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행복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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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싸이월드 홈피를 보는 순간 나는 경악했다.

알바 시간에 쫓겨 급하게 뛰어나갔는데, 로그아웃을 하지 않았다. 나는 홀린 듯 그의 홈피를 훑었다.

젠장, 내게 했던 말과 행동이 전부 거짓이었다. 나를 제외한 타인들의 그를 향한 공격과 비난이 거의 사실이었다. 나는 그를 위해 대신 맞고 대신 욕 먹었는데, 모두 헛일이었다. 당장 불러세워 자초지종을 따져 묻고 절연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나는 이미, 그에게 가스라이팅 되고 있었다. 그때는 그런 줄 전혀 몰랐으니까. 끝까지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게 믿음이고, 의리이며 아무도 모르는 나와 그와의 관계가 갖는 특별함이라 생각했다.

 

어릴 때도 그랬고, 처음엔 나르시시스트인 줄 몰랐는데 관계에서 벗어난 후 그런 관계였구나. 조종당했구나라는 걸 알게 된 인간관계도 있었어요.

 

나를 가스라이팅 했던 그는 나르시시스트는 아니었다. 구구절절 사연이 많고, 불쌍한. 동정심을 유발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중에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위해 공부하고 일해가며 악착같이 삶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도 나르시시스트였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알지 못했을 뿐. 내가 그를 통제하고, 보호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었다. 착각이었다. 나는 그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뒷골이 서늘했다.

10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이 책을 읽고 작가의 책에 대한 인터뷰를 읽으며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10년 전, 그와 나와의 진짜 관계를.

 

자기, 나랑 왜 결혼했어?”

왜 했을까. 그때의 그는 신유나의 행성이었다. 매일 매 순간 그녀를 생각했다.” (p.518)

 

신유나의 행성처럼 맴도는 인물들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쯤, 10년 전 내 모습이 차츰 오버랩되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시감이 두려웠다. 10년 전 추억 정도로 잊었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유나의 행성으로 맴도는 인물들처럼 나도 여전히 그의 궤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유나의 갈색 눈동자를 잠자코 쳐다봤다. 늘 느끼는 바지만, 참으로 경이로운 아이였다. 어쩌면 저리도 자기 눈동자를 손가락처럼 다룰 수 있는지. 얼음장 같았다가, 칼날 같았다가, 별빛 같았다가, 봄 햇살 같았다가.” (p.294)

 

어렸을 때부터 동생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사는 언니의 눈에 비친 유나의 모습이다.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된 실제 사건의 범인과 작품의 유나를 가장 잘 묘사하는 부분이다. 나는 섬뜩했다. 작가가 인터뷰에서 표현한 악성 나르시시스트의 모습 그 자체이다. TV 프로그램에 등장했던 실제 사건 범인의 모습과도 거의 흡사하다. 끔찍한 범행을 저질렀다고 보기 힘든 외모였다. 모자이크 처리된 실루엣만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쉽사리 동정을 일으킬만한 외모였다. 하얀 얼굴과 가녀린 몸매를 지닌 채 무자비하게 상대를 무너뜨린다. 범인도 그렇고, 유나도 그렇다. 당할 것을 예상하고도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녀가 앉은 식탁에 앉게 되고, 불행은 반복된다.

 

엄마는 규칙을 정하는 사람이었다. 규칙을 어기면 벌을 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엄마에겐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았다. 용서를 빈다고 용서해준 적도 없다. 지유는 가차 없이 벌을 받아야 했다. 고아가 되는 벌이었다.” (p.31)

 

유나에게 딸인 지유와 언니인 재인은 철저하게 종속된 존재여야 한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 하는 존재다. 나는 엄마를 대하는 지유의 모습이 아슬아슬했다. 살얼음을 밟는 것처럼 조마조마했다. “왜 그렇게 두리번거리니?”, “고갯짓하지 말라고 했지?”라는 유나의 목소리에 지유는 얼어붙는다.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늘 그래왔듯이. 아빠와 새아빠에게도 속내를 털어놓지 못한다.

아빠는 왜 휴대전화를 놔두고 갔어요?”“오늘 새벽에 2층엔 왜 갔어요?”. 지유는 모두 목격하고 엄마의 범행을 알고 있었지만, 엄마도 지켜야 했다. 본능적으로. 그저, 요망한 생쥐가 꾐에 넘어가 엄마를 향한 작은 반항을 할 뿐이었다. ‘요망이라고 표현될 뿐, 사실 생쥐는 지유의 존재 자체다. 독자를 향한 속임수다. 결국, 살아남는 지유를 향한 복선이다.

 

아빠한테 이르기만 해봐. 저 오리처럼 만들어줄 테니까.” (p.160)

마지막 인형은 사람이 아니었다. 고무줄로 의자 등받이에 꽁꽁 묶어놓은 오리였다. 눈알 한쪽이 뽑히고, 배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 물갈퀴가 갈기갈기 찢겨나간 오리였다. 다른 가족처럼 오리도 이름표를 차고 있었다.”

재인.” (p.157)

 

요망한 생쥐 덕에 발견한 오리인형은 이모이자 유나의 언니인 재인의 모습이다. 흉측한 오리 인형의 모습으로 잠긴 방안에 방치되었다. 그것을 조카인 지유가 발견한다.

행복은 뺄셈이야. 완전해질 때까지, 불행의 가능성을 없애가는 거.” 유나에게 언니인 재인의 존재는 뺄셈이다. 두 명의 남편, 재혼한 남편의 아들, 딸까지. 모두 뺄셈을 해야 할 성가신 존재일 뿐이다. 유나에게 타인의 존재는 불행의 가능성일 뿐이다. 불쌍하고 참담한 인생이라 생각되지만, 유나는 이것에 천착한다. 삶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딸아이와 함께 있는 공간에서 살인을 저지른다. 그녀에게 살인은 그저 뺄셈일 뿐이니, 쉽고 간편하며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지유가 이유를 묻자 엄마는 이렇게 대답했다. 너는 내 작품이니까. 하지만. 이라고 토를 달자 엄마는 되물었다. 지유가 그린 그림은 누구의 것이지? 비로소 지유는 이해했다. 자신은 엄마의 것이었다.” (p.403)

 

무섭고 절대적인 엄마라는 존재가 그래도 지유에게는 있는 게 나은 것일까? 차라리 엄마의 형벌이 아닌 진짜 고아가 되는 게 나은 것일까? 작품을 읽는 내내 고민하고 지유와 비슷한 나이의 딸을 키우는 아빠 마음으로 지유를 상상하다 보니 너무 불쌍하고 안쓰러웠다. 하지만 기우였다. 작품의 결말로 향하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나는 탄식하듯 혼잣말을 내뱉었다. “지유가 대단한 아이구나.”라고. 저 감자튀김은 짜고 물컹거릴 거야. 불고기버거는 달고 느끼해 콜라는 김이 다 빠졌어. 먹으면 토할지도 몰라. 해피밀 세트는 아빠 혼자 다 먹었다.” 철저하게 엄마에게 종속되어, 그렇게 먹고 싶은 해피밀 세트를 입에 대지도 않았던 지유다. 아빠를 기억해 내고, 지우지 않기 위해 아빠 인형을 부둥켜안는다. 하지만, 이미 존재하지 않는 아빠에게만 함몰되지 않는다. 지유는 곁에서 새로운 운명이라는 책을 놓지 않는다. 차 안에서도 식탁에서도 방에서도 늘 지유 곁에 있다. 과거를 분명히 기억하고 그리워하지만 미래를 지향하는 인물이다. 진취적으로 운명을 개척해 낸다. 엄마에 의해 만신창이가 된 재인을 구해낸 이도 지유다. 가장 약한 존재로 보인 재인과 지유가 마침내 악의 반복을 끊어낸다.

 

그녀는 유나를 쫓아 늪을 건너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은 유나를 쫓아간 게 아니었다. 아버지가 사랑한다고 여겼던 그녀 안의 착한 아이를 죽이러 가고 있었다. 절대로, 영원히 살아나지 못하도록.” (p.505)

 

악한 존재를 가까이에 둔 인물들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맞춰야 하고 피해를 보기 마련이다. 가장 작은 존재인 조카, 지유를 통해 재인은 비로소 구질구질한 인연의 고리를 끊는다. 굴레처럼 씌워진 부모의 기대와 부탁을 저 멀리 집어 던진다. 다행스러운 결말이다. 차마 멋진결말이라고 하지 못한 건, 이후의 일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유나가 없어진 세상이 이들에게, 특히 지유에게는 어떤 미래일까 하는 생각이 앞선다. 지유는 충분히 강하고 진취적인 인물이지만, 아이는 아이다. 확연히 단단해질 때까지 보호와 관심이 필요하다. 그것을 재인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개입하느냐에 따라 지유의 미래를 달라질 수 있다. 남겨진 이들의 숙제다.

 

작가의 이전 작품들처럼 이 책 완전한 행복도 상황과 심리묘사가 치밀하다. 책을 읽으며 영화를 보는 것처럼 상상할 수 있었다. 방 안의 공기와 인물의 표정까지 머릿속에 그려졌다. 작가의 작품을 읽는 즐거움이다.

개인적으로,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바, 작품과 인물 속에서 내 과거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는 것은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늦게나마 깨달아 다행이기는 하지만 계속 모른 채 살았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자기 자신이 특별하다는 생각을 버려야죠. 내가 인간들 사이에서 특별하게 행동해도 되고,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 하는,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을 버려야 해요. 또 나에게 오는 고통, 불행을 외면하거나 부정하면 다른 방어적인 것을 가져오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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