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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일 진화한다
권율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저자 권율씨가 나온 서바이버 에피소드를 다 보지는 못했다. 중간쯤과 마지막쯤을 봤었던 기억이 있다. 얼마 전 슈퍼스타K라는 프로그램이 악마의 편집이니 뭐니 해서 말이 많았는데, 미국 CBS의 서바이버에 비하면 세발의 피였다. 서바이버는 인간의 탐욕과 위선, 속살을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 당시만 해도 국내 TV프로그램에서는 볼 수 없었던 포맷이었기 때문에 재미도 있었지만 불편하게 봤었다.
최종 우승을 한국계 미국인 권율씨가 하게 되었고 이후에는 그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없다가 이 책 「나는 매일 진화한다」를 통해 다시 그를 만나게 되었다.
서바이버 우승 후 권율씨의 행보에 대해서는 전혀 알고 있는 것이 없었기에 이 책도 ‘서바이버 우승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와 뭐 자질구레한 이야기가 있겠지’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서바이버 우승에 대한 부분은 책의 앞부분 한 챕터에서 언급할 뿐이고 뒤에는 한국계 미국인으로 살아오며 겪었던 많은 이야기와 자신의 꿈에 대한 다짐으로 가득했다.
이런 종류의 책을 쓰는 사람이라면 자기자랑이 책의 대부분이 될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그렇지 않았다. 미국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는 소수계 인종에 대한 암묵적 차별과 편견을 어떻게 겪어왔는지, (이겨냈다고 얘기하지 않는다. 아직도 그것과 싸우고 있으며 앞으로도 싸워야 함을 책 전체에 걸쳐 얘기하고 있다.) 앞으로 어떻게 이겨내기 위해 노력할 것인지에 대
한 담담한 고백이 담겨 있다.
“나는 약하고, 결단력이 없고, 존재감이 부족하고, 걱정이 많았다. 나는 줄곧 내 자신의 결정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미적거렸다.” (p.246)
책에서 여러 번 언급하지만 권율씨는 어려서부터 무척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아이였다고 한다. 학교에서는 늘 괴롭힘을 당하고 아버지의 강압적인 교육과 훈계로 더욱 강박적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더군다나 폐쇄공포증과 결벽증까지 겹쳐지면서 더욱 사회와 멀어지고 학교와 멀어지게 되었다.
“자신감이 없더라도 자신감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해. 당당한 척, 자신감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게 첫 번째야.” (p.124)
권율은 형의 도움과 학교에서 만난 또 다른 아시아계 미국인 친구들을 사귀게 되면서 차차 이러한 아픔과 약함 들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움츠러들면 움츠러들수록 더 괴롭힘을 당하고 차별을 당한 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학교 수업시간에 한 번도 하지 않던 질문도 많이 하게 되고 운동써클에도 가입하면서 적극적인 아이로 변모하게 된다.
성적도 최상위권을 유지하게 되고 일류 대학과 일류 로스쿨을 졸업하고 로펌, 의회, 구글 등 많은 사회경험도 쌓게 된다. 남들이 보기에도 엘리트 코스를 밟아오고 전도유망한 젊은이가 된 것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 자신을 암흑에서 구해주었던 중국계 미국인 친구 에반의 투병과 죽음을 통해 새로운 꿈을 꾸게 된다.
“나는 에반의 투병과 죽음을 통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됐다. 골수 기증 캠페인을 벌일 때 나는 미국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목격했다. 동양계 사람들은 미국 사회를 움직일 영향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p.182)
“사방을 돌아다니며 캠페인에 대한 확신을 심어 줄 동양계 리더를 찾으려 애썼지만 그런 역할을 할 만한 정치인도, 영화배우도, TV스타도 찾기 어려웠다.” (p.182)
백혈병으로 고통 받는 친구 에반의 골수 기증자를 찾기 위해 학업까지 포기한 채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노력했지만 결국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수많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있고 이제는 정치·경제·사회 분야에도 많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진출해 맹활약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에반에게 골수를 기증해 줄 지원자를 찾는 과정에서 모래알처럼 흩어진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단합력을 확인했다. 아무리 자기 혼자 백방으로 노력해도 정말 미국 내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동양계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그래서 권율씨는 자기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굉장한 자만이 담긴 다짐이라 할 수 있겠지만 책을 통해 알게 된 그의 어린 시절의 상처와 아픔,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한 수많은 노력과 실패들을 생각하면 자만이 아니다. 그는 인생의 중요한 고비마다 누구를 의지하거나 누구의 도움을 기대하기보다 자기 자신에게 자신감을 심고 스스로에게 당당해지기 위해 더욱 노력한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위의 다짐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100% 공감할 수 있다.
‘왜 이렇게 도와주지 않지?, 동양계 미국인들은 왜 이렇게 힘이 없지? 영향력이 없지?’라고 생각하며 낙담하지 않는 것이다.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던 중 CBS의 서바이버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지 않겠냐는 제의가 들어온다. 당시 그는 모든 선망의 대상인 ‘구글’에서 일하고 있던 차였다. 모두들 그의 출연 승낙을 반대하고 아버지는 더욱 반대가 심했다. 하지만 결국 ‘구글’에 사표를 내고 서바이버에 출연한다.
“치열하게 게임에 임하면서도 동시에 경쟁자로부터 존경심까지 끌어내야 할 만큼 상대방의 신뢰를 받아야 하는 탁월한 리더십이 필요한 것이다.” (p.8)
“반대로 잃게 될 것은 너무 많았다... 지금껏 내가 쌓아온 커리어를 한 순간에 망칠 수도 있었다.” (p.48)
앞서도 잠시 말했지만 서바이버라는 프로그램은 내가 본 바로 출연자들에게는 굉장히 고통스럽고 혹독한 과정인 것 같았다. TV로 시청하는 우리들에게야 ‘이야~ 이거 완전 리얼인데~~ 싸우고 배신하고 질투하고 하는 게 진짜야~’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재미있지만 그 속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실제 상황인 것이다. 극한의 육체적 한계를 경험하고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몇 주간의 삶은 그 사람의 마지막 한 줌까지도 모두 까발려지는 어찌 보면 치욕스러운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권율씨는 다르게 생각했다. 자신의 출연으로 인해 미국인들의 동양계 남성에 대한 편견이 바뀌기를 꿈꾸었다. 그가 출연한 서바이버 시즌13은 시즌1이 거뒀던 성과를 넘어서는 대단한 흥행을 기록했고 그 시즌에서 우승한 한국계 미국인 권율에 대한 관심으로 전미가 떠들썩했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더 많은 스토리가 있을수록, 더 많은 경험을 할수록 삶은 풍요로워지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p.189)
이후 수많은 학교와 기업, 관공서에 특강을 하고 서바이버 우승으로 받은 거액의 상금도 기부했다고 한다. 오바마 선거캠프 측의 제의로 선거운동에도 참여하게 되고 이후 정부단체에서 일도 하게 된다.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거치며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에 당당해진 청년으로 성장한 그는 자신의 삶도 더 많은 스토리로 점철되기를 소망했다고 한다. 그래서 다양한 분야에서 일도 해보고 TV에도 출연하고 캠페인도 하고, 안주하지 않는 것이다.
제대로 된 리더가 되고 싶다는 것이다.
피부색이 달라도 미국사회 내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리더가 되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수계 인종으로 자신처럼 어려움을 겪을 수많은 사람들의 희망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참 멋있었다.
자신이 이제껏 쌓아올린 커리어로도 충분히 여유 있고 보람된 삶을 영위할 수 있음에도 더 큰 꿈을 꿀 수 있다는 것. 이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권율씨가 이 책에서 얘기하고 다짐한 것대로 살아갈 수 있을지 확실히 알수는 없지만 앞으로 그의 행보에 진심을 담은 응원을 보내고 싶다.
그리고 혹시 그가 안정된 위치를 고수한 채 안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왜 뱉은 말을 지키지 않냐~!’라고 비난할 생각이 없다.
내가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왜 너는 그렇지 살지 않냐라고 얘기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조용히, 그리고 멀리에서 마음으로 응원할 뿐이다.
나도 멋있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한국계 최초로 미국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고자 하는 그의 꿈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