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즙 배달원 강정민
김현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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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한 건 아닌데, 여성 작가들의 책을 많이 읽고 있다.  한동안 자격증 공부를 하느라(또 공부해야 하는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는 것은 안 비밀책을 소홀히 했는데몇 주 동안 실컷 읽었다주로 좋아하는 작가의 책만 골라 사 읽었다김현진은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그녀의 글은 웃프다웃긴데 슬프다슬픈데 웃기다그래서 마음이 간다.

적어도 그의 책은 출간할 때마다 산다한 권을 더 사 다른 이에게 준다그냥 그러고 싶다.

이 책 녹즙 배달원 강정민」 또한 여지없이 웃프다웃기고 슬프다작가가 실제로 녹즙 배달을 한 것처럼 강정민의 삶과 김현진의 삶이 비슷하다.

 

강정민은 녹즙 배달원이다만화를 그리고 게임 캐릭터를 디자인하는 사람이지만 현실에서는 녹즙 배달원이다.

내가 엄마의 강렬한 희망이었던 간호학과를 버리고 어릴 때부터 꿈꾸던 만화가그러니까 웹툰 작가가 되기 위해 만화과를 택한다고 하자 엄마는 등록금을 단 한 푼도 대줄 수 없다고 선언했다.” (p.23)

등록금을 단 한 푼도 대주지 않은 부모 때문에 홀로 모든 것을 견뎌야 했다열심히 일하며 공부해 회사에 들어갔지만게임 캐릭터를 오로지 성 상품화시키는 것에 혈안이 된 회사에서 그림이 망가진다그림만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몸도 마음도 망가졌다같이 일하던 신대리라는 놈은 일부러 성인용 애니메이션을 가져오기도 하는 성희롱을 한다.

나도 결혼을 하기 전에는 성차별성희롱성추행 이런 것들이 남의 일로만 여겼다여성들이 반복적무차별적으로 겪는 일상이라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급하게 잡아 올라탄 택시에서 씨발오늘 첫 개시 조졌네.”라는 말을 들어야 하고 등하교 버스 안에서 무시로 뻗쳐 오는 남성들의 시선과 손길을 견뎌야 했다는 것들을 전혀 알지 못했다단지 남자기 때문에 인생을 살며 단 한 번도 겪지 않았던 일이 여자에게는 너무나 많았다우리 부모 세대에서는 그런 일이 흔했다고 하더라가 아니었다지금도 여전한 일이다김현진은 이 소재를 그의 작품 내내 소개한다캐릭터와 사건에 녹여 낸다그래서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다시 한번 확인하고 각인한다.

 

그래맞다이년아네가 어쩔래?”

남이면 고소라도 할 텐데진짜.”

고소얘 말하는 꼬라지 좀 봐가족끼리 서로 돕고 사는 거지네 오빠가 너 결혼할 때 가만있겠냐?” (p.158)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이거다그래도 부모님인데그래도 가족인데.” (p.159)

 

그래도 가족에게 늘 치인다불쌍할 정도로 치인다뼈 빠지게 벌어온 돈을 훔쳐 하나님이 준 거라고 발뺌하는 그들 때문에 하나님과도 친해질 수” 없다유일한 친구는 술이다.

알코올중독자라고 시인할 정도다한 번씩 필름이 끊길 정도로 마실 때마다 술자리에 함께한 남자와 모텔에서 함께 아침을 맞는 끔찍함을 매번 겪는다하지만 그 끔찍함을 또 깜찍하게 이겨내는 것이 술이다.

 

그래서 오늘은 소맥너와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했어그냥 냉장고에서 오래 묵은 아무 반찬심지어 신김치 쪼가리만 곁들여도 나를 기꺼이 포근하게 안아주는 너.” (p.9)

기꺼이 포근하게 안아주는 너는 술뿐이기 때문에정민아너를 어쩌면 좋냐.

 

오늘도 익숙한 메일이 왔다강정민님 님께서는 저희 회사가 원하는 인재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어쩌고저쩌고 귀하의 건승을 빕니다.” (p.255)

지원하는 회사에서는 매번 귀하의 건승을 빈다는 거짓부렁의 메일만 받는다잠시만잠시만 하던 녹즙 배달이 주업이 되어 버렸다자신은 절대로 앉아 일할 수 없는 대기업의 높은 빌딩 안에 있는 콧대 높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고 조롱을 견뎌내며 술로 버틴다술이 아니면 무엇으로 버티나.

 

“24개월을 술을 한 방울도 드시지 않았다이러면 이건 알코올 완치 판정으로 봅니다.” (p.395)

 

그런 강정민이 알코올 완치 판정을 받았다뜬금없었다나는 실패할 줄 알았다뭐 조금씩 줄여가는 정도면 좋겠다강정민은 건강을 해치지 않는 정도로 술을 마셔주었으면 했다아니이건 또 무슨 고약한 심술인가건강을 해치지 않는 술은 없는데 말이다술을 끊은 강정민의 앞길이 어떨지는 모른다좋은 곳에 취직해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마음껏 그릴 것인지녹즙 배달로 전국 1등을 할 것인지여전히 버는 족족 가족에게 돈을 뺏길 것인지녹즙이고 그림이고 아무것도 개선이 없는 채 또다시 술에 빠져들지.

나는 좋은 쪽으로 기대하고 싶다작가가 아프지 않고 오래도록 글을 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늘 있는 것처럼강정민도 행복했으면 좋겠다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더라도 가족과 술에만 매여 강정민 자신을 잊은 채 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이지안이 이르렀던 편안함은 판타지다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이지안이 마지막 장면에서 보였던 작은 웃음 정도는 강정민도 보여주기를 바란다녹즙이 든 큰 가방을 메고 있든머리를 쥐어 짜내며 태블릿 PC에 그림을 그리고 있든 상관없이 말이다.

 

언제나 그렇듯가장 고마운 것은 바로 당신이 책을 집어 들어준 독자 여러분게다가 역병이 도는 바람에 다들 먹고살기 어려워 책 한 권 사는 것이 사치가 되어버린 세상에 굳이 이 책을 사준 당신당신이야말로 나를 늘 살아 있게 해준살아 있어도 된다고 해준계속 살라고 해준바로 그 사람이다당신 덕분에 계속 살고웃고쓸 것이다.” (p.416)

 

언제나 그렇듯재미있고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어 고마울 따름이다책 한 권 사는 것이 아직은 사치가 아닌 형편이라 다행이기도 하다.

고되게 쓰시고햇살처럼 웃으시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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