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온 편지
김용규 지음 / 그책 / 201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 부모님의 고향은 충청북도 단양이다. 단양 8경과 단양 마늘로 유명한 곳이다. 두 분이 결혼하시고 아는 분의 소개로 멀리 경상북도 포항에 있는 회사에 아버지가 취직하게 되셨다. 그리고는 30년이 넘게 포항에서 살고 계신다. 자연스레 내 고향은 포항이 되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타향에서 결혼·직장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 일이었을까?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어린 시절 방학이나 명절, 조부모님 생신을 맞아 시골에 갈 때면 포항에서 영덕까지는 7번국도, 영덕에서 안동까지는 34번국도, 안동에서 충북 단양까지는 5번 국도를 이용했었다. 지금이야 국도의 많은 구간이 왕복4차선으로 잘 닦여 있지만 당시만 해도 전부 왕복 2차선에 불과했다. 지금보다 통행량이 현저히 적었기는 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귀성길에는 늘 강원도에서 내려오는 귀성차량들과 영덕인근 7번 국도에서 극심한 정체를 겪기도 했었다.

 

 

“그녀는 가는 곳에서 만나는 모든 식물에 대한 분류를 척척 해냈습니다.” (p.106)

 

 

포항에서 단양까지 국도를 따라 가는 길에서 부모님은 나와 동생에게 늘 차창 밖의 풍경을 설명해 주셨다. 수많은 나무와 꽃, 풀에 대한 이름을 말이다. 나와 동생이 가르쳐달라고 보챈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두 분이 어린 시절 들로, 산으로, 냇가로 뛰어 다니시고 일 하시며 자연스레 친구가 되고 이름을 알게 된 동무들을 소개해 주시는 것처럼 달큰하고 애살맞았다.

 

먼 타지에서 생활하시며 흙, 나무 등 자연과 멀어졌던 기억의 틈을 귀향, 귀성길에서나마 채우시려 했던 것 같다. 설, 추석, 여름방학, 겨울방학 등 갈 때마다 차창 밖의 풍경은 늘 다른 것이었기에 4시간에 가까웠던 오가는 길이 심심하지 않았다.

 

자세히 귀담아 듣지 않았음에도 학창시절 친구들보다 들풀, 꽃, 나무 이름들을 확연히 많이 알고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지난 주 아내와 팔공산 올레길을 다녀왔다. 신록이 우거진 산에서 제대로 나무의 이름하나 구분해 내지 못하는 서로를 발견하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

 

내 아이들 세대, 그리고 그 아이들의 아이들 세대에는 내 부모님이 내게 해주셨던 ‘풀, 나무, 꽃 이름 가르쳐주기’ 시간은 없어질 거라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뭉뚱그려 ‘아~ 산이 참 좋아~~’, ‘나무들이 참 예뻐~~’ 따위의 감탄사만 연달 할 수밖에 없을지 모르겠다.

 

이 책 「숲에서 온 편지」는 도시의 모든 것을 접고 숲으로 들어간 김용규씨가 도시 사람들에게 보내는 50편의 편지글이다.

 

 

“평화로 가득한 숲에 살고 있는 내가 삭막함 가득한 숲 밖의 세상으로 보내는 편지입니다.” (p.8)

 

 

“숲 속 내 삶에 배어 있는 기쁨과 분노와 슬픔과 즐거움을 발가벗어 담았습니다.” (p.8)

그 또한 도시에서 정신없이 살 때는 나무나 풀 따위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매일 자신을 채근하며 위태로운 쳇바퀴 질을 할 뿐이었다.

‘버리는·비우는 것’이 키포인트라 생각한다.

누구나 버리고 싶어 하고 비우고 싶어 하지만 견물생심이라고, 쉽게 행동에 옮기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는 너무 ‘바쁘다’ 그래서 ‘겨를이 없다’

 

아버지 차를 타고 시골로 향하는 차창 밖을 내다볼 수 있었던 건 제한속도 60km의 왕복2차선 국도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한속도 80km의 왕복4차선 국도에서는 차창 밖을 오래 집중해서 내다보면 멀미가 난다. 속도의 차이다.

 

수목원이나 동네의 작은 공원에만 가도 온갖 나무와 풀과 꽃에 이름표를 달아 놓았다. 내 부모가 내가 어렸을 때 들려주었던 그 목소리를 떠올려 볼 틈을 주지 않는다. 한 번 쓱 보고 ‘아! 이 꽃 이름이 이거구나. 이 나무 이름이 이거구나!’하면 끝이다. 생각하고 추억할 겨를을 주지 않는다.

 

저자인 김용규씨도 버리고 비우고 나서야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관심조차 없었고 겨를조차 없어 눈길도 주지 않았던 많은 것들을 숲속에서 발견하기 시작한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만물과 마음속에 보이지 않는 심란함까지 모두 다.

 

저자의 말대로 책에 실린 50편의 편지는 짧지만 강한 여운을 준다. 쉽게 긁적인 글이 아니다. 꽤나 책을 많이 읽고 사고의 깊이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욕심 부리지 않고 양봉을 하고 고구마를 심고 개를 키우는 모습이 글에 그대로 담겨 있다.

그래도 산골에 혼자 들어와 산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랴? 사무치는 외로움과 문득 소스라치게 느껴지는 고독을 이겨냈을지, 즐겼을지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임은 자명하다.

 

 

“그러나 진정 용기 있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정직한 사람임을 나는 압니다……. 두려우면 두렵다 말할 수 있는 사람……. 두려움을 끌어안고 한 발 디뎌보겠다고 다짐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진정 용기 있는 사람임을 나는 압니다.” (p.98)

 

 

그리고 차마 책에는 다 담지 못한 또 다른 편지가 있으리라 짐작한다.

표현하지 않고 표현할 수 없는 이제까지의 숲 속 여정이 궁금하다.

그것이 괴롭고 힘든 여정이었다 하더라도.

 

연단(鍊鍛)의 고됨이 없었다면 뱉을 수 없는 문장이다.

그나저나 내 아이들에게도 ‘풀·나무·꽃 이름 가르쳐주기’교육을 해야 할 텐데……. 도감이라도 사서 공부를 해야 하나 말아야하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