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 자기 삶의 언어를 찾는 열네 번의 시 강의
정재찬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윤동주의 십자가’.”

라고 대답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시, 가장 감동한 시, 가장 인상 깊은 시 등을 물었을 때 늘 하던 대답이다. 실제로 그랬다.

대학 1학년 봄, ‘십자가를 읽고 펑펑 울었다. 처음 본 것이 아니었지만, 한 구절 한 단어 가슴에 박혔다. ‘라는 인간의 실존적 고민과 장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잠들지 못했던 밤이었다. 작은 자취방의 작은 책장에 꽂힌 시집을 꺼내 들고 십자가를 읽었다. 내 두려움에 대해 폭풍과 같은 위로를 받았다. 처음 해 보는 경험이었다. 시간이 많이 지난 뒤에도 마지막 시구를 떠올리면 여전히 콧날이 시큰해져 온다.

그렇지만 이후로 시를 탐닉하거나 시집을 사 모으지는 않았다. ‘십자가가 유일했다. 유일했기 때문에 고민하지 않고 단번에 대답했었던 것 같다. 내가 이용하는 인터넷 서점에서 한 번씩 빅데이터를 공개할 때가 있다. 사이트에 가입한 이후로 내 구매 패턴을 제공해주는데, 내가 구매한 책의 종류는 딱 2가지다. 문학과 정치·사회. 문학 중에서는 소설이 90% 이상이다. 시집은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솔직히 시는 어렵다. 압축적이고 상징적이기에 소설처럼 죽죽 따라 읽어 내려가기 쉽지 않다. 물론, 인상 깊은 시를 읽게 되거나 다른 책을 통해 알게 되면 그 시가 실린 시집을 구매한다. 하지만 꼼꼼히 읽지는 않게 된다.

그래도 나는 시를 좋아한다. ‘십자가를 읽고 펑펑 울며 경험한 완전한 감동과 전인격적 황홀경이 20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삶의 언어를 찾는 열네 번째 시 강의라는 이 책의 부제가 더 마음에 와닿았다. ‘십자가를 읽고 특별한 삶의 변화가 있거나 만나는 사람마다 시를 추천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내 삶의 영향을 끼치는 시의 힘을 알아서다. 책에서 소개된 시를 읽으며 현재 내 삶의 조각과 닿아있는 내용이 있는 내용에 특별히 눈이 갔다. 몇 편의 시를 소개하며 감상을 적는 것이 이 독후감의 방향이다.

나만 그렇지 않다는 것.’

 

풀어봐도 뾰족한 답이 없는 우리 집

재정 상태를 고민하느라 밤을 새느니

타자의 행복이라도 빌어주는 편이

맘 편하게 다시 잠드는 방법이란 걸

그래야 가난한 식구들 아침상이라도

차려줄 수 있다는 걸 햇수 묵어

유해진 타짜인 내가 감 잡은 거지

성미정, 읽자마자 잊혀져버려도, ‘김혜수의 행복을 비는 타자의 새벽

 

몇 해 전, 시인과 비슷한 고민으로 밤을 새는 일이 잦았었다. 몸을 혹사하며 일을 해도 형편은 좀체 나아지지 않았다. 아무리 고민하고 머리를 싸매도 답이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닌 양 드르렁 코나 골며 편히 잘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앞이 캄캄하고 왜 나만, 우리 집만 이래야 하나?’싶었다. 밤을 새는 날이 잦아지니 피곤이 쌓였고, 피곤이 쌓이니 스트레스가 복리 이자처럼 불어났다. 짜증과 화는 늘어나 가장 가까운 식구들에게도 조절이 되지 않았다. 시인처럼 김혜수의 행복이라도 빌어주지 못했다. 차려주는 아침상도 거들떠보지 않을 지경이었으니까. 돌이켜 보면 부끄럽고 미안하다. 애면글면해도 나아지지 않는 상황이 나를 집어삼키도록 방치한 것이었으니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상황이 다소 나아진 후, 식구들에게 사과했다. 돌이켜보면, ‘병 주고 약 주고였다. 또다시 미안하다. 나도 묵을 만큼 묵은 햇수인데, 아직 멀었다 싶다.

 

지나온 오십 대를 돌아봅니다. 대체 누가 아프니까 청춘이라 그랬습니까? 정말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되게 아프니까 오십입디다.” (p.109)

 

저도 되게 아프니까 사십입디다. 햇수를 묵을 만큼 묵고, 흰머리는 늘어나는데 계속 아픕디다. 삶이 아프고, 상황이 아프고, 내 몸도 구석구석 아프다. 직장과 가정에서 내가 해야 할 역할이 있고, 최선을 다해 그것을 해내더라도 결과는 여전히 아플 때가 많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만 깨달아가는 나이다. 다만, 저자가 오십이 되어도 아프다는 고백이 절절하게 다가오는 것은 나만 그렇지 않구나.’라는 위로다.

 

어른이 된다는 것.’

 

배를 곯다 집에 들어가면

현관문을 보며 밥을 먹었다

어쩐 일이니 라고 물으시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외근이라고 말씀드리면 믿으실까

거짓말은 아니니까 나는 체하지 않도록

누런 밥알을 오래 씹었다.”

최지인, 나는 벽에 붙어 잤다, ‘비정규

 

솔직히 청년층의 빈곤 문제가 와닿지 않았다. 20대 남성들의 보수화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나 또한 IMF 직후 성인이 되었다. 대학은 무한경쟁과 토익·공무원 시험에 혈안이었다. 많이 힘들었다. 그래서 지금 청년층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난 극우 정권의 잘못된 교육정책과 유튜브의 영향이라 치부했다. 그리고 라떼는 말이야를 시전하고 있었다.

지들만 힘든 줄 아네. 나 때는 진짜 얼마나 힘들었는데. 참나.’

최지인 시인의 비정규라는 시를 읽고 나서 사과했다.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들에게 사과했다. 역사의식 없고, 의지가 없고, 생각이 없다고 치부했던 그들에게.

나도 누런 밥알오래 씹은적이 있다. 좁은 자취방에서 며칠이나 지난 밥을 오래 씹은 적이 있다. 잘 넘어가지 않아 김칫국물을 들이부어 후루룩 마셨던 적이 있다. 그래서 미안했다.

왜 나는 그들에게 어른이 될수 없었나 생각했다. 괜찮다고 이해한다고 힘내라고 너희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줄 수 없었을까. 나와 정치적 성향이 맞지 않는다는 것 하나만으로 그들을 매도했다. 부끄러웠다. 내게도 어른이 없었다. 그냥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나도 어른, ‘스승을 만나 본 적이 없으니까. 라고 하는 것은 핑계다.

회사에서 만나는 동료 중 청년들이 있다. 그들에게 나는 어른일까, ‘꼰대일까 생각해보다가 얼른 접었다. 자신이 없어서.

 

세월은 안으로만 새기고, 생각은 여전히 푸르른 희망으로 가득 찬 사람, 그리하여 내년엔 더 울창해지는 사람, 그렇게 나이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어른으로 늙는 것이 아니라 어른으로 계속 커가면 좋겠습니다.” (p.198)

 

나는 전혀 어른이지 못했다. 세월을 밖으로만 아득바득 드러냈다. 생각은 꼬여 있을 때가 많았다. 그리하여 매년 흰머리만 더 울창해졌다. 이렇게 나이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을 최지인 시인의 비정규를 읽으며 또렷하게 깨닫는다. 늙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흰머리만 무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내 잣대로만 판단하고 평가하는 사람이 아니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잔잔하고 푸르른 위로를 건네는 어른이 되고 싶다.

 

책에는 좋은 시들을 많이 소개하고 있다. 나처럼 시를 어려워하거나 평소에 곁에 두지 않는 사람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의미를 해석하고 행간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 선배가 툭툭 던지는 조언처럼 와닿아 책과 시가 잘 읽힌다. 지시하거나 평가하지 않는다. 저자의 열네 가지 강의도 일방적이지 않다.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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