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 흐름출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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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김 서방 축하하네! 축하해

장모님의 격한 축하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기껏해야 기능사 시험에 합격했을 뿐인데, 일주일 동안의 요양보호사 일의 피로가 가신다며 나와 아내보다 더 좋아하셨다. 어머니, 이 자격증으로 선임을 걸고 몇 년 더 있어야 제가 계획한 자격증 시험을 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뿐입니다. 별거 아니에요. 이거.

장모님은 너스레로 들으시는 것 같았다.

아니야, 아니야. 일하면서 이렇게 공부해서 자격증을 떡 하니 따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장한 거야. 이거는 장해. 가만 있어 봐. 형님(아내의 큰어머니)을 내일 뵙기로 했는데, 자랑해야지. , 자랑할 일이야. 그리고 이제 밖의 일은 하지 말게.

장모님을 더는 말리지 못했다. 수년 후에 도전하게 될 자격증을 이미 딴 것처럼 좋아하시는 장모님의 아이 같은 모습이 그저 보기 좋았다.

배달해 온 치킨을 어느 때보다 맛있게 드시며 손수 내 맥주캔도 따주셨다. 민망하고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이 뒤섞여 치킨에 밴 양념처럼 진득했다.

 

나의 과거와 힐빌리

내 고향은 지방의 공업 도시다. 대규모 공업단지는 도시를 완전히 바꾸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충북 시골에서 일자리를 찾기 위해 생전 처음 내 고향으로 오셨다. 말도 설고 물도 선 그곳에서 40년을 사셨다. 어릴 때 기억을 더듬으면 유독 부모님은 향우회 모임이 많았다. ‘충청 향우회에서 체육대회와 물놀이, 야유회를 갔던 기억이 많다. 명절이 되면 버스 창문에 아버지가 다니시던 회사 이름이 적혀있고, 옆에는 목적지가 적혀있었다. 전국으로 향하는 수십 대의 버스를 배웅하는 회사의 높은 분들이 한참 동안 손을 흔들어 주던 기억도 있다. 초등학교 한 반의 학생 수가 60명이 넘었는데, 학생 중 절반 이상의 아버지가 공업단지에서 일했었다.

이 책의 주인공인 밴스가 어린 시절, 오하이오의 작은 도시는 암코의 존재를 그저 당연하게”(p.104) 여겼다. 누구나 암코에서 일했고, “암코에 취직하면 다행인 거로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p.104)라고 할 정도였다.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 같은 상투적인 일상이었다. 러스트벨트로 표현되는 미 북부와 중서부 공업제조업 지역이 쇠퇴하면서 암코를 당연히 여겼던 그들은 힐빌리가 되었다.

내 아버지가 정년퇴직하시던 즈음, 뉴스에서는 내 고향 공업단지의 쇠퇴가 심심찮게 보도되었다. 밴스처럼 유년 시절을 몹시 가난하고 비극적인 가정사 속에서 자란 것은 아니다. 공업단지의 회사에서 3교대를 하시는 아버지의 헌신 덕에 가난하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한 적은 없었다. IMF가 터지고 아버지가 큰돈을 주식으로 잃기 전까지는, 그랬다. 나쁜 일은 겹쳐서 온다는 격언 비슷한 것은 나를 피해가지 않았다. 나는 대학수학능력 시험을 망쳤고, 갑자기 나빠진 가계로 인해 재수를 할 수 없었다. 점수에 맞춰 진학한 대학은 이름조차 낯선 것이었다.

그래도 나의 과거를 밴스의 힐빌리와 동치 하려는 욕심은 없다. 힘들었지만 아버지는 열심히 일하셨고, 어머니도 일을 시작하셨다. “자그마한 우리 고향 동네에서 작년에만 수십 명이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p.22) 와 같은 약물 중독은 들어보지 못했고, “잭슨은 전체의 3분의 1에 달하는 인구가 빈곤층이며” (p.51) 점차 쇠퇴해가는 공업 도시였지만 주위에 빈곤층이 많지는 않았다. IMF로 전 국민이 힘들어하던 시기였기에 나 또한 내 인생의 미래궤도가 잠시 이탈했을 뿐, 망가지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인생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정신적·물질적 빈곤이 자녀에게 어떤 심리적 영향을 미치는지를 다른 사람들도 이해하길 바랐다.” (p.23)

나는 분명히 물질적으로 빈곤하지는 않았지만, 정신적 빈곤은 겪었던 것 같다. 부모님은 종종 다투셨는데,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시댁 문제, 교육문제 등등. 돌이켜보면 부모님은 완전히 다른 기질의 사람이었다. 한쪽이 불이면 물, 물이면 기름이었다. 정년퇴직 몇 해 전 아버지의 암 발병이 없었다면, 나와 동생이 나서서 두 분의 이혼을 진행했을 것이다. 두 분은 늘 헌신적이셨지만 늘 나와 동생을 불안하게 했다. 어린 시절 두 분의 다툼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늘 하던 다짐이 있었다.

나는 절대로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2. 나의 현재와 힐빌리

표면적으로 나의 정신적 빈곤이 밴스의 그것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나의 현재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실이다. 이혼을 앞두었던 남편의 간병을 10년 동안 해낸 어머니의 건강이 회복되는데, 2년이 걸렸다.

밴스는 여러 명의 새아버지를 거친다. 어머니는 약물에 중독되어 있었고, 자신의 직장에서 약물 검사를 하면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아들인 밴스에게 대신 소변을 받아오도록 종용한다. 칩 아저씨를 비롯한 여러 명의 새아버지를 겪으며 마침내 결론을 내린다. “마침내 내가 배운 유일한 교훈은 세상에 믿을 놈 없다는 것이었다.” (p.157) 하지만, 밴스에게는 헌신적이고 강인한 할모가 있었다. 그녀와 함께한 청소년기의 “3년의 세월이 나를 절망에서 구해냈다.” (p.231) 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해병으로 복무한 동안 힐빌리의 시골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다양한 사람들과 상황에 직면하며 자신감만 얻은 게 아니라 계획을 짜고 실행할 능력도 갖추게 됐다.” (p.297)이라고 했다.

할모라는 존재의 든든한 응원을 안고 상황에 함몰되지 않았다.

 

나도 그래야 했다.

한쪽으로 치우친 마음을 바로잡아야 했었다. 아버지의 투병과 어머니의 헌신적인 간병을 매주 지켜보며 그 상황에 함몰되지 않았어야 했다. 결혼을 약속한 애인이 있었지만, 여전히 나만의 골방에서 나오지 못한 채 갈피를 잡지 못했다. 장교로 복무하며 모아둔 돈을 다 써버렸다. 몇 년 동안 도전한 작가의 꿈은 줄어드는 잔액만큼 허무한 일이 되었다.

밴스가 해병대에서 자존감과 자신감을 회복해 로스쿨 진학을 꿈꾸었던 것처럼 내게도 반전이 필요했다. 결혼이었다. 상황에 함몰돼 가망 없는 허상을 좇던 내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을 것이다. 대출까지 있던 내가 결혼을 고민하고 있을 때 손을 잡아 일으켜 준 건 지금의 아내다. 밴스는 나보다 더 어린 나이에 스스로 터득해 일어났는데, 나는 아내의 도움을 받았다.

 

3. 나의 현재2와 힐빌리

결혼 후 밖의 일을 시작했다. 장모님이 언급했던 밖의 일이다. 책과 도서관, 키보드와 공모전 사이트를 멀리했다. 기계와 철골, 공구와 장비, 산소와 용접, 전기회로와 결선 같은 일을 하게 되었다. 위험하고 힘들고 출장이 많은 일을 시작했는데, 경력이 쌓일수록 온몸의 상처도 많아졌다. 그리고 2년 전부터는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다. 전기 및 영선분야 주임으로 일한다. 기계와 건물구조 설치 쪽 일을 하다 보니 목표와 계획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 전의 일을 하면서는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아내와 상의해 직업을 바꾸게 되었다. 이전의 일보다 월급은 적지만 시간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목표에 계획을 위해 공부하고 자격증을 취득하고 있는 현재2.

 

밴스는 새롭게 생긴 목표를 위해 노력했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에서 아이비리그에 진학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p.313)처럼 힐빌리에서 용이 났다. 아이비리그에 진학해 “‘사회적 자본으로 표현되는 인맥을 형성” (p.345) 해 높은 연봉을 받고 훌륭한 아내와 함께 살게 되었다. 힐빌리의 암흑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현재를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가난해도 주립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아니, 가르쳐 줄 수 없었다. 여전히 천조국으로 불리며 영어를 경배하는 사람들에게 아메리칸 드림으로 불리는 미국에서도 이런 힐빌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몇 해 전 트럼프가 이런 힐빌리를 위시한 백인 계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것을 떠올려본다. 그들의 피해의식과 울분이 트럼프를 향한 지지로 몰렸으나, 러스트벨트와 힐빌리는 트럼프 시대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언제까지 국가와 사회의 도움만을 기다릴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책을 성공스토리를 으스대며 자랑하는 정도로 읽을 수 없는 이유는 나의 과거와 현재에 맞물리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밴스처럼 멋진 성공신화를 쓰고 있지는 못하지만, 차근차근 내 길을 찾아 노력 중이다. 시간을 쪼개 공부하고 일하는 시간에도 최선을 다한다. 밴스에게 에이미 추아 교수가 그랬던 것처럼 멘토링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회적 자본자체의 격차가 크다. 내게 이런 길이 있으니 준비해 보라.’고 한 사람도 없다. 내가 하는 일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고심한 끝에 계획을 세웠다. 어쩌면 작가가 되겠다는 허상을 좇던 것만큼 힘든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다. 이제는 아내와 딸아이가 있다. 지치고 넘어질 때 나를 일으켜 줄 따뜻한 아내의 손과 아빠, 멋져라고 응원해 줄 자그마한 딸아이의 얼굴이 있다.

 

4. 나의 미래와 힐빌리

우리는 저녁 뉴스를 신뢰할 수 없다. 정치인도 신뢰할 수 없다.” (p.316)

저녁 뉴스는 물론 아침 뉴스 오후 뉴스도 신뢰하지 않은 지 오래다. 한국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이 정치인이다. 이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같다. 밴스는 가난을 타고났을 때 생기는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는지에 관한 나의 실제 경험담을 들려주겠다”(p.332)라는 것이 이 책의 목표라고 했다. 적어도 그의 경험담이 수천 킬로를 건너 40대 중반을 향해가는 아저씨인 내게는 큰 도움과 도전이 되었다.

이 책을 지난 대선 직후 읽은 것도 적절했다. 내가 지지하지 않은 사람이 당선되고 난 후 혼란스러웠다. 당선자를 지지한 사람들, 동료들, 가족들도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밴스의 경험담을 들으며 다짐했다. “내가 믿고 지키고 지지해야 할 존재는 내 가족이다. 이제 나와 아내, 딸아이만 보고 산다.”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남을 탓하고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매달려 봐야 나와 내 가족에게 도움 될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깨닫고 나니, 목표와 계획이 뚜렷해졌다. 뚜렷해진 것은 그대로 가슴에 새겨졌다.

한 발 한 발 힘겹게 내딛는 나의 경험담이 이후에 나의 딸에게만은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래서 딸아이에게 힐빌리의 노래가 아닌 아빠의 노래를 들려주리라 다짐한다.

 

다음번 자격증 합격 후에는 일부러 장모님을 초대해 근사한 저녁을 대접해야겠다. 장모님의 부산스럽지만 과분한 칭찬을 내심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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