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해도 괜찮아 - 나와 세상을 바꾸는 유쾌한 탈선 프로젝트
김두식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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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위적으로 억누르고 가리면 호기심이 더 생긴다. ‘하지 마라, 하지 마라.’ 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유독 한국에서는, 유독 경상도에서는, 유독 교회에서는 ‘하지 마라!’라는 것이 ‘해라!’라는 것보다 훨씬 많다. 그래서 유독 얼굴을 찡그리는 사람들이 많다.


지난 주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1층 입구에서 친구를 기다리며 예배가 끝난 뒤 예배당을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을 무심코 살피게 되었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열에 여덟은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게 덥지 않은 날씨였고 예배당 안은 풀 에어컨 가동으로 인해 늦가을 정도의 서늘함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더워서 그런 건 아니었을 테고……. 일요일에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일이 적어도 다른 일상의 일들보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로 여기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텐데…….

‘왜들 저렇게 인상을 쓰고 있는 걸까?’ 싶었다. 천상의 즐거움을 맛본 표정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자신의 내재된 종교성을 표출하고 그것으로 인한 위안과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 새롭게 다가 올 일주일을 살아갈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이 예배 시간이었을 텐데…….


뭐, 매주 보는 찡그린 인상들이라 개의치 않고 있다가 이 책 「욕망해도 괜찮아」를 읽으며 답을 찾았다.


모두들 다른 욕망을 꾹~꾹~! 짓누른 채 예배당에 앉아 예배를 드려봤자 그것이 진정한 삶의 예배, 진실한 제의(祭儀)가 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마음은 이미 콩밭에 가 있는 사람에게 높은 강대상 위의 설교는 이미 ‘아웃 오브 안중’이다.

가끔 나는 일요일 오전에 교회에 가는 것이 싫을 때가 있다.

토요일 오전에 출발해서 하루 종일 놀다 밤늦게 돌아오는 것과 토요일 오후에 출발해서 하룻밤 자고 일요일 오후에 돌아오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가끔은 ‘에이~! 그냥 이번 주는 빠져버려???’라고 혼자 일탈을 꿈꾸지만 제대로 실행해 본 적은 없다.


주일성수(일주일에 한 번 주일날 예배드리는 것을 꼭 지켜야 한다는 일종의 관습)개념이 강한 한국교회의 성도들은 주일날 예배를 빠지는 것을 일종의 죄로 여기는 것 같다. 나이가 많은 성도일수록 더욱 이러한 경향을 심하다. 실제로 어렸을 때 어떤 권사님은 주일날은 돈을 써도 안 되고 운동을 해서도 안 되며 나쁜 생각은 더더욱 해서도 안 된다고 하였었다.

주일성수는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이 아니라 한국사회에 토착화되면서 자연스레 생긴 관습의 개념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죄가 아님에도 나는 한 번도 주일날 땡땡이를 치고 놀러간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집에서 교회 가는 길에 고속도로 IC가 있는데, 몇 번 핸들을 틀어 뻥 뚫린 고속도로로 가고 싶었으나 실행하지 못했다. 그런 날은 예배당에 앉아 있어도 멍~하고 딴 생각 할뿐 집중하지 못한다.

색(色)으로 가득 차 있지만 따지고 보면 별 것 아닌 계(戒)에 눌려 스스로 내 자신을 재단하고 통제하는 것이다.



1. 나는 ‘은근자랑’ 타입


“제 삶이 우리 사회의 경계선을 넓히는 도구로 쓰였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너무 규범에 갇히지 말고 살살 놀면서 살자는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이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p.293)

김두식 교수의 다른 책 「헌법의 풍경」, 「불편해도 괜찮아」, 「칼을 쳐서 보습을」을 읽으며 보수기독교인이 이전까지 아무도 얘기하지 않았던 ‘동성애’,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 등을 사려 깊고 따뜻하게 풀어내는 능력에 감탄했었다. 따지고 보면 불편하고 유쾌하지 않은 주제들이었음에도 동네형, 교회 착한 형이 시원한 음료수 하나 사 주며 얘기해주는 것 같았다.

모태신앙에 중·고등학교 시절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대학시절 선교단체 활동까지 했다면 전형적인 ‘교회엄친아’라 불릴 만하다. 거기다 고시패스, 기독교대학 교수, 로스쿨 교수의 스펙은 십여 년 전 대형 교회 목사가 부르짖었던 ‘고지론’에 가장 적확하게 들어맞는 모델이다.


하지만 김두식 교수는 자신에 대한 세간과 지인, 팬들의 평가와 칭찬에 손사래를 치면서도 속으로는 은근히 좋아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내재된 욕망의 정형을 발견한다.


“누구나 자신의 은근한 자랑이 상대방에게 먹혀들기를 원하지만, 누구도 상대방의 은근한 자랑을 듣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은근해도 내 자랑이 상대방에게 순수하게 받아들여지는 일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됩니다.” (p.147)


너무 맞는 말 아닌가? 나는 이 부분을 읽다 오른쪽 허벅지를 후려 쳤다. 아팠다.

대놓고 자랑하는 사람은 한참 하수다. 스스로 질릴 때까지 들어주고 고개 끄덕여주면 그만이다. 하지만 나는 ‘은근자랑’ 타입이었던 것 같다.

예스24 블로그 활동을 제대로 시작하고 파워블로그가 되어 명함을 받았다. 각고의 노력까지는 아니었지만 나름 열심히 읽고 쓴 덕에 받은 상이라 너무 기뻤다. 너무 자랑하고 싶고 알리고 싶었지만 대놓고 할 수 없었다. 일부러 가방에 명함을 수십 장 넣고 다니며 우연히 발견한 것처럼


‘어?? 이 명함 들어있었네? 아~! 이거 이번에 그..뭐.. 파워블로그라고.. 뭐.. 별거 아냐!! 근데 명함을 줘서 허허허. 자! 이거 받아라~ 이게 뭐냐면 말이지~’


내 명함을 받은 사람들이 나의 ‘은근자랑’을 간파하고도 은근히 놀라는 척, 대단하게 여기는 척 했다고 생각하니 온 몸이 화끈거린다. 차라리 만나자마자 대놓고 자랑하며 명함을 주고 자랑질을 늘어놓았다면 좀 덜했을까? 모르겠다. 얼굴이 화끈거려 터질 것 같다.

‘은근자랑’ 타입을 버리고 ‘완전자랑’ 타입이 되어야지.




2. 내가 하면 ‘로맨스’ 니가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부탁’이고 남이 하면 ‘청탁’이 됩니다.”

“희생양에게 손을 얹어 우리 모두의 죄를 전가한 후, 그 희생양의 멱을 따고 불태우는 제사과정과 하나도 다를 게 없습니다. 그를 잡음으로써 우리는 평화를 얻습니다. 참 무서운 구조입니다.” (p.67)


연예계 가십이 다음날 모든 포털의 메인을 장식하는 나라가 한국말고 또 있을까? 선거철과 우연하게 맞물린다는 정치적 해석은 차치하고서라도 ‘공인’이라는 탈을 씌운 채 정죄하고 나의 죄를 전가하는 것은 제사의식에 다름 아니다. 신정아씨에 대한 기사가 아직도 뉴스에 나오고 잘나가던 MC가 10년 전 했던 말로 인해 하루아침에 모든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고 ‘쓰레기’취급을 받아야 하는 무서운 곳이다.


한국 사람들이 어려서부터 너무 억눌려 살아 왔고 요즘 문제가 되는 교육의 문제가 워낙 뒤틀리고 비정상적이 되다 보니 제대로 된 인성·인문교육은 전무한 상태다. 그래서 요즘 아이들은 ‘이웃·배려’ 이런 단어들에 대한 이미지 연상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왕따 현상을 아무렇지 않게 방관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이다.

인성·인문적 소양을 기르고 닦을 수 있는 토양은 없고 어려서부터 상대보다 높은 성적을 얻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다 보니 내재된 폭력성이 분출되면 감당할 수 없다.


포털 댓글의 심각성은 물론이고 뭐 대단한 일도 아닌 것에 우르르 몰려 희생 제사를 치르는 것을 보면 무섭다. 혹 희생양의 편이라도 들면 그 사람 또한 희생양에 추가된다.


“이번 글쓰기는 어떻게든 욕망을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인정하겠다는 제 결심의 첫걸음입니다.”

“지신이 욕망의 덩어리임을 인정하고 나면 남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길은 한결 따뜻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p.44)


내 자신이 부족한 사람이고 문제가 있는 존재임을 인식할 때 상대의 존재가치를 바라보는 눈도 달라질 것이다.

‘어려서부터 이렇게 자랐어. 엄마·아빠는 돈 벌기 바빠서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어. 학교 선생들은 공부 잘하는 애들만 좋아해. 이 사회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아. 거지같은 세상.’

결국 애써 감추려 했을 뿐이지 우리 모두는 욕망의 덩어리를 짊어진 채 살아간다. 그것을 오롯이 인정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내가 하는 것이 ‘로맨스’면 니가 하는 것도 ‘로맨스’라고 인정해야 한다.




3. ‘다투며 성내는 아내와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 (잠언21장)

성경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굉장히 재미있다. 다투며 성내는 아내와 사는 것보다 광야(사막)에 나가서 혼자 지내는 편이 낫다니. 내 아내는 절대 그렇지 않다는 전제를 미리 하고. 으흠.


“‘결혼식 전날이라도 잘 안 맞는 것 같으면 헤어지라’는 것이었습니다. 말이 안 통하는 사람과 평생을 보내는 것보다는 하루의 망신을 감수하는 것이 낫기 때문입니다.” (p.118)


그런데 사실 부부문제는 상호적인 것 같다. 짧은 1년 반의 결혼생활을 통해 얻은 성찰이지만 맞는 것 같다. 서로의 입장을 까놓고 얘기만 해도 문제의 90%는 해결되는 것 같다. ‘내 마음을 알아주겠지. 저 사람은 왜 내 마음을 몰라줘.’ 라면서 초점을 내가 아닌 배우자에게 맞출 때 갈등이 시작되고 골이 깊어진다.

성경 잠언에 나와 있는 것도 다투며 성을 내는 아내의 말도 들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나와 아내는 말이 잘 통한다. 10년을 연애하고 결혼해도 또 다른 사랑과 추억이 쌓인다.

나는 절대로 광야에 나갈 일은 없을 듯하다.

‘대놓고 자랑, 완전자랑’ 하는 것이다.

“결혼 전에 천 번쯤은 자위행위를 하면서 으르가즘을 느껴본 남성이 단지 여성과의 성기결합 경험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동정’을 자랑하며 파트너 여성의 성경험을 단죄하는 게 말이 되는가?” (p.221)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하는데 한국사회는 ‘처녀’, ‘첫 경험’이라는 것에 대해 비정상적으로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총각’이라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말이다.

실제로 이전 직장에서 아내가 출산을 앞두고 있었음에도 룸살롱에서 술을 진탕마시고 2차를 나가는 놈을 봤다. 며칠 후 그놈의 아내가 출산을 하여 병원을 찾았을 때는 세상에 그렇게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이 없었고 태어난 아이를 자상하게 바라보는 아버지가 없었다. 이후에도 그의 술자리 2차 행각은 계속됐다.


돈3만원으로 성을 살 수 있는 세상이다. 남자라면 누구나 ‘성’, ‘여성’, ‘잠자리’에 대한 폭발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다. 나이·지위·학력의 고하, 종교의 신실성 여부는 둘째다. 똑같다. 100% 장담한다.

저자의 말대로 결혼 전 수천 번 자위를 한 남자가 무슨 자격으로 여자의 과거를 따져 묻거나 그것을 문제 삼을 수 있을까? 성기의 결합만이 성관계일까? 성경에서는 상상 속에서 여자를 취하는 것도 간음이라 한다. 굉장히 높은 수준의 성기준이다. 하지만 교회 내에서도 엄청나게 많은 사례가 있다. 성직자에서부터 교회 내 미혼커플에 이르기까지.


결국 말만 번지르르 하는 것뿐이다.


차라리 까놓고 얘기했으면 좋겠다. 교회 내에서도 그렇지만 직장에서도 말이다. 가정에서는……. 가능할지 잘 모르겠다. 저자는 상담하던 내용 중 ‘내 딸아이가 2박3일 애인과 여행간 다면 콘돔을 꼭 챙겨줄거야.’라고 했다는데 나라면 그렇게까지는 못할 것 같다.

남자라면 누구가 겪었던, 겪고 있는 문제이기에 처음에 말만 잘 꺼내면 모두 동감하고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이건 내가 개인적으로 해 본 경험이기에 확신한다. 해결할 수 없더라도 최소한 ‘나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 다들 그렇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면 굉장히 자유해지고 편안해진다. 위로가 되는 것이다.


‘저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저자는 이런 생각들을 버려버리라고 한다.


내 속에 내재된 꿈틀대는 욕망의 덩어리를 건강하게 표출하라고 한다. 실제적인 지침을 내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찾아야 한다. 어렵지 않을 것 같다.

때론 계(戒)에 묶인 채 질질 끌려 다니지만 말고 일탈도 해보고, 계(戒) 때문에 속마음을 숨긴 채 은근히 자랑하지 말고 떠벌려 자랑해 보고, 계(戒)에 눌려 하고 싶은 생각과 행동도 못한 채 슬금슬금 눈치들만 보지 말고 먼저 얘기해보자.


욕망해도 괜찮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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