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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폼 ㅣ 소설문학 소설선
박영희 지음 / 북인 / 2019년 7월
평점 :
본가 안방에 큰 액자 몇 개가 걸려 있다. 하나를 제외하면 모두 가족사진이다. 여느 집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액자. 제외한 하나는 소위 임관식 때 찍은 내 독사진이다. 20년 전 앳된 내 모습은 볼 때마다 새롭고 놀랍다. 세월의 야속함을 매번 확인하면서 놀라고 사진 속 내가 육군정복 유니폼을 입고 짓고 있는 근엄한 표정에 더욱 놀란다. 부모님은 내가 직업군인을 되고 동생이 직업 경찰이 된 것에 자랑스러워하셨다. 소위 계급장을 달고 어리바리하고 있을 때, 어머니는 그렇게 자랑을 하셨다고 했다. 그 자랑이 3년밖에 지속 되지 않은 건, 상의 없이 장기복무를 신청하지 않고 전역하겠다는 말씀을 드린 후부터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직업이 3번 바뀌었는데, 2번째와 현재 직장에서만 유니폼을 입고 있다. 2번째 유니폼도 꽤 자랑스러워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차려진 장례식장에 유니폼에 새겨진 글자와 똑같은 글자가 새겨진 장례 물품이 가득 도착했다. 화환도 있었다.
“그래도, 00 엄마는 그래도 자식 복은 있어. 두 형제 다 저렇게 좋은 직장에 다니고 결혼도 다 하고, 손주들까지 있고 말이야.”라는 위로가 어머니께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지금 현재 입고 있는 3번째 유니폼은 마뜩잖아하신다. 다행히 동생은 아직 경찰 유니폼을 입고 있어, 내가 줄곧 드리고 있는 실망이 다소나마 상쇄되고 있다.
“게이트 안으로 들어서서 손을 흔드는 희진의 푸른 희망에 다 부르지 못한 젊은 날의 팡파레를 힘차게 불어본다.” (p.215)
어머니도 내 등을 뒤에서 보시며 이런 생각을 하셨을까? 극구 딸의 진학을 반대하신 외할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종종 들었다. 남동생들 다 나온 고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셨다. 어머니가 못다 부른 팡파레를 내가 부르고 있는 걸까. 라는 생각에까지 미치면, 죄송한 마음뿐이다.
“어떤 경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산뜻한 유니폼을 입고 은행 창구에 앉아 있는 여직원들의 얼굴을 뜯어봐도 눈에 띄는 얼굴도 없었다. 내 딸이지만 쟤들과 비교해도 하나도 꿀릴 게 없어 보였다.” (p.9)
내가 아이를 키우고 학부모가 되니, 어머니와 희진 엄마의 마음을 조금은 알 듯하다. 유치원에 가고 초등학교에 가면서 자연스레 내 아이를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게 된다. 조금 더 두각을 보였으면 싶고, 조금 더 나은 소리를 듣고 싶다. 꿀릴 게 없어 보이는데, 앞서나가지도 못하고 더 안정된 자리를 찾아내지 못하는 나를 보며 희진의 엄마처럼 내 어머니도 안타까워하셨겠지.
“그럼요, 고안나 주임님. 전 그저 짝퉁 말고 진짜 땡땡이 유니폼만 입으면 되니까 지금껏 보여주신 지랄도 이해하고 앞으로 보여주실 어떤 초특급 지랄발광도 다 이해할 것입니다.” (p.31)
미정은 지방이지만 국립대 영문과를 나온 딸의 거듭된 취업 실패를 안타까워하며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다. 유망한 조미료 회사 수습직원으로 들어가 만난 고안나 주임의 무자비한 조련과 폭언에 놀라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머지않아 고안나 주임과 같은 정규직 유니폼을 입을 수 있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고안나 주임도 기가 빠지게 혼낸 뒤 꼭 덧붙였다. “내 말만 잘 듣고, 하라는 대로하면 유니폼 입을 수 있다.”라고.
“저 또라이 같은 것 때문에 지금 그만두면 앞으로 난 아무것도 못 할 거야. 살면서 저런 인간 다시 만나지 말라는 법 있어? 아니잖아. 견뎌낼 거야. 이겨내서 꼭 유니폼을 입을 거야. 싸구려 땜질 유니폼이 아닌 회사 로고가 박힌 진짜 유니폼을 입을 거라고.” (p.145)
회사 로고가 떡 하니 박힌 진짜 유니폼만 입을 수 있다면 지금의 고난과 역경은 참을 수 있는 것이었다. “주눅 들었던 내 자존심도 성적도 가난도 모두 잊힐 만큼 힘이 셌다.”고 할 만큼 유니폼은 대단한 것이었다. 상승한 신분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유니폼으로 알 수 있고, 조미료가 납품되는 매장에서도 쉽게 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참고 또 참았다. 동네 오빠 성현 만나기 전까지는.
“제일제당 영업부 대리 김성현.”
“김성현 대리라고? 성현 오빠 옆자리에 앉아 오빠의 옆모습을 슬쩍 훔쳐봤다. 예전에는 몰랐던 오빠의 시원하게 뻗은 콧날이 남자답게 느껴졌다.” (p.87)
호감을 느끼고 있던 동네 오빠가 하필이면 경쟁사에서 일하고 있다. 안 풀려도 참 안 풀린다. 예전에는 모르던 오빠의 매력이 “제일제당”이라는 명찰에서 가중되었다. 한참 경쟁사와 미묘한 갈등 중에 있는 터라 입조심 또 입조심 했지만,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흘러가듯 얘기한 정보를 미리 알고 경쟁사에서 더 크게 홍보를 벌인 것이다. 시원하게 뻗은 콧날을 가진 경쟁사 총각과 아는 사이인 것을 알고 나서, 더 혹독하게 미정을 대한 고안나 주임은 바로 미정을 의심한다. 앞뒤 없이 밀고 들어오는 불도저 같은 공격에 미정은 유니폼이고 정규직이고 뭐고, 이성의 끈을 놓는다.
“미친 건 내가 아니고 너야!”
“너? 너라고 했어? 이게 간덩이가 아주 처부었구나. 위아래도 안 보이는 게. 너 지금 하는 짓거리 이거 유니폼 안 입겠다는 소리 맞아?”(p.189)
미정은 멋진 정규직 유니폼을 입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걷어차 버렸다. 자존감을 바닥까지 곤두박질치게 만드는 압박과 폭언은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고 주임에게 도둑년으로 취급받고 믿었던 동네 오빠에게 배신 아닌 배신을 당하면서 누더기가 된 채 유니폼을 입기는 싫었다.
“계약직은 유전된다.” (p.8)
열심히 살고 최선을 다해 아이를 키워 교육했지만 취직을 못 한다. 하더라도 정규직이 되지 못한 채 유니폼을 벗는다. 30년 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딸에게서 반복된다. 채근하고 달래고 어르는 것도 정도가 있다. 미정은 자신의 지난날을 한참을 돌아보고 난 후 희진의 결정에 동의한다. 베트남으로 간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딸의 새로운 도전을 응원하기도 한 것이다.
나는 내 어머니의 처녀 시절 공장에서 일한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당신의 군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단 한 번도 나와 동생에게 군대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던 것과 같은 이유라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상의도 없이 장교 유니폼을 벗었을 때도, 누구나 알만한 큰 회사의 유니폼을 벗었을 때도 어머니는 긴말하지 않으셨다. 내가 천천히 설명해 드릴 때까지 기다리셨다. 그것이 공항 게이트 안으로 향하는 희진을 향한 미정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자식의 뒷모습을 보고 한 번 더 믿어주는 기다림. 가슴이 닳아 없어질 듯 아프지만 내색하지 않고 뒤돌아서 눈물 훔치는 애절함. 미정에게서 내 어머니를 발견하고, 희진에게서 지금의 나를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