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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풍당당 - 성석제 장편소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4월
평점 :
언제부터인가 세상은 이분법으로 나뉘기 시작했다. 힘을 가진 자와 힘을 가지지 못한 자, 돈이 있는 자와 돈이 없는 자. 심플하고 날카로운 구조다. 더욱 무서운 것은 이러한 이분법의 경계가 모호하지도 흐릿하지도 않다는 사실이다. 행여 이분법 중간 어디 즈음 고개를 내밀라치면 예전 오락실에서 보던 두더지 머리 내려치듯 사정없이 내려쳐 버린다. 더더욱 무서운 것은 이러한 이분법이 가진 구조의 힘이 한쪽으로 완전히 치우쳐 있다는 것이다. 힘과 돈을 가진 쪽은 모든 것을 가진다. 미디어와 권력은 용비어천가를 부르며 따라 간다.
내 생각이 너무 비관적이고 염세적이고 편협한 것이라면 차라리 좋겠다.
내가 생각하기에 예술가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어떤 존재보다 예민하고 섬세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동시대에 일어나고 벌어지는 온갖 일들에 세밀하게 참여하거나 간섭하지 않는다면 예술가로서의 직무를 방기하는 것이라 추론한다.
이 생각도 나만의 편협한 것이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적어도 내게 성석제와 그가 내놓은 작품 「위풍당당」은 예술가로서 그의 창작을 통해 동시대를 비꼬고 풍자하며 에둘러 조롱하여 나와 같은 독자로 하여금 실소와 함께 현실의 피곤함을 배설하게 해준다.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여긴다.
“나는 누구인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인간은 먹고 소화시키고 배설하는 존재일 뿐인가. 인간이란 뭔가.” (p.188)
조폭 보스가 시골 촌뜨기에 의해 자신의 조폭 동생이 다치자 데리고 있던 조폭 부하들을 깡그리 모아 시골로 쳐들어간다. 그런데 녹록하지 않은 시골 촌뜨기들에 의해 똥물 공격을 받는다. 어이가 없는 것인지 화가 나는 것인지 분명치 않은 멘붕 상태에서 자조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 고찰에까지 이르게 된다.
분명 이분법 저 끝에 있는 존재에게 던지는 똥폭탄이다.
근래 몇 년 동안 많은 책을 통해 “분노하라”, “짱돌을 던져라”, “닥치고 O해라” 말이 많았다. 하지만 저 끝에 있는 존재들에게 닿지 않는다. 아무리 분노해서 닥치고 짱돌을 들어 던져도 내 발치에 떨어질 뿐이다.
그래서 피곤하고 지루하며 지쳤다.
차라리 똥폭탄이 저들 머리위에 떨어진다는 해괴망측한 설정이 속 시원하다.
“그는 낭떠러지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130수 최고 원단으로 만든 양복에, 아르마니 넥타이를 매고 페라가모 구두를 신은 채, 베스사체 선글라스 끼고 까르티에 시계 차고 봐줄 사람 하나 없는 개떡 같은 절벽을 바보 같은 부하 한 놈 때문에 땀을 흘리며 내려간다. 구두에 그놈의 똥을 묻히고.” (p.65)
소설 속 조폭은 시골 촌뜨기들과는 단순 비교로 상대가 안 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시골로 쳐들어갔다. 흔히들 하는 방법이다. 시골 촌뜨기들은 명랑만화에나 있을 법한 방법으로 조폭을 상대한다. 똥통에 가두고 고춧가루를 뿌리고 벌을 쏘이고 똥을 퍼붓는다. 공상과학에서나 등장할 대치형태다.
조폭들의 공격에 대응하는 것도, 치명적 공격을 가한 후 조폭 보스와 협상하는 것도 시골촌뜨기들이 우위에 있다. 시골촌뜨기들의 결정에 왈가왈부하지 못한다.
애초에 시커먼 벤츠를 타고 시골 촌뜨기지만 빼어난 외모와 싱싱한 젊음을 가진 새미를 발정난 수캐처럼 뒤쫓은 것 자체가 사실 말이 되지 않아야 할 말이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잡아먹을 수 있는 것이라 설정하는 것이 말도 되지 않을 현실이다. 나와 당신이 살아가는 이놈의 세상이다.
작가는 말도 되지 않는 현실과 소설의 현실을 대치시킨다.
“그런데 따라오고 있다. 검정색 벤츠에 탄 사내들. 우리에게 뛰쳐나온 맹수. 끈 풀린 미친 개 같은 인간들. 시속 오 킬로미터로 걷는 새미를 시속 오 킬로미터의 속도로 따라오는, 짙은 선팅으로 시커먼 유리 속,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세 인간들.” (p.24)
시커먼 벤츠를 타고 시커먼 속내를 감춘 채 히죽거리며 서성이는 인간들은 소설의 조폭처럼 멍청하거나 어설프지 않다. 집요하고 꼼꼼하며 성실하다. 그럴 것이라고 추정한다.
나는 새미만큼 매력적이거나 그들의 먹잇감이 될 정도의 깜냥도 되지 않기 때문에 안심하고 살지만 도처에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는 것 같다.
언제든 어떤 방식으로든 저들의 새미가 될 수 있다. 그렇게 추정한다.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다 자기 가족한테 버림받고 무시당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야. 상처를 줬을 수도 있지. 어쨌든 옛날 가족과는 다들 남남이 되었어. 그리고 여기 이 마을에 어찌어찌 와서 다시 한식구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피는 섞이지 않았어도 우리는 서로를 가족으로 선택했다.” (p.164)
다소 진부하고 늘 들었던 말인 것 같지만 작가는 소설 속 시골 촌뜨기들이 조폭들이 말하는 식구의 개념이 아니라 제대로, 그리고 스스로 선택한 식구가 문제를 해결하고 갈등을 해소한다고 설정한다. 영화 [비열한 거리]에서 조인성이 자신의 조폭 부하들에게 함께 밥을 먹는 게 ‘식구’라고 했었다. 소설 속 조폭 보스 정묵이 [비열한 거리]를 보고 따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조인성과 정묵이 말하는 것처럼 단순히 밥만 같이 먹어서 식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 한 사람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 선택하여 식구가 된다.
모든 사건의 발단이 된 새미와 그의 남동생 준호가 갑자기 시골에 나타난 것도 이령, 소희, 영필이 시골에 나타나 식구가 된 과정도 그랬다.
공동체적 담론밖에는 해소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다는 의도로 판단해도 될지 모르겠다.
그래서 좀 촌스럽다.
물론 소설 속 플롯은 아기자기하고 기상천외하며 유쾌발랄하다. 플롯을 담는 얼개가 흔한 것일 뿐이지.
이것 또한 작가 성석제의 힘이다. 고소(高笑)하게 갈무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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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보다 약간 더 큰 키에 몸무게가 삽십오 킬로그램밖에 안 되는 체구로 사뿐사뿐 리듬을 타면서 걸어오는 스님을 봤을 때, ‘오 마이 갓네스, 아버지 하나님’을 부르며 합장을 하고 말았다.” (p.50)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웃었던 장면이다. 소희가 시골 산자락에 은둔하고 있는 스님과 처음으로 우연히 마주치던 장면. ‘오 마이 갓네스, 아버지 하나님’을 부르며 합장을 하고 말았다. 나는 배를 잡고 뒹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