 하는 것이었다. 북해도의 아이누족처럼 오키나와의 원주민에 대한 심층적인 조사와 자료 제시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었는데 그런 것이 거의 없었다. 저자는 맺음말에서 “고고학·역사학 등의 자료가 부족하여…….”라고 하며 다른 연구 영역의 전문가들의 비판을 바라는 뉘앙스를 풍기기는 하지만 못내 아쉬웠다.
분명히 류큐 왕국 이전 그리고 9세기 더 이전 부족시대에는 지금 일본인의 외모와는 많이 다른 원주민이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사용하며 살았을 텐데 말이다.
앞서도 얘기했듯이 9세기부터 통일 왕국이 형성된 15세기 사이 수백 년의 오키나와는 지금도 오리무중이라고 한다.
이미 다 밝혀졌는데 내어놓지 않는 것인지 정말로 기록이나 자료가 부족하여 공백으로 남겨두는 것인지 알 길은 없다.
하지만 북해도에서 지금의 일본과는 완전히 다른 문화와 언어와 외모를 가진 채 살았던 아이누족에 대한 연구와 조사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는데, 북해도보다 일본 본도에서 훨씬 멀리 떨어져 있는 오키나와에 대한 연구와 조사가 이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 자체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태평양전쟁 말기 오키나와는 일본 국내에서 유일한 지상전의 독무대가 되었다. 1945년 4월부터 약 3개월간 일본군인 9만 4천, 오키나와 주민 9만 4천, 미군 1만 2천이 전사한 세계 전쟁사에서 가장 격렬한 전투였다.” (p.106)
오키나와는 아픔이 많은 섬이다. 명나라와 일본 본도에 대한 조공에 신음했었고, 태평양전쟁 당시에는 참혹했었다. 이후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의해 미국의 동북아시아 군사거점으로 악용되었고 70년대 중반 일본에 귀속된 이후에도 얼마 전까지 군사적 문제로 몸살을 앓았다.
일본의 영토, 미국의 군사기지 등으로 불려지기 이전부터 그곳에는 분명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오키나와의 바람과 바다, 야자수와 구름을 친구 삼아 살아왔던 사람들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비바람이 심하고 종종 태풍의 습격을 받는 오키나와에서, 처마와 차양은 깊을수록 좋았을 테고, 깊은 처마에는 골격이 튼튼하고 넓은 지붕이 필요했으며, 확실하게 맞물리는 암우기와가 요구된 것은 당연할 것이다.” (p.206)
남중국해로 북상하는 태풍을 처음으로 맞는 곳이 오키나와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을 것이고 당연히 아주 오래전부터 오키나와에 살던 사람들은 여름철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는 태풍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태풍을 견딜 최적의 건축기술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그들의 문화에 태풍에 대한 언급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두려움의 존재였는지, 경외의 존재였는지 확인할 바는 없지만.
좀 더 오키나와만의 제대로 된 역사와 문화, 특히 원주민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싶다. 물론, 이 책을 통해서도 오키나와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많다.
조금 더 알고 싶다. 다른 책들을 좀 찾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