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비참 1 동문선 현대신서 173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김주경 옮김 / 동문선 / 2000년 9월
평점 :
절판


온·오프라인, 중고서점을 모두 뒤져 어렵게 구한 책이다. 그래서 한 페이지 읽는 것이 아깝고 아쉬웠다.

이름만 들어도 설레이고 기대되는 ‘피에르 부르디외’의 책이었다.

'La Misère Du Monde'

세계의 비참이다.

 

“만일 프랑스 지도층의 엘리트들이 좌파든 우파든간에 근시안적인 기술주의를 부르짖고, 단기 금융적 성과를 기대하면서 70년대 중반 이래로 그들이 내세워 왔던 정책, 즉 공공 분야 축소와 ‘중상주의화’의 기치를 내건 신자유 정책을 계속 고집한다면, 부정적이고 요원하기만 한데다가 끔찍하기도 한 유토피아가 현실로 나타날 수도 있는 최악의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절대로 배제해서는 안 될 것이다.” (p.280)

 

지금으로부터 20여 년전에 출간된 이 책은 2011년 현재 한국이 처한 위기의 모습과 아주 유사하다. 서유럽, 특히 ‘프랑스’하면 예술의 도시 파리가 떠오르고 68혁명 이후 대학개혁에 성공해 전 세계에 좋은 선례를 던져준 앞서가는 선진국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혁명 이후 집권한 사회주의·공산주의 세력이 신자유 정책을 고집하게 되면서 유토피아를 약속했지만 최악의 사태가 지속되리라는 것을 예견했다.

 

최악은 아니었지만 90년대 중반과 2000년대 중반 프랑스에서 일어난 폭동을 기억하면 이 책이 얼마나 적확한 예측을 했었는지 알 수 있다.

 

단순히 사회학자 몇 명이 탁자에 둘러앉아 ‘이제 프랑스가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지 토론합시다’로 그친 것이 아니라 이 책이 출간되던 당시 프랑스 내에서 문제가 되던 ‘빈민주택 단지’, ‘대규모 단지’등을 꾸준히 찾아다니며 연구하고 그곳에서 사는 이들과의 심층적인 인터뷰를 하며 발로 쓴 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상호간의 몰이해와 무지, 혹은 잠재적으로 존재하고 있거나 아니면 공공연하게 드러나고 있는 갈등의 환경 속에서 서로 부딪치면서도 함께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 있다. 모든 상황이 이들을 서로로부터 분리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조건 속에서 빚어지는 온갖 종류의 고통을 느껴 가며 어쩔 수 없이 함께 생활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장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빈민주택 단지’ 혹은 ‘대규모 단지’, 그리고 수많은 교육 기관들이 바로 그러한 장소들이다.” (p.13, ‘관점들의 공간’, 피에르 부르디외)

 

 

총 3권으로 이루어진 「세계의 비참」 중 1권은 이러한 곳에서 사는 이민자들과 도시 주류집단에서 배제된 채 빈민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공권력의 말단에 있는 공무원들의 이야기이다.

특히 이민자들과의 갈등이 책의 배경이 된 80년대 말, 90년대 초 그 이전부터 지속되어 왔고 지금도 여전하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이 동네처럼 세련되고 우아한 상류주택가에 아랍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걸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겁니다.” (p.56)

 

“아, 아무것도 서로 맞는 게 없어요. 하나도 없지요. 서로 잘 이해가 안 돼요. 머지않아 여기도 다른 곳의 빈민주택 지구처럼 되고 말 겁니다. 아랍인들은 마치 여기가 자기네 나라인 것처럼 자기들 식으로 엉망으로 만들었다니까요. 아예 자기들 나라에 와 있다고 생각하나 봐요.” (p.71)

 

“자신이 한때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해 온 사람이면서도, 여름에 특히 라마단 기간 동안에 아파트 건물 안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와 소음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말하고 있으며, 오랜 공산주의 투사들이었던 이들 부부가 이전에도 똑같은 이유로 해서 자신들의 모든 신념을 잃어버렸다는 생각 때문에 절망을 느끼면서 이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p.28, '종키 가‘, 피에르 부르디외)

 

거국적인 투쟁과 혁명을 통해 이룩한 세계 최고의 민주적 정치제도 하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불편함’이 내 것이 되어버리면 아무 소용없다.

내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위해 투쟁한 전사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낮에는 ‘해방’, ‘투쟁’, ‘민중’을 부르짖다가도 밤에 옆집 이민자 가정의 냄새와 소음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율배반적인 멸시를 자행한다.

 

“프랑스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정부에서 아랍인들, 말하자면 우리 동족들을 이곳에 보냈지요. 우리를 이곳에 살게 한 것은 우선 정부 측이고, 그 다음엔 경찰청, 사회복지 기관, 그리고 구청입니다.” (p.196)

 

“알제리인, 튀니지인, 모로코인들은 모두 ‘아랍인’이라는 한 마디로 불릴 뿐이에요. 저처럼 그냥 ‘이민자’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구요. 예전에는 당신들이 필요하다고 해서 그들을 아프리카에서 불러 왔고, 그들이 당신들의 프랑스라는 나라를 건설해 놓고 나니까, 이제 와서는 더 이상 그들이 필요 없다는 겁니까? 그러면 안 되지요. 앞뒤가 안 맞지 않습니까? 당신들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리고 당신들은 저보다 뭐 특별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모두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같이 살아가면서 서로 도와야 해요.” (p.204, ‘HLM의 한 입주자와 함께’)

 

“사회보장 제도가 한 일이라곤 이 사람들을 함께 몰려 있게 만든 것뿐이에요.” (p.43)

 

알제리인, 튀니지인, 모로코인들은 모두 다르지만 프랑스인들에게는 모두 ‘아랍인’으로 여겨진다는 현실. 이것이다. 이것이 유럽에서도 가장 민주적이고 문화적 수준이 높다고 믿어지던 프랑스의 현실이었다.

 

“오늘날 ‘문젯거리가 되는 교외 지역’ 게토, 사실 미국의 게토만큼 이 원리를 잘 보여 주는 곳은 없다. 내팽개쳐진 장소인 게토는 근본적으로 ‘부재(不在)’라는 말로 정의될 수 있는 장소로서, 우선 그곳엔 국가가 부재하며, 그밖에 경찰·학교·보건위생 기관 등이 부재하다.” (p.259, ‘장소의 효과’, 피에르 부르디외)

 

필요할 때는 너도나도 ‘프랑스에 와서 돈도 벌고 성공하라’ 라고 했지만 결국 책임은 아무도지지 않았다. 그냥 ‘니가 알아서 살아’ 라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처음 이민을 장려했을 때 그들을 통해 달성하기를 기대했던 ‘수익’이 이민자들에게 들어가는 국가적 ‘비용’보다 작아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국가는 그들에게서 손을 놓았다고 보는 것이 분명할 것이다.

 

 

“사르트르는 자신이 자신에게 하는 거짓말을 악한 신념이라고 불렀다. 국가의 공적인 소명에 부합하는 실제적인 행위들이나 조치들을 거부하거나 국가 기관의 변함없는 성향을 일컬어 기관의 악한 신념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p.384)

 

책에 인용된 사르트르의 ‘국가의 악한 신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국가는 공적인 소명과 책임이 있다. 하지만 변함없이, 한결같이 국가는 그것에 대한 책임과 소명을 등한시 해왔다. 국가는 반드시 국가에 속한 국민과 그 국가 안에 살고 있는 자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적어도 그것이 가장 중요한 국가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자신에게 하는 거짓말은 아주 나쁜 것이지만 내가 모른 척만 하면 아무도 알 수 없다는 은밀성이 있기에 유혹이 심하다. 그런데 국가는 이러한 은밀한 유혹에 매번 넘어간다. 유혹을 하기도 전에 미리 나서서 유혹해 달라고 한다.

 

책을 읽으며 줄곧 들었던 생각이 하나 있다.

‘프랑스도 저렇다면 다른 나라는 어떨까?’ 라는 생각이다.

가장 발전된 민주주의와 정치제도를 가지고 있다고 공인되던 프랑스가 아닌가.

 

그리고 최근 몇 년간 뼈저리게 경험해 온 ‘국가의 악한 신념’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국가가 제 할 일을 하지 않고 제 주머니 잇속만 챙기기에 혈안이 된 악하고 파렴치한 존재들이다. 그래서 반드시 이들을 심판하고 단죄해야 한다. 지금보다는 조금이라도 ‘악한 신념’을 덜 가진 자들에게 국가를 맡겨야 한다.

 

이것이 숙제이자 소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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