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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라는 생활
김혜진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9월
평점 :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독서에 있어서만큼은 편식을 즐기는 터라 김혜진의 책은 언제나 구매리스트 상위에 위치한다. <중앙역>에서만큼의 강렬함은 해가 갈수록 줄어들지만, 현실에 천착한 그녀의 집요한 글은 숨 막힐 듯 흡입력이 있다. 이번 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책의 제목처럼 줄곧 ‘나’의 시선은 ‘너’에게 향해 있다.
“태비를 기다려야 하는 일이 귀찮고 번거로운 숙제처럼 여겨졌지만, 막상 너와 있으면 시간이 잘 갔다.” (p.20, <3구역, 1구역>) 처음의 ‘너’는 항상 반갑고 막역하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불문율은 언제나 그렇듯 들어맞는다. “그러니까 그 밤에 내가 실감한 건 너와의 간극이었고 격차였다.” (p.31, <3구역, 1구역>), “이대로 십 년이 가고 또 십 년이 갈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에 오싹해지면서도 네가 없는 생활은 상상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p.86, <너라는 생활>), “그러니까 이 순간에는 나를 이곳까지 끌고 온 게 너라는 확신을 지울 수가 없다. 어쩌면 내가 벗어나고자 하는 건 이 낯선 동네가 아니고 바로 너라는 사람이라는 사실도. 실은 그것이 오래전부터 내가 바라온 일이라는 것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다.” (p.114, <자정무렵>)
깨닫고 또 깨닫지만, 도무지 고칠 수 없는 모양이다. 가족도 아니고 부부도 아니고 연인도 아니며 친구도 아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 아니, 분명히 존재하지만, 모두가 한 날, 한 시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른 체할 수 있는 존재. 파트너다. 파트너? 직장 동료를 칭할 때 흔히 쓰는 말이 나와 너와의 생활에서는 어쭙잖게 얹힌다. 하지만 김혜진의 소설에서는 굳이 성 소수자를 부각하지 않는다. 성별의 문제와는 무관히 나와 너 앞에 펼쳐진 참혹한 현실을 드러낼 뿐이다. 그래서 무수히 많은 나는 무수히 많은 너를 쉬이 끊어내지 못한다.
“나로선 버틸 수밖에 없었다. 버티는 게 아니라 기다리는 거였다. 언젠간 괜찮아지겠지, 조금은 편해지겠지” (p.184, <아는 언니>)
언젠간 괜찮아지겠지. 조금은 편해지겠지. 분명히 알고 있는 답과 결말을 나도 모른 체한다. 당장 살아야 하고, 살아내야 하니까. “그럼에도 어느 주말 저녁 나는 또다시 너를 만나러 갔다.” (p.168, <우리는>) 또 너를 만나러 간다.
“그해 겨울에 너는 이직했다. 그것이 우리에게 일어난 두 번째 좋은 일이었다.” (p.212)
“광장은 이듬해 9월에 완공됐다. 그것이 우리에게 일어난 세 번째 좋은 일이었다.” (p.221, <팔복 광장>)
<팔복 광장>이 완공(완공은 되지도 않았지만)되기까지 만 2년 동안 나와 너에게 일어난 좋은 일이 세 가지뿐이라니. 암울하지만 현실이다. 그저 끊어지지 않을 만큼만 서로를 붙잡고 놓지 않는 것이다. 적어도 재개발을 두고 찬반 싸움을 하는 아저씨의 “이봐요. 그쪽은 어느 쪽이오?” (p.14, <3구역, 1구역>)라는 무던히 저급하지만 가장 현실적인 혐오와 배제에서는 손을 잡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내 편이 되어 달라는 그 흔한 부탁조차 하지 못하는 나와 너. 그리고 당신들의 현실에 응원을 보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