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나의 자서전 - 김혜진 소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4
김혜진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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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특혜였다.”

 

서울의 공공기관 사장 후보자로 내정된 사람의 해명이다. 시대적 특혜라니. 차라리 비문이었으면 싶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기득권 중 기득권에 있는 사람이 어쩔 수 없이 하는 해명에 나는 아연실색 했다. 공공기관 사장 후보에 나오지 않았다면, 평생 하지 않아도 되었을 문장이다. 시대적 특혜라니. 그 사람이 얻은 특혜를 왜 나와 당신들은 얻지 못했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남일동을 떠났지만, 결코 떠나지 못한 이 책의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시대적 특혜 따윈 없다. 우리에게는.

 

우리는 남일동에서 살았다고 할 수도 없다. 어쩔 수 없이 몇 년 그 동네에 있었던 거지 어디 가서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마라.” (p.29)

 

남일동에 살았지만 살았다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은 스스로 만든 것이다. 어려서부터 홍은 너는 이 동네 애들과 달라.” 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함께 놀던 아이들에게 무심히 던지는 어머니의 말은 홍에게 그대로 체화된 것일 테다. 한여름 땀에 흥건히 젖은 셔츠 깃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땀 냄새처럼 말이다. 의식하지 않으려 할수록 또렷해지는 욕망의 덩어리를 발견하는 순간 말이다. 어머니의 걸음에 맞추느라 거의 뛰다시피 하면서도 나는 어머니의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손안에서 느껴지는 어머니의 무섭도록 뜨거운 체온이 나를 조마조마하게 만든 탓입니다.아이였던 홍은 어머니의 손을 놓을 수 없다. 주변부로 밀려난 부모의 손을 놓으면 그대로 낭떠러지다. 시대적 특혜를 입으신 분들에게는 사소한 실패와 가치 있는 실험 정도일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는 배제다. 제외되는 것이다.

 

으레 그렇듯 어린아이에게 부모는 절대적이다. 부모의 작은 몸짓과 사소한 표정을 아이는 스펀지처럼 빨아들여 재생산한다. 그런 것보다 더 크게 느껴진 건 어머니를 둘러싸고 있는 슬픔의 기운이었습니다. 부모님의 감정이란 언제나 더 부풀려지고 또렷해져서 아이들에게 가닿는 법이니까요.” 부모가 남일동에 살면서도 마치 살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해 어린 홍은 양가적 감정을 가져야 했지만, 너무 어렸다. 그냥, 이상했던 거다. 분명 나와 다르지 않은 아이들인데, 달라야만 했던 것.

 

괜찮아요. 홍이 씨, 힘들면 그만 해도 돼요.” (p.43)

 

그런 홍에게 괜찮다.”고 말하는 주해가 나타난다. 직장에서 바른 소리 하다 퇴사 당한 채 백수로 빈둥대며 살아도, 남일동을 떠났지만, 여전히 남일동을 떠나지 못한 채 지내도 괜찮다고 한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떨어지기 싫었지만, 엄마의 손은 더더욱 놓기 싫었던 것처럼 홍은 주해와 그녀의 딸에게 멀어지듯 친밀해진다. 비로소 양가적 감정을 가질 수 있는 성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주변부다.

 

마을버스가 들어오고 나서는 주해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게 되었습니다. 주해를 모르는 사람도 마을버스 들여온 새댁이요, 하면 곧장 주해의 얼굴을 떠올리게 된 것입니다.” (p.52)

 

내가 이러는 거 다른 사람들 좋으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필요해서 하는 일이에요.” 주해는 살기 위해 남일동으로 들어왔다. 홍은 공간적 남일동에 그치지 않고 심리적 남일동에서 안주한다. 주해 모녀와 가까워지는 것을 경계했지만 가까워졌고 급기야 주해의 딸을 돌봐주며 수고비를 받기까지 했다. 애초 의도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가까워지며 서로를 의지한다. 배제된 이들은 서로 어깨라도 내어주고 있어야 어김없이 찾아오는 악다구니 같은 일상을 버틸 수 있다.

 

나 그 새댁 그렇게 안 봤는데 참 무서운 사람이데. 그쪽도 감쪽같이 몰랐지? 그래서 그 일은 결판났어요? 어떻게 됐대요?” (p.162)

 

악다구니를 더욱 처절하게 만드는 것은 불신과 왜곡이다. 주해로 인해 폐허가 조금씩 변해가는 것을 함께 기뻐한 것도 잠시. 외부로부터 흘러들어온 달콤한 조장과 왜곡은 배제된 이들의 악다구니를 단숨에 폭발시킨다.

결국, 주해 모녀는 남일동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홍은 결심한다. 부싯돌에서 마침내 조그마한 불꽃이 솟아나고 주해로 인해 바뀌어 가던 남일동의 모습에서 발견한 조그마한 불꽃을 그냥 두지 않겠다고. 주해가 떠난 후, 남일동은 금세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이곳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어떻게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제자리를 찾아간다. 남일동 사람들은 주해가 일으킨 불꽃을 짓이겨 꺼버렸다. 그리고 스스로 배제된 악다구니 속으로 기어들어 간다. 홍의 결심은 행동으로 옮겨졌지만, 그것마저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

 

지난달, 남일동 제일약국 건물이 철거되었습니다.”

 

남일동의 구심점이던 제일약국이 철거되어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전히 남일동에서의 과거를 부정하는 홍의 부모, 살아남기 위해 어딘가에서 애를 쓰고 있을 주해, TV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멋지게 재개발될 남일동을 기대하며 스스로를 배제시킨 채 살아가는 남일동 사람들. 남일동에도, 부모가 사는 중앙동에도 발을 딛지 못한 채 표류하는 홍에게도 변하는 것은 없다.

 

시대적 특혜였다.”

라는 비문을 해명이랍시고 당당하게 밝히는 기득권, 부자들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공공기관 사장 정도 하지 않아도 잘 먹고, 잘사는 건 당연한 거니까.

그리고, 아주 쉽게 잊히니까.

 

시대적 특혜라는 비문을 남긴 후보자가 공공기관 사장이 되어 남일동에 대한 선심성 공약을 발표한다면 어떻게 될까? 남일동 사람들은 180도 바뀔 것이다. 남일동뿐만 아니라 대부분, 나와 당신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정부의 코로나 방역 대책과 백신 접종에 대해 무수한 비판을 하던 사람들이 막상 백신 접종 예약이 시작되자, 누구보다 빠르고 신속하게 예약하던 어처구니없는 상황과 똑같다. 현대자동차 노조의 업무 태만과 지속되는 파업과 시위에 대해서 욕하는 한편, 그 노조에 속하고 싶어 한다. 심리학적으로 가지기 어려운 양가적 감정이 나와 당신들, 우리들에게는 너무 쉽고 간편하다. 온갖 거짓과 가짜 정보가 판을 치고, 혐오와 배제가 일상이 된 악다구니 속에서 칼에 찔리고 몽둥이에 맞은 채 하루를 산다. 겨우 비집고 들어간 악다구니의 틈바구니에서 씨익 한 번 웃을 수 있는 것은 나와 당신들, 우리가 다르지 않다는 존재적 무력의 확인뿐이다.

오늘도 살아내야 할 서글픈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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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11-07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lmicah 2021-11-30 19:4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thkang1001 2021-11-07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Imicah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앞으로도 계속 좋은 글을 많이 써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lmicah 2021-11-30 19:49   좋아요 0 | URL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