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기쁨과 슬픔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7살 딸아이는 거울을 자주 본다. 현관에 있는 전신거울, 자기 방에 있는 손거울, 안방에 있는 화장대 거울. 자기가 제일 예쁜 줄 안다. 외출 한번 할라치면 딸아이 치장 시간이 가장 길다. 원피스를 입고 현관 거울 앞에 서서 샌들을 신고, 운동화를 신고, 구두를 신어 본다. 팔불출 아빠인 내 탓이 가장 크다. 아무렴, 누구 딸인데.

나도 내가 잘 난 줄 알았다. 술어가 과거형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오늘은 만원 더 넣었어요.”

그제서야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p.146, <도움의 손길>)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내 집을 장만했다. 이 정도면 다 된 거다.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웃돈을 얹어 주기까지 한다. “딱히 끌리는 게 없었다. 몇 가지가 눈에 들어오긴 했다. 칠만 원짜리 무드등을 사달라긴 좀 그렇고, 그렇다고 사만 원짜리 토스터를 받자니 왠지 억울했다.” (p.23, <잘 살겠습니다>) 눈치라고는 1도 찾아볼 수 없는 빛나 언니에게 받을 결혼 선물 또한 합리적으로 결정하는 정도다. 이 정도면 다 한 거다. 그렇게 한 사회와 가정의 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해 나가는 것이다. 배달 앱을 열고 조금 더 싼 곳을 찾느라 한참을 들여다보기는 하지만 쓸 데는 쓸 줄 알고 내 몫은 챙길 줄 한다. 그렇게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옥상 온천에 올라가기 전, 방 안에서 푸시업을 했다. 오십개쯤 했을까, 귀밑에서 땀방울이 뚝 떨어졌다. 손바닥에는 다다미 자국이 깊게 남았다.” (p.78,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우연히 만난 그녀를 취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아는 사람도 없는 외국이다. 그녀도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나 정도면 충분히 매력 있고, 매력을 발산할 자신감으로 충만하다. 푸시업을 오십개나 하는 건 대단한 거다.

 

 

2. 당신

 

그런 기이한 작별인사가 끊어질 듯 이어졌고, 그렇게 끊는 자와 끊지 못하는 자의 실랑이가 한참을 더 이어진 끝에 통화가 끝났다.”

세상 질척거리는 통화였다. 심지어 나는 울고 있었다. 최악이었다. 휴대폰을 침대 위에 던져버리고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p.97,<나의후쿠오카가이드>)

 

진짜 최악이다. 내가 주도하고 있었는데, 아니 주도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녀의 손아귀였다. 취하기만 하면 옛 애인에게 카톡 하고 전화하는 질척거림이다.

나와 당신의 생각은, 당연한 것이겠지만... 너무 다르다.

 

내가 그럼 안 되겠네요’‘아쉽네요라고 채팅창에 입력하고 엔터키를 누르려는 순간, 언니의 메시지가 또다시 도착했다. 우리 둘은 따로 봐야지. 다음 주 화요일이나 수요일 점심 어때?” (p.9, <잘 살겠습니다>)

 

어쩌면 빛나 언니는 눈치 없는 척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에고~ 겨우 그 정도야? 누구는 뭐 정말 만나고 싶은 줄 아니?’라고 생각하며 하는 것일지도.“어휴, 저번에도 느꼈지만 이 집은 새집 냄새가 너무 나. 화학물질 냄새가 확 올라와요. 인테리어 새로 한 건가?” (p.140, <도움의 손길>)웃돈까지 얹어 준 도우미 아주머니는 이래저래 참견이다. 그냥, 정해진 일만 해주고 미리 그어놓은 선을 넘지 말았으면 싶은데, 매번 넘어온다.

아니, 도우미 아주머니의 선은 내 쪽으로 훨씬 들어와 있는지도 모른다.

나와 당신이 그렇다.

 

 

 

3. 나와 당신

 

언니 전입 신고는 했어요? 주민센터에서 확정일자 안 받았어요?”

확정일자? 그게 뭔데?” (p.18, <잘 살겠습니다>)

거기서 물어보더라고. 이 집 계속 나가고 있냐고. 그래서 그렇다고 했지 뭐.”

내가 거짓말은 또 못하겠더라고. 주님 믿는 사람이라.” (p.156, <도움의 손길>)

 

확정일자조차 제대로 모르는 빛나 언니는 결혼도 잘하고 직장도 잘 다니고 있다. 웃돈을 얹어 주는 마음까지 베풀었던 도우미 아주머니는 나와의 비밀을 몽땅 까발렸다. 주님 믿는 사람이라 거짓말을 못 하겠더란다. 결국, 같이 살아야 한다. 내가 볼 때, 내 관점에서, 내 경험에서 당신을 판단하는 것은 패착이다. 당신들만의 삶의 궤적이 있다. 술 몇 잔 기울이며 털어놓는 취중 진담 정도로는 안 된다. 말짱한 정신으로도 당신이 내 쪽으로 그어놓은 선이 어디까지인지 찾는 일은 쉽지 않다. 당연히 당신이 가르쳐 주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다.

 

그녀는 왜인지 모르게 더 신이 나서 말했다.”

큰아들은 벌써 결혼해서 손주 봤고, 둘째는 이번에 취직했고, 막내는 군대 가 있고...” (p.141, <도움의 손길>)

 

궁금함이 1도 없더라도 한마디 거들었으면 나을 뻔했다. “, 그래요. 손주도 보고 좋으시네요.” 정도. ! 그 정도. 물론, 그렇게 반응했다고 해서 나와의 비밀을 몽땅 까발리지 않았으리라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저 정도는 반응해 줄 수 있는 거 아닌 거 싶다. 내 집을 청소해 주시는 당신에게라면 말이다.

고장 난 기계를 고치고 나면 대부분의 반응은 고맙다.’,‘수고했다.’

정도다. 더는 바라지 않는다. 그런데, 왜 이렇게 늦었느니, 더 높은 놈 데려오라느니, 업체를 바꿔야겠다느니 지껄이면 고칠 맛이 똑 떨어진다. 더운 여름날 냉수나 음료수는 바라지도 않는다. 한마디면 된다. 적당하게.

 

그렇게 좋은 거면 앞으로 이 차장은 월급, 포인트로 받게.” (p.50)

내가 회사 생활 십 오년 하면서 한 번도 운 적이 없었거든요. 루바 공연 건 때문에 특진 취소되고, 팀 옮겨지고, 강남에서 판교로 짐 싸서 올 때도 눈물이 안 났어요. 그런데 그 포인트를 보고 있는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포인트가 너무 많아서. 너무 막막해서.” (p.51, <일의 기쁨과 슬픔>)

왜냐면, 우린 모두 이 차장 같은 사람들이니까. 월급을 포인트로 준다는 기발한 갈굼을 발명해 낸 그놈이 큰 문제지만, 바꿀 수 없지 않나?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지만, 우린 절을 쉽게 떠날 수 없다. 어쨌거나 오래오래, 진득하게 붙어 있을 수밖에 없다.

나와 당신,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다.

 

연봉계약서에 서명하던 그 순간, 씁쓸한 감정이 들 것 같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나는 정말이지, 진심으로, 기뻤다. 방송국이고 피디고 뭐고 지긋지긋했다. 대신 4대 보험이 어쩌고 하는 말들과 상여금, 특근수당, 연차와 실비보험 같은 단어들이 그렇게 따뜻하고 푹신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p.207, <탐페레 공항>)

 

내가 꿈꾸던 그 곳, 그 선까지 가 닿을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다. 그냥 그렇게 사는 거다. 조금 더 하면 되지 않을까? 그 사람이 선을 넘어오지 않았으면, 내가 선을 넘어간 것을 아닐까? 온갖 잡생각은 그저 공상일 뿐이다. 그리고 그 공상들로 채워가는 것이 일상이다. 그 일상을 단번에 벗어 던질 수 없다면 4대 보험과 연차와 상여금으로 가득 찬 연봉계약서에 당장 서명해야 한다.

그것이 나와 당신, 우리들의 당연한 삶이고 일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