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집
손원평 지음 / 창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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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버지가 꿈에 나왔어.”

5년 만이다. 유독 내 꿈에만 한 번도 찾아오지 않던 아버지셨다. 아버지를 포함한 네 식구가 등장한 꿈은 환하고 따뜻했다. ‘10년의 투병‘10년의 간병이라는 동전의 앞면이다. 원망도 체념도 할 수 없는 무기력은 줄곧 힘들었다. 임종과 장례의 과정에서도 마음껏 울 수 없었던 이유다. 그런데 5년 만의 재회에서는 그간의 일 따위는 표백된 듯 무의미했다.

 

집 안의 일은 아무도 모른다. 떠도는 말은, 부유하는 먼지일 뿐이다. 먼지가 떨어지기 전 집 안에서는 더 많은 일이 일어난다. “기한의 사건은 실족 사고로 결론 났다.” “기한은 흔히 사람들이 식물인간이라 말하는 상태가 되었다.” (p.91, <ZIP>) 결혼 생활 내내 참으며 벼르던 영화의 복수는 허무했다. 그리고 기한의 병수발은 위태롭지만 오래도록 유지됐다.” (p.93, <ZIP>) 위태롭고 지루한 병수발을 치러냈다. “한때는 분노와 복수심으로 단단하게 응집된 결심.” (p.75, <ZIP>)은 먼지처럼 부유할 뿐이었다.

 

<세상은 엿 같고, 핏줄은 더럽게 아프다>

2008년 개봉한 영화 <똥파리>를 한마디로 표현한 카피다. 학대를 당한 아들은 늙은 아버지를 학대한다. 끊고 싶지만 끊을 수 없는 핏줄이라는 끈에 자신의 목을 감은 채 부유하다 떨어진다. 집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절대로 집 밖에서는 알 수 없다. 알아서도 안 된다.

<상자 속의 남자>의 남자가 형의 비극을 보며 누군가를 돕기 위한 손길도 내밀어서는 안 된다.”라고 결심한 것은 삶이 그에게 가르쳐 준 씁쓸한 관성” (p.175, <상자 속의 남자>)이다. 상자 속의 남자를 상자 밖으로 꺼내어 줄 도움 따위는 필요 없는 것이다. <4월의 눈>의 위태로운 부부가 맞은 집 안의 상황도 알 필요 없다. “세계 각지로부터 팬레터” (p.12, <4월의 눈>)가 쏟아지는 와중에서 그들의 사이는 급격하게 나빠지고” (p.12, <4월의 눈>) 있었기 때문이다.

 

10년의 간병의 결과는 고스란히 어머니의 몸에 기록처럼 상처를 남겼다. 안 아픈 곳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은 나빠졌고 급격히 늙어갔다. 충분히 하셨다고 더 할 수 없을 만큼 잘하셨다고 집 밖의 말들이 부유해도 지난 5년간 내내 우셨다. 미안하고 불쌍하다고. 나는 자식이지만 엄마,아버지 부부의 일을 알지 못한다. 그렇게 결론 내렸다. <괴물들>의 여자는 사랑 없는 결혼과 부부생활, 능력 없는 남편으로 인한 악다구니를 어떻게든 벗어나려 몸부림친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보육교사 자격증” (p.44, <괴물들>)을 따고 직장 생활을 하며 가족을 부양한다. 쌍둥이를 키우는 것이 해가 지나갈수록 두 배, 네 배 자라나면서 여덟 배, 열여섯 배” (p.54, <괴물들>) 로 힘들다는 것을 누가 이야기해 주었다면 여자는 그렇게 아이를 가지려 노력하지 않았을까? 부모와 남편의 사랑과 관심이 배제된 여자는 스스로 그것을 개척해 내고자 자식이라는 존재를 도구로 삼으려 한 것은 아닐까? 뭐라고 떠들어 대든 내 자식들만큼은 잘 건사해내 나보다는 조금 더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것. 어쩌면 그것 또한 부유하다 떨어질 먼지 같은 허망한 욕심일 것이다.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면 아빠를. 죽일 거야. 오늘, 저녁. 우리 손으로.” (p.41, <괴물들>) 라는 비극적 메타포를 귀에 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만 비난할 수 없다. 우린 모두다, 누구나 현재보다는 조금 더 나은 삶을 꿈꾸니까. 집 안의 일조차, 부부간, 부모와 자식 간 일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주정뱅이처럼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두가 애쓰며 산다. 유튜브를 들여다보면 반지하 월세방에서 5년 만에 수십억 자산가가 된 성공 스토리가 넘쳐난다. ‘왜 아직 너는 가만히 있어. 패배자처럼.’이라며 쿵쾅거린다. 주식, 코인, 부동산 등 행복할 수 있는 길이 널려 있다고 떠든다. 그래. 거짓말은 아니겠지. 근데, 왜 내 주변엔 아무도 없는 걸까. 유튜브엔 널려 있는데.

<타인의 집>에 등장하는 희진과 재화언니, 쾌조씨와 나에게도 유튜브의 세상일 뿐이다. 갑자기 들이닥친 집주인에게 를 주고 사는 이상한 집의 형편을 들키지 않으려 연기를 한다. “거실로 집합! 막 놀러 온 것처럼 합시다, 친구인 것처럼.” (p.163, <타인의 집>) 허둥대다 친구 배역이 여긴 제 누나고, 여긴 누나 친구들이에요.” (p.163, <타인의 집>) 누나가 되고 누나 친구들이 되는 발연기를 펼친다. 유튜브에 나오는 성공스토리의 주인공일 수도 있는 30대의 집주인은 그런 발연기에는 관심조차 없는 데 말이다. “미리 알려드렸어야 했는데 미안하게 됐습니다. 집을 내놓게 됐어요.” (p.164, <타인의 집>)라는 말 한마디면 족하다.

애쓰며 살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과 이 사람들의 상황 모두 그렇다. 애써 아버지를 좋은 기억으로만 가두려 하는 어머니의 속내를 나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학대를 앙갚음하며 똥파리처럼 사는 영화의 주인공 또한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이었다. 애써서 되지 않는다.

저기는 타인의 집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솔직함이 필요하다. 의식하며 거리를 두거나 거리를 좁히려 애면글면 말아야 한다.

 

그저, ‘내 집에서만은 편하기를 꿈꾸자. 누구의 간섭과 허망하게 부유하는 말들과 의도된 알고리즘으로 시야를 흐리게 하는 스토리들은 타인의 집일 뿐이다. ‘내 집의 위치를 제대로 찾고, 그것에만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덜 아프고 덜 피곤할 것 같다. 조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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